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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삼켜버린 혼군(#2) : 조조의 위나라를 망쳐버린 조예(AD205-AD239)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12월14일 17시0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7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 조조의 손자 조예(曹叡, AD205?-AD239) 즉위(AD226년 5월)

 

위나라 2대 황제 위명제 조예(曹元仲)는 조조(曹操)의 손자로 위나라 초대황제 위문제 조비(曹丕)의 아들이다. 그의 생모 견씨(AD183-AD221)는 원래 원소의 아들 원희(袁熙)의 부인이었는데 조비가 견씨의 미모를 보고 좋아하자 조조가 빼앗아 조비에게 처로 준 여자였다. 조예의 생모가 나중에 조비가 황제가 된 뒤로 곽귀빈을 편애하자 견부인은 남편을 볼 수가 없게 되었고 이것을 심하게 불평하자 곽귀인이 견부인을 참소하여 죽음을 내렸다(AD221년 6월28일). 조예가 열여섯 살 때 일이다. 곽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견부인이 죽고 조예를 곽부인이 키웠는데 조예는 곽부인에게 매우 깍듯하게 예의를 대했다. 조비가 조예와 함께 사냥을 갔을 때 조비가 어미 사슴을 죽이고 아들 조예에게 새기 사슴을 쏘라고 했으나 조예는 울면서 “폐하께서 어미를 죽였으나 저는 차마 그 새끼까지 죽이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망서렸다. 조비는 그 때문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조예의 생부는 조비가 아니라 원희라고 하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조비가 병이 깊어지자 죽기 직전에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AD226년5월)한 것을 보면 적어도 조비는 조예의 근본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며칠 뒤 5월 16일 조비가 진군, 조진 및 사마의 세 장군을 불러 유조를 내리고 40세 나이로 죽었으며 조예가 황제가 되었다.   

 

<2> 교활한 간신 유엽(劉曄)과 충신 진군(陳羣) (AD226년 5월)

 

조예가 황자로 있는 동안 대신들도 조예의 존재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조예 또한 정사에 신경을 쓰지 않고 독서에만 몰두했었다. 갑자기 황제로 즉위한 뒤로도 며칠 동안 조예는 오로지 시중 유엽하고만 이야기를 나눌 뿐 다른 신하들과는 대면하지 않았다. 마침 유엽이 나타나자 신하들이 조예에 대해 궁금해진 대신들이 어떤 분이냐고 묻자 유엽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시황제나 한나라 효무제와 비견할 정도지만 재주가 조금 모자라다고 할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고명대신 진군이 상소를 올렸다. 진군은 원래 유비의 부하였으나 권유를 받고 조조의 신하가 된 사람이다.

 

“ 무릇 신하가 부화뇌동하며 옳고 그름을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은 나라의 큰 

  근심거리입니다. 만약에 서로 화목하지 못한다면 

  서로 원수 같은 패거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원수 같은 패거리들이 나타나면 

  마음대로 칭찬하거나 깎아 내리는 기준을 바꾸게 되니

  진실된 사람과 거짓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어

  진실되고 알맹이 있는 사람을 잃게 됩니다.

  이것을 깊이 살피셔야 합니다.“ (AD226년 5월)

 

<3> 촉한 정벌을 두고 갈팡질팡하는 조예 (AD230년 9월)     

 

위나라 대사마 조진이 조예에게 촉한정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촉한은 제갈량의 지휘아래 적극적으로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한중과 성고 같은 위나라 남쪽 국경을 넘보고 있었다. 조예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남쪽에 나가 있던 무군대장군 사마의에게 장강을 따라 북상하여 한중지역에서 조진과 만나 촉을 공략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사공 겸 진군대장군 진군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 조조께서 장노를 공격하실 때(AD215년)

   콩과 보리를 대량으로 비축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함에 따라 군량이 크게 부족하여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 당시보다 급박할 것이 없고,

   또 한중의 야곡이라는 지역이 몹시 막히고 험난하여

   진격이나 퇴각이 매우 어렵습니다.  

   군량을 보호하며 움직이는데 상당히 많은 군사가 필요할뿐더러

   그마저 적군의 전후방 습격에 매우 취약하니

   전과를 올리기 매우 힘든 것을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조예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군의 건의가 일리가 있어 보였다. 조예가 군사작전을 중지시킬 것을 명령하자 조진은 다시 진격허락을 요청하는 편지를 올렸다. 진군 또한 그 전략의 비용과 작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편지를 올렸다. 황제 조예는 대사마 조진에게 바로 군사작전을 중단시켜야 했었다. 그러나 조예는 결정을 내리는 대신 진군의 상소편지를 조진에게 보냈다. 알아서 작전을 취소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대사마 조진은 진군의 편지를 읽고 군사작전을 중지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진군명령을 내리고 말았다.(AD230년 7월) 위나라의 촉한 공격은 참혹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8월에 한 달 가까이 비가 내리는 바람에 모든 잔도가 끊겨 버렸다. 군사이동도 불가능했고 군량의 운송도 어려웠다. 태위 화흠이 황제에게 충고했다.

“ 먼저 치도(治道)에 마음을 두시고 정벌을 나중에 계획하십시오.”

 

소부(스승) 양부도 간언을 올렸다.

 

“ 전진해도 경략할 곳이 없고 물러나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는 왕자가 취할 길이 아닙니다.“

 

산기상시 왕숙도 이렇게 말하며 전쟁중지를 요청하였다.

 

“ 천리 길을 양식을 나르게 되면

  병사들도 주리게 되며

  풀을 베어 밥을 지어 먹으면

  잠잘 때에도 배가 부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출병한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목표한 길의 절반도 못갔다고 하니

  이야말로 피폐하기 기다리는 적의 입 속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가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군사를 좀 쉬게 하셨다가  

  나중에 틈이 생길 때에 공격하면

  군사들은 기뻐서 죽음을 잊고 싸워 이길 것입니다.“

 

그 해 9월 출병한지 한 달 만에 결국 황제 조예는 철군 명령을 내렸다.

 

 

<4> 국정을 직접 돌보지 않는 조예(AD230)

 

촉한을 공격하러 갔다가 조예가 낙양으로 돌아왔다.(AD230년10월) 당시 낙양에서는 좌복야 서선이 남아서 정사를 총괄했었는데 황제가 돌아오자 결재할 서류를 서선 대신에 호아제에게 올렸다. 조예가 말했다.

“내가 살피는 것과 좌복야가 살피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끝내 사무를 보지 않았다.

  

<5> 딸 조숙의 사망을 애통하여 송장한 조예(AD232년 2월)

 

조예가 낳은 지 한 달도 안 된 딸 조숙이 죽자 매우 가슴 애통해했다. 평원의공주라는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세웠으며 죽은 생모 견씨의 종손 견황에게 결혼까지 시켜 합장시켰다. 그리고 견황의 후계를 두어 작위까지 세습하게 하였다. 스스로 장례에 참여하려 하였으며 몸소 생모의 고향인 하남성 허창까지 가려고 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경악했다. 사공 진군이 나섰다. 생후 3개월이 안 된 영아의 경우에는 상을 치르지도 않는다는 <예기>에도 합당하지 않았으며 성인의 예를 치르는 것이나 황제 스스로 상복을 입고 또 온 조정 대신들이 상복을 입는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소부 양부도 지적했다. 조비나 조조의 부인 무선황후가 붕어했을 때도 폐하께서 송장(장례참여) 하시지 않았는데 하물며 간난 아기가 죽었다고 송장하시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조예는 듣지 않았다. 끝까지 장례에 참석했으며 장지인 허창까지 직접 내려가 영구를 떠나 보냈다.  

    

<6> 무모한 요동 공손연 공격의 실패(AD232년 9월)

 

조예는 요동태수 공손연을 토벌하고자 했다. 공손연이 명분상으로는 위나라 속번이었으나 외람되게 오나라와 내통하면서 독립할 생각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여남태수 전예를 시켜 청주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공손연을 공략하고 유쥬자사 왕웅은 육로로 요동으로 향하였다. 산기상시가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기지 모샇면 공연히 적을 만드는 것이고

 이긴들 나라에 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요동 재물을 다 손에 넣는 다 해도 우리가 부유하게 되지 않습니다.“    

 

전예와 왕릉의 군사가 나아갔으나 득이 없어서 곧 철군했다. 

 

 

<7> 간사한 유엽의 궤변(AD232년 9월)

 

조예는 시중 유엽을 매우 아꼈다. 조예가 지난 번 실패한 촉한 정벌의 가능성을 조정 대신들에게 물었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따로 유엽이 황제에게 들어가 촉한 토벌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유엽이 나와서 대신들과 의논하면서 촉한 정벌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때 중령군 양기라는 사람이 유엽과 친한 사이였는데 촉한 정벌을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황제가 양기에게 촉한정벌 문제를 묻자 유엽의 예기를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 시중 유엽은 선제시절의 모사였는데

   그 또한 촉한정벌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깜짝 놀랐다. 아까 까지만 해도 촉한정벌을 찬성한다던 유엽이었다. 황제가 유엽은 찬성한다고 했다고 하자 양기가 이렇게 말했다.

 

“직접 불러서 물어 보십시오.”

 

황제가 유엽을 불러서 다시 물어보았지만 이번에는 유엽이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며칠 뒤 홀로 황제를 대면하게 되자 유엽이 황제를 꾸짖었다.

 

“ 다른 나라를 정벌한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일입니다.

  누설하면 모든 것을 그르치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누설될까 걱정이 되어

  지난 번 양기 앞에서 말씀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군사행동은 속이는 일입니다.

  행동을 개시하기 이전까지 모든 것은 비밀입니다.

  신은 적국이 이미 이 계획을 아가 두렵습니다.“

 

부끄러워 진 황제 조예가 유엽에게 사과했다. 유엽은 나가서 양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 큰 고기가 걸리면 줄을 놓았다 댕겼다 하면서

  제압할 때를 기다리면 못 잡을 고기가 없는 법이오.

  임금의 뜻이 어찌 큰 물고기만 하겠소.

  그대는 곧은 말을 하는 신하이기는 하나

  계략은 좀 부족한 것 같으니

  채택할 수가 없겠소.“

 

양기가 사과하며 물러났다.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유엽은 항상 황제의 뜻만을 살피는 사람이라 조심해야 합니다.

  시험 삼아서 황제의 뜻과 반대되는 쪽으로 말씀하시면

  반드시 유엽은 그 쪽으로 답할 것입니다.

  매사 그렇게 물어 보시어

  유엽이 항상 폐하의 뜻에 반대하는 쪽으로 대답하는 것을 보시면

  그것을 아실 수가 있습니다.“

 

황제가 자신의 뜻과 반대되는 쪽으로 유엽을 시험하여 물었더니 과연 유엽은 그렇게 대답하였다. 이때부터 황제는 유엽을 멀리하였다. 유엽은 한직으로 물러나 있다가 근심걱정으로 병사하였다. 

  

   

<8> 전쟁 대신 궁궐건설에 빠진 조예

 

촉한 정벌과 요동 정벌에 실패한 조예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허창군, 낙양궁, 소양전, 태극전 등 수 없는 궁궐을 짓는데 국가재산을 쏟아 부었다. 사고 ㅇ진군이 다시 나서서 반대했다.

 

“ 우임금은 당우의 태평성대였을 때에도

  궁궐을 낮추었고

  조악한 의복을 입으셨습니다.

  지금은 전쟁의 상난이 있은 다음이고

  사람의 숫자가 적어 나라가 예전의 군에 불과한데

  변경에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 장군과 병사의 노고가 많습니다.

  군사가 피폐해지는 것은 오나라나 촉나라가 바라는 바 

  국가존망이 걸린 중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궁궐 건축을 심각히 재고해 주십시오.“

 황제 조예의 대답은 놀랍기만 하다. 

     

 “ 왕업과 궁실은 병행하는 문제이요.

  적을 없애고 나면 방어하는 일은 당연히 줄어들게 되어 있소.   

  궁궐을 짓는 것은 황제의 중요한 업무이니

  마치 한나라 소하가 한 일과 같은 것이오.“

  

진군이 다시 따지며 나섰다.

 

“ 한고조 유방은 항우와 싸우느라 궁궐이 불탔으므로

  소하가 다시 지은 것입니다.

  모두 요긴하고 긴급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방은 장대하고 하려하게 짓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전국이 평정된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욕망이란 항상 그럴 듯한 말로 변명을 해대는 것이라서

  헐고 싶을 때에는 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짓고 싶을 때에는 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지어야 한다면 신하가 말려도 지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신하는 신하된 도리로써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후한명제(유장)는 종리의의 반대를 받아들여 중단했지만

  결국에는 덕양전을 짓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종리의보다 설득하는 힘이 모자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조예는 성질이 매우 급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짓고 있는 궁궐이 기한을 못 맞추면 직접 불러서 물었으며 대답이 입에서 다 마치기도 전에 이미 목이 날라 갔다고 기록했다. 왕기, 양부, 왕숙, 진군, 고당륭, 노욱, 동심, 위기, 장무 등 여러 사람들이 간언을 올렸지만 조예는 그치지 않았다.

 

 

<9> 후궁에 빠진 조예

 

조예는 궁궐 안에 있는 비빈에 빠졌다. 비빈에게 조정 대신에 맞먹는 녹질을 수여했고 그 숫자 도한 수 천 명을 넘어섰다고 했다. 조정대신을 만나 정사를 보는 것이 귀찮아지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여자내관을 6명을 뽑아 상주문을 일고 보고하고 답하게 하였다. 정위 고유가 120명의 비빈도 너무 많은 데 비빈 숫자가 수 천명을 넘는 것은 종실의 후사를 빈약하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말렸다. 소부 양부도 또한 충간의 말을 올렸다.  

 

“ 걸왕은 선실 상랑을 지었고

  주왕은 경궁과 녹대를 지었으며

  진시황은 아방궁을 짓다가 다들 망했습니다.

  만민들의 고생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눈과 귀에 바라는 것을 좇다가

  망하지 않은 사람이 아직 없었습니다.

  폐하는 요,순,우,탕,문,무왕으로 법칙을 삼으셔야 하고

   하의 걸, 은의 주, 초의 영왕, 진시황의 경계를

   마음에 새기셔야 합니다.

   스스로 놀고 즐기면서

   궁실과 대관을 장식하게 되면

   반드시 전복멸망의 화가 미칠 것입니다.

   군주는 머리,

   신하는 수족이니 얻고 잃는 것이 한 몸통입니다. “

   폐하께서 신의 말씀을 새기지 않으신다면

   황조열고가 세우신 나라를 땅에 떨어뜨릴까 두렵습니다.

   신을 죽게 하시어

   만분의 일이라도 보충하게 하신다면

   죽는 날이 오히려 사는 날이 될 테니

   삼가 관을 옆에 두고 목욕하고 엎드려 거듭 죽음을 기다리겠습니다.“

 

양부는 궁녀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궁정관리에게 숫자를 물어 보았다. 궁정관리는 국가비밀이라며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 난 양부는 그 관리에게 장 100대를 내려 때리며 말했다.

 

“ 황제는 구경(九卿)과 함께 비밀이라는 게 없는 법이다. 

  너 따위 하급관리가 감히 재상인 나에게 

  비밀 따위로 농락하려느냐?“

 

황제가 그 소식을 듣고 양부를 매우 거렸다.  

이즈음 조예는 모가의 딸 모황후에 대한 애정이 식고 대신 곽부인을 총애하였다. 늘 그렇듯이 후원에서 연회를 열자 곽부인이 모황후를 모셔오자고 권했으나 조예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주위에게 연회소식을 입 밖에 내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 다음 날 모황후가 조예에게 어제 북원에서의 연회가 즐겨 우셨냐고 물었다. 연회소식이 누설된 것이 불쾌했던 조예는 당장 내시 10여 명을 죽였으며 결국 모후에게마저 죽음을 내렸다.(AD237년9월16일) 곽부인은 다음 해 12월 조예가 중한 병에 걸리고 나서 황후가 되었다. 

 

 

<10> 조예의 측근 유방과 손자의 전횡

 

조예는 만사를 직접 챙겼고 또 전쟁과 큰 공사를 많이 일으켰으므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 때 조예 대신 거의 모든 사무를 관장한 사람은 유방(劉放)과 손자(孫資)라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조예의 할아버지 조조시절에 비서랑으로 채택되어 모든 궁중 일과 기밀을 도맡아 왔던 사람들이다.   

조예가 황제가 되고나서 유방과 손자에게 더 많은 역할이 주어지자 조정은 유방과 손자에게 크게 기울어졌다. 국가의 중대사를 이들 둘이 결정하게 되자 조정 대신들조차 유방과 손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호군 장제가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 신이 듣기로는 대신들이 중시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황제가 주위사람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황제자신이 가려진다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극히 경계하는 말입니다.

  무릇 대신이 충성스럽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권위가 아랫사람에게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윗 대신들을 가볍게 보고 태만해지는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지금 밖에 돌아다니는 소문에 따르면

  중서 사람들(즉, 유방과 손자)이 비록 공손하고 신중한 것 같이 행동을 하고 있으나

  황제의 궁궐 바깥사람들과의 교제를 차단한다고 합니다.

  세상물정을 차단하는 것만 해도 황제를 혹세하기에 충분한데 

  하물며 사건의 요체를 장악하고서

  매일 황제를 곁에서 시중을 드는 입장에서 보면

  어찌 황제를 조종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사건보고를 미루거나

  사건을 다르게 보고하거나 함으로써 황제를 현혹시키기 쉽고,

  또 친한 사람만을 천거하고

  감정이 있는 사람을 험담하여 몰아냄으로써

  상벌이 뒤바뀌고

  진상이 뒤바뀌며

  직언은 막히고 굽어지며

  아부는 통달되는 것입니다.

  소소한 미세한 것이 황제에게로 들어가 

  결국 큰 형태로 국난을 만들게까지 되나

  친하고 익숙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을 의심하거나 깨닫지 못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황제께서는 제발 여러 현신들에게 직책을 나누심으로써

  전리(專吏,전권을 휘두르는 신하)가 나라를 삼키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십시오.“ (AD238)

   

조예는 장제의 충언을 듣지 않았다. 이 때(나이 서른 셋) 황제의 병이 매우 깊어지자 아들이 없었던 조예로써는 후사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예는 유방과 손자가 다섯 명의 조정 중신과 힘을 합해 정치를 맡기려고 하였다. 삼촌 대장군 조우, 영군장군 하후헌, 무위장군 조상, 둔기교위 조조(曹肇) 그리고 교기장군 진랑이 그들이다. 그러나 하후헌과 조조는 평소에 유방과 손자의 전횡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유방과 손자 또한 그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간질로써 황제의 결정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공손하고 예의가 바른 조예의 삼촌 대장군 조우가 대장군직을 사양했다.

조예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유방과 손자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삼촌께서 진심으로 사양하시는 것인가?”

유방과 손자가 대답했다.

“실제로 업무를 담당할 능력이 없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예가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합당한가?”

유방과 손자가 곁에 있던 조상을 보며 말했다.

“ 조상과 사마의를 불러 맡기시면 될 것입니다.”

조예가 조상에게 물었다.

“ 조상 그대는 이 큰 일을 감당할 수가 있겠는가?”

조상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 유방의 그의 발을 밟으며

귓속말로 대답할 말을 가르쳐 주었다.

“신은 죽음으로써 직을 감당하겠습니다.” 

조예는 전에 내린 결정을 뒤짚고 조상과 사마의에게 후사를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유방과손자가 황제에게 다가와 직접 조서를 그렇게 쓰시라고 종용하자 황제가 말했다.

“나는 피곤하여서 쓸 수가 없구나.” 

유방이 황제의 손을 붙잡고 글을 써내려갔다. 

“ 조서를 내리니

  연왕 조우 등의 관직을 면직시키니 

  모두 봉지로 떠나도록 하라.“

그리고는 조상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상의 능력이 모자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았다. 따라서 손례라는 유능한 사람을 조상의 참모부장으로 임명하여 보필하도록 했다. 그리고 하남성 급현에 있던 사마의를 급하게 불러들였다. 사마의는 즉각 조정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을 직감하였다. 왜냐하면 연왕 조우가 이미 자신에게 장안으로 급히 들어오라는 황제의 명령을 보냈는데 이번에 또 다시 다른 조서를 보내 장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사마의는 급히 말을 몰아 조정으로 들어와 황제를 만났다.

조예가 사마의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 나의 후사를 그대에게 부탁하오.

  그대는 조상과 함께 어린 아들을 보필하여 주시오.

  죽는 것은 참을 만하나

  그대를 만나지 못하고 죽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소.

  이제 그대를 만났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소.“

 

조카 여덟 살짜리 어린 제왕을 사마의에게 인사시킨 뒤 황태자로 세웠다. 이 사람이 다음 황제 진소제(재위 AD239-AD254) 조방이다. 얼마 뒤 조예는 34세로 사망했다.(AD239년 1월)

 

 

<11> 조예가 혼군이라고 보는 이유

 

자치통감은 조예를 비교적 높게 평가하고 있다. 침착하고 강하며 민첩하고 밝다고 기록되어있다.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대로 행동하고 간결하며 공로와 능력을 헤아릴 줄 알았고 들뜨고 거짓된 것을 끊었다고 했다. 특히 기억력이 좋아서 하급 직원들의 성격과 품행, 명성과 행적을 다 기억했으며 그 부모형제까지도 기억을 했다고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역사가 손성도 비슷하게 조예를 평가하면서도 덕을 세우지 못하고 친척을 박대하였고 결과적으로 정권을 사마씨에게 넘겨주고 말았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조예가 혼군이라는 첫째 이유는 대부분이 반대하는 수 없는 군사정벌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점이다. 촉에서는 제갈량이 있었고 오에는 손권이 강력하게 버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는 점이 그를 혼군으로 보는 첫째 이유다. 둘째로는 수도 없는 궁궐 공사로 국력을 피폐하게 하였다.

셋째로 황후와 첩에 대한 관계가 너무 경솔하고 소홀하며 난폭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많은 신하들이 지적했듯이 여자관계가 너무 복잡하여 후사를 얻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넷째로 수 없는 충신들의 간언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 자치통감을 통해서 보면 조예 때만큼 충신들의 아름다운 충언이 많이 상소된 적이 없을 정도다. 왕기, 양부, 왕숙, 진군, 고당륭, 노욱, 동심, 위기, 장무 등 여러 사람들의 간언은 중국 역사를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상소문에 속한다고 할 만하지만 조예는 감동받지 않았다. 끝으로 유방과 손자 같은 잘못된 전리(專吏)에게 중책을 맡김으로써 할아버지 조조와 아버지 조비가 세운 사직의 공업을 송두리째 사마씨에게 넘겨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조예 다음으로 조방(魏少帝,재위 AD239-AD254)과 조모(魏高貴鄕公,재위 AD254-260)와 조환(魏元帝,재위 AD254-260)이 황제로 등극하기는 하지만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조정의 모든 권한은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로 이어지는 사마씨에 있었다.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진무제)이 위나라를 찬탈하는 것(AD260)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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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2월14일 17시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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