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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14) 2017년 대선정국, YS를 보면 길이 보인다 (상)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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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2월28일 15시09분

작성자

  • 최양부
  •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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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정국 속에 맞이한 YS 1주기

 지난 달 11월 22일 오후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오늘의 한국정치를 이끌고  있는 내 노라 하는 정치인들이 거의 다 모였다. 정세균, 정진석, 추미애, 박지원, 심상정, 문재인, 김무성, 이인제, 손학규, 안철수, 노회찬, 한광옥 등등이다. 그들을 이렇게 한자리로 불러 모은 사람은 ‘죽은 YS’ 였다. YS서거 1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참석자들은 ‘박근혜대통령 국정농단사태’(‘박통사태’)로 표류하고 있는 정국 속에 YS와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결단과 실천의 지도자가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어떤 언론은 오늘의 박통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듯 2012년 7월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당시 YS가 ‘박근혜는 칠푼이’라고 한 것을 두고 ‘촌철살인’의 평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박통사태가 일어나면서 YS가 마구잡이로 박통과 비유되기 시작했다. 박통에 대한 국민지지도가 5%대로 떨어지자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가운데 최저를 기록한 YS 6%의 기록을 갱신한 것이라고 언론들이 떠들어 댔다. YS는 뜻밖에 박통과 최저지지율을 다투는 대통령으로 비교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어느 언론도 YS가 역대 대통령가운데 83%라는 최고의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이었음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YS는 최고의 지지와 최저의 지지를 국민들로부터 함께 받았다. 그 만큼 YS는 국민들의 사랑과 미움을 한 몸에 받은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YS는 한국의 현대정치사를 만든 주역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큰 정치를 실천하려고 했다. YS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이후 1987년 6.10 민주항쟁과 직선제 개헌 쟁취까지 26년간 DJ와 같이 동지로서 대한민국 민주화에 목숨을 걸고 싸웠고 끝내 이겼다. 1987년 이후에는 최대의 정적인 DJ와 함께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을 새로 만들었다. 그래서 YS를 빼놓고는 한국정치를 말할 수 없고 YS를 통하지 않고서는 현대정치를 이해할 수도 없다. 

 

2017년 대선정국, YS를 보면 길이 보인다   

 촛불정치로 탄핵정국이 만들어지고 조기대선이 현실이 되면서 여기저기에서 2017년 대선정국을 전망하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17년을 1987년, 1990년, 1997년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YS 1주기를 거치면서 YS가 걸어간 족적이 다시 화두가 되고 있다. 1987년 YS의 DJ와의 대선후보 단일화 실패, 1990년 YS와 JP, 노태우의 3당 합당, 1997년 대선직전 YS당(여권) 분열과 대선패배, DJP연합에 의한 DJ 대선승리 등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여권의 새누리당 내 비박이 마침내 탈당을 선언하고 새로운 창당절차를 밟고 있다. 보수여권의 분열이 다시 이루어져 ‘2여 2야’의 4당 체제가 만들어질 전망이다. 야권은 이미 더불어당, 국민의당, 정의당으로 3분되어있고, 더불어당은 다시 친문(친노패권)과 비문으로, 호헌와 개헌파로 나뉘어 요동치고 있다. 국민의당도 친안(철수)파와 호남파(박지원, 천정배, 정동영 등)간 내부 갈등이 꿈틀거리고 있다. 반기문, 손핚규의 향배도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정치권은 그야말로 여야모두가 사분오열상태다. 경우에 따라서는 4당을 넘어 5당, 6당 체제도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앞으로 정치판이 어떤 합종연횡을 보여줄지는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87체제이후 지난 30년간의 선거와 정당변천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합집산을 거듭 하다가도 결국 선거가 임박해 지면 자신들의 유불리를 따라 1990년의 YS 3당 합당이나 1997년의 DJP연합과 같은 극적인 합당이나 연합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17년은 여러 면에서 1987년과 1990년, 그리고 1997년과 많이 닮아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이 다르다. 그러나 YS가 걸어간 족적을 보면 2017년 대선정국의 길이 보인다. 2017년을 앞두고 우리가 YS에 덧씌워진 정치 공학적으로 ‘만들어진 진실’를 걷어내고 ‘사실로서의 진실’을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다. 

 

‘1987년 대분열’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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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27일 고려대 운동장에서 열린 시국토론회에 참석한  YS와 DJ. 이 토론회를 끝으로 DJ는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했다. 이후 두 사람은 민주화 동지에서 영원한 정적이 되었다. (사진 연합)

 

 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에 따른 첫 대선을 앞두고 민주화투쟁을 이끌었던 YS와 DJ ‘후보 단 일화 실패’는 ‘악몽’ 같은 ‘민주화세력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것은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동지가 민주화이후 정적이 되는 것과 같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대한민국의 대분열’이었다. ‘1987년 대분열’은 지난 30년간의 정치지형을 만든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정치역사상 역대 급의 ‘정치적 대사건’으로 평가 할 수 있다. 진보를 앞세운 민주화 세력들은 1990년의 YS 3당 합당을 대분열의 시발점이라고 강변하지만 그것은 YS를 민주세력의 배신자로 DJ를 희생양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만들어진 진실’일 뿐이다. 1987년 DJ와 진보적 민주세력은 시대정신을 거스른 배신자였고, YS는 그들로부터 배신당한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1990년은 1987년의 결과라는 점에서 오늘의 정치지형은 1987년의 대분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1987년 대분열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민주화 세력 안에 혼재하고 있었던 중도보수와 진보세력의 분열이었고 한국정치의 지형을 ‘민주(반독재)와 독재(반민주)’에서 ‘지역과 이념’으로 바꾸는 대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사적 분열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YS 중심의 ‘후보단일화론(후단)’을 거부한 DJ의 ‘4자필승론’이고 재야운동권의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비지)’이다. DJ의 ‘4자필승론’은 영남을 노태우의 TK와 김영삼의 PK로 분리하고, 김종필의 충청, 그리고 김대중의 호남으로 4분할시켰다. 이것은 ‘지역패권주의’를 정치의 전면에 부각시켰다. 여기에 DJ와 비지세력은 호남은 핍박 속에 변화와 개혁, 민주와 통일을 갈망하는 진보 세력으로, TK와 PK는 개발 년대의 이익을 독점한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 보수 세력으로, 충청은 중도 보수, 수도권은 진보와 보수의 혼재 등으로 지역에 이념의 색깔을 덧칠하여 영호남간의 ‘지역차별주의’를 부각시켰다. 그래서 한국정치에 ‘지역별 이념적 성향’이란 새로운 정치지형이 만들어졌고 국민들은 ‘지역=이념’이란 ‘잘못 만들어진 진실’의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정치 공작적 발상이었고 대한민국과 국민과 지역주민들은 지역적 분열에 더하여 ‘이념적(사상적) 분열’까지 강요받았다. DJ는 그렇게 해서 TK, PK, 충청표를 노태우, YS, JP가 3분하면 자신은 호남 표와 수도권의 고정표(재야, 학생, 노동자등 비지 세력)를 받아 대선승리가 확실하다는 정치 공학적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결과는 독재군부세력의 승리였고 ‘4자 필패’였다. 그러나 지역패권주의와 지역차별주의는 그대로 남았다. 

 

‘만약에 그 때....’

 ‘만약에 그때’ YS와 DJ가 화합하면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형님먼저, 아우먼저’의 정신을 실천 했더라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과 국민은 ‘분열의 업보’를 숙명처럼 져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대한민국 정치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만약에 그때’ 두 사람의 ‘후보단일화’를 거부하고 DJ의 대선출마에 ‘비판적지지’를 보내며 DJ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재야운동권의 분파적, 분열적 행동이 없었다면 민주화세력의 분열과 분당과 창당, 합당과 연합, 야합 등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의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YS나 DJ가 대권을 잡기위해 민주화세력이 아닌 군부독재세력 또는 산업화세력, 기득권세력과 손을 잡는 ‘3당 합당’이나 ‘DJP연합’과 같은 ‘정치적 야합’도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군정을 늦추고 기득권세력들의 눈치를 살피며 국정개혁을 추진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철저한 민주개혁으로 민주주의의 제도적 공고화와 생활화를 이루고, 국정전반에 걸친 정치개혁, 행정개혁, 경제개혁, 사회개혁, 의식개혁 등을 통해 민주주의는 더욱 성숙해졌을 것이고, 환란 같은 일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며 나라는 이미 선진대국반열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때’ DJ가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명분 없는 대선출마를 합리화하는 ‘4자필승론’과 같은 정치 공작적 발상만 하지 안했더라면 저주스러운 ‘악의 씨앗’이 된 지역패권정치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국민들을 지역차별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하여 영호남 등 지역 간 대립과 갈등, 반목과 불신을 조장하는 ‘지역적 분열’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지역정치, 보스정치, 사당정치, 지역패권정치도, 그리고 수없이 정당을 만들었다 없애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정희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고 박통을 대통령으로 뽑는 일도 2016년에 보는 박통사태 같은 ‘박정희 유산’인 ‘권위주의적 통치의 부활’을 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YS와 DJ의 ‘분열의 정치’

 1987년 5월 선명한 민주화투쟁을 위해 YS와 DJ가 힘을 합쳐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 까지만 해도 양김은 동지적 관계였다. 군부독재의 집권연장을 막기 위해 민주화세력의 후보단일화는 당연한 것이었고, 특히 1987년 초 DJ의 대선불출마 선언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분위기는 YS가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순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6.29 선언이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DJ가 자신의 말을 뒤집고 대선출마를 선언하면서 모든 것이 뒤틀어졌다. 무엇보다도 양김은 동지에서 대권을 노리는 정치적 경쟁자로, 숙적으로 변했다. 

 

 통일민주당 국회의원들은 두 지도자의 단일화를 위해 앞장섰다. 두 지도자가 모두 나설 경우대선패배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의원들은 두 사람의 단일화를 압박했다. YS는 마지막으로 당내 경선을 제의했다. DJ는 그 제안마저도 거절했다. 1987년 10월 20일 후보단일화를 위한 통일민주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의원들은 YS와 DJ를 한자리에 불러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이 합의하여 결판을 낼 것을 촉구했다. 두 사람이 결론을 내릴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별도의 방에서 단 둘이 담판을 짓도록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DJ측이었다. DJ측 인사가 ‘함석헌옹이 위독한데 급히 DJ를 찾는다’는 급전을 알렸다. DJ는 함석헌옹 병문안을 이유로 판을 깨고 그 자리를 떴다. YS측은 미심적어 함석헌옹의 위독 사실을 확인할 결과 사실이 아니었음 확인했다. DJ측이 상황모면을 위해 사전에 기획한 연출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때 이후 DJ는 되돌아 올 수 없는 ‘분열의 다리’를 건넜고 두 사람은 불구대천의 적이 되었다. YS는 DJ를 ‘앉으면 거짓말 하는 사람’이라며 믿을 수 없는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통일민주당 조순형의원은 “역사는 1987년 10월에 당시 야당지도자 두 분이 후보 단일화 실패로 동시 출마함으로써 군정을 연장시켰고, 또 민주화는 30년 후퇴했다고 기록할 것이다”라며 두 후보의 단일화를 역설했다. 그러나 역사는 조 의원 예견대로 기록했다. 

 

 1987년 10월 29일 DJ계는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평화민주당’ 창당을 선언했다. 민주화세력의 분열이 현실화 되었다. DJ는 ‘비판적지지’라는 재야 운동권과 사회시민단체의 지지를 바탕으로 ‘4자 필승론’이란 궤변을 앞세워 자신의 대선출마를 정당화 했다. 당시 비판적 지지론자들의 중심에는 급진적인 재야 운동권을 총망라하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문익환 의장을 중심으로 1985년에 발족한 재야운동 27개 단체의 연합체)’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급진좌파들은 DJ에 편승하여 독자정권수립에 접근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YS와의 후보단일화를 반대하였고 DJ출마를 지지했다. 그러나 DJ와 진보세력의 공작정치는 결국 실패했고 민주화세력의 분열과 군부독재정부의 재집권을 도왔다. 1987년 DJ가 분열의 길을 택한 것은 민주화투쟁에 참여한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1980년대 시대정신인 군부종식의 대의를 저버리고 민주화 투쟁의 결과를 사유화하였고, 결국 대권에 눈이 어두워 ‘나라와 국민의 더 나은 미래’를 빼앗고 민주주의를 30년 후퇴시켰다는 역사적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DJ의 ‘4자필승론’이란 ‘분열의 덫’에 빠져 대선전에 뛰어든 YS도 대권욕에 사로 잡혀 ‘4자 필승론’에 침묵하고 정치적 고착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1987년 대분열의 역사적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대분열이후 한국정치의 새 지평

 1987년 대분열은 민주화세력 내 혼재해 있던 YS로 대변되는 중도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 세력, 그리고 DJ로 표현되는 재야 운동권을 포함한 급진적, 좌파적 진보 세력 간의 피할 수 없는 이념적 갈등과 충돌이었고 그 결과는 정치적 분열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분열의 최대의 정치적 희생양은 YS가 되었다. DJ는 진보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했으나 YS는 본의 아니게 민주화 세력에서 밀려나 보수의 지도자가 되었다. YS와 중도적 후단세력은 민주화세력에서 분리 고립되기 시작했고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PK 보수의 지도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YS에게는 ‘정치적 고립’이라는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1988년 총선을 거치면서 야권의 민주화세력내의 진보세력들이 대거 DJ를 중심으로 세력화하면서 YS와 PK지역의 정치적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기에 이념적 간극의 골이 깊어지면서 YS와 영남의 TK와 PK는 민주적 개혁세력과 멀어지고 기득권을 지키는 보수의 길로 내 몰렸고 결국 노태우가 제안한 3당 합당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수구적 보수와 개혁적, 중도적 보수의 ‘보수 대연합’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본질은 YS의 생존을 위한 전략적 결단이었다.  

 

2017년, 분열을 넘어 ‘화합과 통합의 정치’로 

 2017년 대권에 도전하는 지도자라면 촛불의 시대정신인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의 제도적 공고화’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권위적 국가통치시스템’을 청산하고 ‘책임 있는 민주적 국정운영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모두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러나 1987년의 헌법을 그대로 놔두고 단순히 대통령만 새로 뽑는다고 해서 ‘제왕적 대통령’의 제도적 청산은 불가능하다. 오늘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가져온 것은 바로 1987년 현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헌’은 2017년의 최우선 국정과제이다. 적어도 1987년의 민주화 세력들은 민주항쟁의 시대정신에 따라 ‘5년 단임 대통령직선제’를 확립을 이루기까지는 협력하며 개헌을 최우선으로 추진했다. 1987년 6,29 선언이후 개헌작업에 착수 10월 29일 신헌법을 공포할 때까지 4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12월 9일 신헌법에 따라 대선을 치렀다. 지금도 여야 정치인들이 나라와 국민의 더 나은 미래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도 지금은 자신들의 대권행보에 미치는 유불리에 따라 ‘개헌먼저, 대선먼저’를 저울질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2017년의 지도자들은 1987년 때 보다 더 분열되어있고 나라와 국민생각보다 더 대권욕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개헌을 정치적으로 대선과 결부시키는 행위는 한마디로 촛불의 시대정신을 배신하고 촛불항쟁을 사유화하려는 것일 뿐이다. 개헌논의를 먼저 활성화시켜 촛불이 요구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와 ‘권위적 통치시스템’을 대체할 새로운 시스템을 먼저 확정짓는 개헌을 추진하고 신헌법에 따라 대선경쟁에 나서는 것이 순리이고 촛불의 시대정신을 실천하는 길이다. 대권경쟁은 개헌 다음이다. 개헌을 통해 사분오열된 국민과 지역을 다시 통합하고 여야 정치권을 통합하고 후보 단일화를 해 나가는 것이 순리다.  

  2009년 8월 YS는 투병 중인 DJ을 문병하고 22년 만에 ‘DJ와의 화해’를 선언했다. YS는 “DJ는 나와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이었으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YS는 임종 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은 화합과 통합”이란 유언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 것은 YS도 생전에 걸어보지 못한 길이다. YS는 ‘분열의 한’을 풀어달라고 후배 정치인에게 큰 유언을 남겼다. 

 

 1987년 대분열이 물려준 지난 30년의 ‘지역과 이념에 의한 분열의 정치’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YS와 DJ를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2017년에 또다시 1987년에 YS와 DJ가 걸었던 ‘분열의 길’을 걷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담하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여야를 떠나 앞으로 30년 대한민국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철학과 비전, 그리고 어떻게 ‘지역과 이념으로 분열되고 분단된 나라’를 ‘화합과 통합과 통일의 나라’로 만들어 갈지를 고민해야한다. YS서거 1주기를 맞아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였던 정치인들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다짐을 하였을지 궁금해진다. 이제는 역사적 진실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나라와 국민의 더 나은 미래를 여는 정치를 해야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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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2월28일 15시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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