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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삼켜버린 혼군 (#3) : 알콜 중독으로 나라를 망친 동진 사마요(재위 AD372-AD396)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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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2월28일 15시13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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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 혼군 서진혜제 사마충(AD259-AD307)      

 

진(晉) 2대 황제 사마충은 중국을 다시 통일한 진무제 사마염의 적장자였다. 두 살 위인 형  사마궤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사마충은 나이 8세(AD267)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선천적으로 지적 결함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냇가에 개구리가 우는 것을 듣고서 사마충은 시종에게 이렇게 물었다. “ 저 개구리들이 저렇게 시끄럽게 우는 것은 관청에서 시킨 것이냐 저들이 스스로 그런 것이냐?” 또 한 번은 가뭄으로 사람들이 밥을 굶어 죽는 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 밥을 못 먹으면 고기를 먹이면 될 테인데 왜 고기를 먹이지 않는가?”라고 물었던 사람이다. 이런 황태자를 걱정한 사마염은 몇 번이나 교체할까 생각했었다. 황태자를 교체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대신(정북대장군 위관)이 없지는 않았으나 적통을 버리고 연소자를 채택한다고 하면 조정의 반발도 클 것이므로 선뜻 바꾸지 못하며 망설였다. 특히 사마충의 장인이 당시 실세 중에의 실세인 가충이라면 엄청남 반발을 살 것이 분명했다.

   

사마염이 황태자를 교체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영특한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 때문이었다. 비록 아들 사마충이 부족하더라도 손자가 똑똑하니 사직은 잘 지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 떼문에 사마충을 폐위시키지 않았다. 그 대신 당시 최고의 문인 이희와 이밀을 스승으로 붙여 주어 가르치도록 했다. 

 

본인의 지적 결함에 더해 사마충을 더욱 무능한 혼군으로 만든 것은 부인 가황후였다. 가황후(이름 가남풍)는 가충(賈充)의 딸이다. 가충은 사마염의 아버지 사마소집권 시절부터 총애를 받아오던 권신으로써 교활하고 아첨을 잘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순의, 순욱 및 풍담과 한 패거리가 되어 진무제 사마염이 동생 제왕 사마유를 제치고 태자로 책봉되는데 핵심역할을 한 공신이었다. 조정에서 흉노 출몰이 빈번한 진주와 양주(감숙성지역)도독으로 가충을 몰아내려고 하자 순욱의 제안을 받아 사마충 태자와 혼인함으로써 못 생기고 질투심한  딸 가남풍을 태자비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마염은 당시 조정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위관의 딸을 며느리로 삼을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위씨는 다섯 가지 장점(賢, 多子, 美, 良, 白)이 있고 가씨는 네 가지 흠(妬忌, 無子, 醜, 短, 黑)이 있소.” 그러나 가충의 처 곽외가 황금뇌물로 양황후를 꾀었고 순욱 등의 무리를 동원하여 집요하게 사마염을 설득한 결과 태자보다 세 살이나 많았고 추한 가씨를 태자비로 만드는데 성공했다.(AD271년)가비는 태자비일 때 이미 몇 사람을 죽인 일도 있고 임신한 남편의 시첩에게 창을 던져 낙태시킨 적도 있어서 황제인 사마염에게 유폐당하고 폐위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자치통감에는 태자가 두려워했다고 할 정도로 가비는 무서운 여자였다. 

 

사마염이 죽고(AD290) 31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지만 정치는 오로지 가황후 및 동맹 등 환관 일당이 전횡했고 그에 반발하는 황족과 외척과 환관 사이에 끝없이 이어지는 내전으로 국가는 황폐해져 갔다. 사마 황족 사이에 벌어진 20여 년 간의 8왕의 난(AD291-AD311)으로 중국통일의 대업은 산산이 부셔졌고 혁혁한 공을 세운 훈구공신들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나라를 받드는 문무 충신들이 모두 제거된 데다가 불만에 쌓인 황족과 외척과 환관과 간신이 조정을 가득 메운 상태에서 사마충과 같은 혼군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런 나라가 어찌 나라이겠는가? 진나라가 수명을 다하기(AD316) 이전에 나라 곳곳에서 분열이 일어나면서 전량(AD301), 전조(AD304), 성한(AD306) 및 대(315)의 여러 나라로 쪼개지고 있었다. 조조나 제갈량이나 할아버지 사마의나 아버지 사마소가 달성하지 못한 중국통일의 대업을 달성(AD280)한 사마염의 공업을 한 세대 만에 다 말아먹은 것은 서진혜제 사마충이었다.  

 

 

<2> 서진(西晉)의 멸망(AD316)

 

AD316년 전조(前趙)의 유연이 장안을 포위하였다. 성내에서는 양식이 고갈되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황제 사마업(사마충의 조카)은 수치를 참고서라도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자고 생각하고서 항복문서를 시중 종창에게 건넸다. 그러나 당시 실세(상서복야)였던 삭침이 항복에 반대하면서 종창을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을 유요의 군영에 보내 이렇게 말했다.

“성안에 1년 분 양식이 있으므로 쉽게 함락 못 시킬 것이다. 

만약 나에게 의동삼사(재상에 해당)과 만호의 식읍을 준다면 항복하겠다.”    

유요는 단 칼에 삭침 아들의 목을 베어 버리고 말했다.

 

“ 내가 15년 군사를 거느렸으나

  그런 속임수 잔꾀로 이겼다는 예를 본 적이 없다.

  군량이 충분하다면 끝까지 버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늘의 천명을 받게 될 것이다.“

 

삭침에게 갇혔던 종창이 빠져나와 유요 군영에 가서 항복문서를 전달했다.(AD316년 11월10일) 그 다음날 황제 사마업은 입에 구슬을 물고서 유요의 전조(前趙)에 항복했다. 사마염이 서진을 세운지 꼭 56년 만이고 사마충이 죽은 지 구년만의 일이다. 삭침과 함께 국정을 농단했던 국윤은 자살했다. 전조의 황제 유총은 사마업(서진 민제)에게 광록대부 회안후라는 직을 주어 목숨을 살려 주었지만 2년 뒤에 전조의 내분에 휩싸여 18세의 나이로 죽었다. 

 

 

<3> 동진을 세운 사마예(司馬睿)(AD316)

 

서진 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강의 사마예는 사방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수복하려고 결심했다. 군사와 군량을 기한 내에 운반하지 못한 독운령사 순우백의 목을 즉각 벨 정도로 결의가 북벌의 의지가 강했다. 사직 유외가 사마예에게 말했다.

“순우백의 죄가 사형에 해당 할 정도는 아닙니다.” 

사마예가 사과했다.

“ 정치와 형벌에서 적당한 정도를 잃는 다면

  내가 아둔하고 모자라서 그런 것이니 용서하시오.“

사마예는 화를 풀고 관련자들을 모두 사면했다.  

서진 황제 사마업은 유요에게 항복하기 사신 송철을 몰래 건강(남경)의 낭야왕 사마예에게 보내 만기를 위임한다는 조서를 전달했다. 자신을 대신하여 황제가 되라는 말이었다. 사마예는 진왕을 칭하기로 하고 백관을 갖추어 조정의 모양새를 갖추었다.(AD316년 3월 9일) 이렇게 해서 서진은 망하고 동진이 서게 되었다.  

 

<4> 갈라지는 하북지역 : 오호십육국 시대의 개막(AD310년 경)

 

사마예가 건강(남경)에서 동진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장안부근 관중과 하북에서는 끊임없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단 전조 조정 내부에서 유연의 아들 유총이 죽고(AD318) 황위를 유찬이 이어받자 유찬의 대장군 근준의 반란으로 유찬이 피살되었다.(AD318) 장안에서 유요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근준의 근거지 평양(임분)을 토벌하러 나서자 동북쪽 형태에 자리 잡은 석륵도 남하하여 유요-근준-석륵 군사가 대치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다음 해(AD319)에 석륵은 후조라는 나라를 세웠고 탁발의로 또한 내몽고 지역에 대(代)라는 나라를 세웠다.  

     

 

<5> 왕돈의 반란과 사마예의 죽음(AD322)

 

동진 초기에 황제 사마예는 군권을 가진 왕돈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왕도에게 크게 의존해야만 했다.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왕씨 가문의 세력은 강남지역에서 막강했다. 그러나 왕도와는 달리 왕돈은 매우 교만하고 방자했다. 결국은 왕돈이 반란을 일으켜 남경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AD322) 왕돈은 정권을 잡자 매우 난폭하고 부패한 정치를 했다. 왕돈의 반란으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어 오른 동진 원제사마예는 병이 생겨 죽었다.(AD322년 윤11월 10일) 황태자 사마소가 즉위했다. 왕돈은 측근 전봉과 함께 사마소의 황제 자리를 빼앗는 계략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략을 몰래들은 조카 왕윤지가 아버지 왕소에게 알렸고 왕소는 왕도와 함께 황제를 지키는 대비책을 몰래 수립했다. 이 때 왕돈은 중병에 걸려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황제 사마소는 왕도를 대도독으로 하여 온교, 응첨, 치감 등과 함께 왕돈의 반역군을 격퇴시켰다. 그 사이에 왕돈은 병사하였다.   

 

 

<6> 환온의 황권 찬탈(AD371년) 시도와 죽음

 

사마소가 죽고 동진의 황위는 사마연(동진 성제:재위 AD326-AD342), 사마악(동진강제:재위 AD342-AD344), 사마담(동진 목제:재위AD344-AD361), 사마비(동진애제:AD361-AD365) 및 사마혁(동진폐제:AD365-AD371)로 이어졌다. 사마혁이 황제로 있을 당시 동진의 군권을 잡고 있던 환온은 한편으로는 모용위의 전연을 북벌하려는 계획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자리를 뺏으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동진 황제 사마혁은 평소 매우 행동을 삼가고 조심했으므로 흠을 잡을 수가 없었다. 측근 치초의 권고에 따라 황제의 침상의 일로 무고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 성불능인 황제가 두 명의 미인인 전씨와 맹씨에게 

  세 남자를 부쳐주어 아들을 낳게 한 다음       

  장차 황위를 건저(후계)하려고 한다.“ 

 

그런 다음 환온은 건강(남경)으로 군사를 몰고 와서 저태후에게 사마혁 폐위와 사마욱 옹립을 요구하였다. 저태후는 어쩔 수가 없이 승낙했다. 사마혁은 폐위되어 동해왕으로 강등되었고 그의 세 아들과 생모를 죽였다. 그리고 황권에 도전할 위험이 있는 사마욱의 친형 사마희를 무고로 참소하여 그 일족을 모두 축출해버렸다.(AD371년 12월 22일)

사마황제는 환온의 전횡에 대해 깊이 애통해 하며 이렇게 통탄해 했다.

 

“ 지사는 조정의 위태로움을 깊이 아파하며(志士痛朝危)

  충신은 주군이 욕보임을 당하는 것을 애석해 한다.(忠臣哀主辱)“     

  

마음 깊이 병을 앓던 황제 사마욱(간문제)는 다음 해(AD372)에 죽었다. 사마욱은 본처 왕씨로부터 도생, 유생, 주생, 천류 등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행실이 좋지 않아 폐출되거나 병으로 죽었고 말레이시아 출신 비녀 곤륜에게서 낳은 사마창명과 사마도자가 건강하게 살아 있었으며 그 중 큰 아들 사마창명이 10세의 나이로 황태자가 되었다. 죽기에 앞서 사마욱은 왕탄지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기려 하였다.

 

“ 대사마 환온은 주공과 같이 섭정하되

  만약 어린 아들이 보필한 만하지 않으면

  그대(왕탄지)가 황위를 빼앗으라.“

 

왕탄지는 조서를 보자마자 찢어버리며 말했다.

 

“ 나라는 선제(사마의)와 원제(사마예)의 나라인데

  어찌 폐하께서 오로지 하려 하십니까?“

 

황제가 다시 조서를 썼다.

 

“ 국가의 일은 대사마 환온에게 품의하되

   제갈무후(제갈량)와 승상왕(왕도) 고사를 따르도록 하라.“

 

그날 사마욱이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왕표지와 사안의 강청에 의해 우여곡절 끝에 10세의 황태자 사마창명이 황제가 되었는데 이 사람이 동진 효무제 사마요다. 은근히 자기에게 황위가 선양될 것을 바랐던 환온은 불만에 가득 찼다. 환온은 황제의 측근인 왕탄지와 사안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62세의 나이로 병사했다.(AD373년 7월14일) 왕표지는 사마창명의 친정을 원했으나 사안의 생각은 달랐다. 사안은 환충과 가가운 왕표지를 믿지 못하여 왕표지의 말을 꺽고 동진강제 사마악의 부인인 태황태후 저씨, 즉 숭덕태후에게 임정하여 섭정을 맡겼다.(AD373)     

    

 

<7> 숭덕태후가 섭정을 돌려 줌(AD376) 

 

AD375년 왕탄지가 46세로 요절하자 조정의 실권은 사안에게 있었고 군사대권은 환충에게로 돌아갔다. 다음 해(AD376) 숭덕태후는 정권을 황제에게 돌려주었다. 그 해에 대나라가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당하자 천하는 강북의 전진과 강남의 동진이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강북지역을 통일한 부견은 여세를 몰아 강남으로 침략해 내려왔다. 동진의 환충 또한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한수지역에서는 전진 군사와 동진 군사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선공은 환충이 감행했다.(AD383년 5월) 10만 대군으로 곡성과양양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부견은 백성 10명 당 1명 골로 군사를 징발하여 대대적인 역공에 들어갔다. 25만 군사를 부융에게 주어 환충을 방어하게 하는 한편 부견 스스로는 60만 대군과 27만 기병을 이끌고 장안을 출병하여 바로 동진의 수도 건강으로 진격했다.(383년 8월8일) 부견의 전진군사가 비수에 도달한 것은 두 달 뒤인 10월이었고 동진 장군 사현과 환이는 자신에 넘쳤던 부견의 군사를 대파하였다(비수대전).    

 

이로부터 전진은 몰락하게 되어 강북지역은 후연(모용수), 서연(모용충), 후진(요익중) 북위(탁발규), 서진(걸복국인) 및 후량(여광)의 여러 나라가 난립하는 상태로 발전한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중국을 통일했던 전진이 비수대전의 대패로 몰락하자 최대의 수혜자는 동진이었다. 동진은 비수대전의승리의 여세를 몰아 혼란에 빠진 북중국의 틈새를 비집고 게속 북진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사현이 있었다. 그러나 사현은 AD388년 46세를 일기로 죽었다.

 

 

<8> 타락하는 사마요

 

사마요가 황제가 된 것(AD372)은 열 살 때이었으나 숭덕태후가 섭정을 그만두어 정권을 넘겨줄 때(AD376) 사마요(=사마창명)의 나이는 14살 이었으며 그 후 십여 년 동안 동진은 사현과 왕탄지와 왕표지 등의 훌륭한 신하들 덕분에 비수대전을 승리하면서 국력을 크게 신장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진의 국운은 지도자의 무능으로 다시 추락하고 만다. 인주가 될 역량을 충분히 지녔던 사마요였지만 나라가 안팎으로 부강해지자 곧바로 타락하고 말았다.

첫째로는 술과 여자에 빠져 국정을 보살피지 않았다. 모든 정사를 두 살 어린 동복동생 사마도자에게 맡겨 버린 것이다. 사마도자 역시 술과 여자와 오락을 좋아하는 한량에 불과하였다. 둘째로 불교에 심취하여 오로지 승려와 비구니만 가까이 하였으며 그들이 모든 인사와 포상을 마음대로 휘둘러 댔다. 뇌물이 횡행했고 관직과 포상이 어그러졌으며 형벌과 송사가 혼란하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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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령 육납이 궁궐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 좋은 집안에 살면서

  섬아(형편없는 아이)가 이를 때려 부수려 하는구나.“

 

좌위영영 허영도 상소문을 올렸다.

 

“ 지금의 승려와비구니들은 왕왕 법복을 입고는 있으면서도

  오계(간, 도, 살, 허언, 술)의 기본법도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오묘한 참법을 어찌 지킨다고 하겠습니까.

  이들이 다투어 뇌물로 고관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하면서도

  고마운 줄 알라고 하면서 더욱 강탈하고 있으니

  어찌 부처님의 보시의 법에 합당하다고 하겠습니까?“   

     

황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상소를 묵살했다.

 

 

<9> 사마도자의 총신 왕국보의 국정농단

 

사마도자의 권력이 막강해지자 아첨과 참소에 능한 교활한 사마도자의 총신 시중 왕국보의 권력도 함께 높아졌다. 황제 사마요도 동생의 권세가 막강해지자 긴장하고 불안했다. 황제 사마요의 신임하는 측근 범녕과 서막은 왕국보를 파면해야 한다고 황제에게 간청했다. 황제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마도자와 왕국보는 황제에게 강요하여 범녕을 예장태수로 내쫓아버리게 하였다. 

 

황제 사마요도 사마도자의 국정농단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여 사마도자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왕공과 은중감을 번진(황제를 수호하는 지방군벌)으로 세워 왕공은 청주(산동성)지역, 은중감은 형주(호북성 지역)에 주둔하도록 시켰다.(AD390) 

 

사마도자가 총애하는 사람 중에 조아라는 광대와 여천추라는 하급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아첨과 뇌물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자들이었다. 사마도자는 조아에게는 위군태수, 여천추에게는 자의참군이라는 직위를 주었다. 조아는 사마도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마도자의개인 집을 지어 그 안에 인공으로 산을 올리고 강을 파내었다. 한 번은 황제 사마요가 사마도자의 집에 들렀다가 산과 강을 보고는 놀라면서 말했다.

       

“ 보기에 좋기는 하나 너무 장식이 심한 것이 아닙니까?“

 

사마도자도 놀라서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가고 나서 사마도자가 조아에게 이렇게 꾸짖었다.

 

“ 황상께서 산과 강이 인공으로 만들어 진 것을 알면 너는 죽은 몸이나 다를 바가 없다.”

 

조아가 이렇게 대꾸했다.

 

“ 사마도자 공께서 곁에 계시는데

  감히 누가 저를 죽이겠습니까?“

 

그 후로 건축은 더 없이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진행되었다. 황제는 왕공, 치회, 은중감, 왕수느 왕아 등을 발탁하여 사마도자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사마도자 또한 왕국보, 왕서 등을 끌어들여 방어에 나섰다. 조정은 붕당으로 갈라졌으며 사사건건 국론이 분열되었다. 왕국보는 매우 교만하고 사치하여 집을 황제와 같이 지었다. 왕국보가 황제에게 아첨으로 붙어 가까이 하여 권력을 농단하자 사마도자가 질투하여 황제 앞에서 검을 던지기도 하였다. 효무제가 죽자 왕국보는 권력이 사마도자에게 돌아갈 것을 눈치 채고 태도를 바꾸어 사마도자에게 붙었다. 왕국보의 사촌동생 왕서 또한 사마도자와 한 편이 되어 국정을 농단했다. 

  

 

<10> 장귀인에게 질식당한 동진 효무제 사마요(AD396)

 

사마도자는 알콜 중독이 심했다. 술 깬 날이 드물었다. 술에 취한 황제는 자신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귀인에게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 너는 나이가 서른이 넘었으니

  마땅히 폐출되어야 할 나이다.

  내 마음은 벌서 어린 아이에게로 가고 있다.“

 

장귀인이 격노했다. 환관을 시켜 술에 취한 황제에게 술을 더 마시도록 한 뒤 이불로 덮어 황제 사마요를 질식사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가위에 눌려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말했다. 황태자 사마덕종(당시 15세)는 어리석고 겁이 많아 묻지도 않았으며 사마도자 또한 복잡하게 따질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형님 사마요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으니까. 황태자 사마덕종은 어리석고 지혜롭지도 못했으며 말도 제대로 못하고 춥고 더운 것을 분별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동진 최대의 난신적자 환현은 사마도자를 독살시키고(AD402) 사마덕종을 폐위시켜 자신이 황위를 빼앗았다.(AD403) 환형이 황궁에 들어가 보좌에 앉으려 할 때 마루바닥이 꺼지는 일이 일어났다. 곁에 있던 은중문이라는 신하가 기막히게 대답했다.

 

“ 성덕이 너무 깊고 무거워 땅바닥마저 폐하를 실을 수가 없습니다.”

 

환현은 후에 송(=유송)을 세운 유유와 유의 등의 무리에게 공격을 당하여 결국 유의에게 참수 당한다.(AD404) 당시 환현의 나이는 36세 였다. 이후 동진 조정은 유유의 동조세력에게 장악되었다가 AD420년 동진 마지막 황제 공제 사마덕문이 유유에게 황위를 선양함으로써 동진 건국 104년 만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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