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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가뜨리는 힘, 내관(#4) : 조정을 무너뜨린 유모 조요와 내관 조절과 왕보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10월26일 17시06분
  • 최종수정 2016년11월04일 10시2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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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라가 망하는 이유가 어찌 단순하겠는가마는 그 중에서도 황제의 최측근에 붙어서 정치와 재정과 인사와 군사권을 마음대로 주무른 내관, 즉 환관만큼 국가존망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따로 없음을 중국역사는 환한 거울처럼 보여 준다. 수천 년 중국 역사를 통해 나쁜 이름을 남긴 수많은 내관들의 면면을 깊이 살펴보면 나라를 망가뜨리는 그들의 행동양식을 관통하는 몇 가지 중요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첫째로,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위엄과 복록이다. 그들에게서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든가 효도라든가 우애와 같은 전통가치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내관이 대개 극빈층 출신이라서 축재에 매우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나라에 대한 충성이나 백성에 대한 어짐(仁)이나 혹은 부모형제에 대한 효제와 같은 고상한 유가적 가치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별로 없거나 알아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도 않았다.

 

둘째로, 내관들이 모색하는 최고의 절실함은 오로지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눈에 들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식에서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총애가 그들 권력의 원천적 뿌리였기 때문이다. 황제가 즐기는 오락이라든지 황제가 즐겨 찾는 여자를 찾아서 공급함으로써 끊임없이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이 그들의 지상과제가 된다. 어떤 황제는 특히 오래 살고 싶어서 장생술 혹은 방생술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탁월한 도술을 가졌다는 사람을 찾아 소개하는 일이 내관의 주된 일이 되기도 했고 또 내관 스스로가 중독성이 큰 독약을 황제에게 불로장생약이라고 속여 먹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머리나 입에서 황제의 뜻과 다른 생각과 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셋째, 황제의 눈과 귀와 성총(聖聰)을 가림으로써 의도적으로 황제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렇게 황제의 판단을 흐리게 해야만 황제가 내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권력이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었다.

 

 넷째, 권력을 오로지하기 위해서는 쓴 소리를 마다않는 충신들이나 황제와 가까운 종친 혹은 인척 등 경쟁자를 지방으로 내치고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정적이라면 황제의 친인척은 물론 사대부세력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 제거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황제마저도 제거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다섯째, 내관들은 무리를 이루어 세력을 이루었지 절대로 홀로 따로 놀지 않았다. 배경이나 실력이나 모든 면에서 황제의 친인척 혹은 사대부에 비해 떨어졌으므로 그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지속하기 위해서는 내관들끼리 똘똘 뭉칠 필요가 있었다. 전한 원제 시절의 석현 3인방이나 후한 환제 쿠테타의 주역 오후(五候)나 영제시절의 10상시가 모두 내관의 집단세력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여섯째, 내관들은 권력영역을 무한정 넓혀 나갔다. 처음에는 황제의 옷과 치장, 목욕, 음식제공 및 심부름 등과 같은 허드렛일이 그들의 주된 업무였으나 점차 조정의 재정 인사와 같은 국내정치는 물론 외교군사 방면으로 권력영역을 넓혀 나갔다.  황궁수비의 군사권은 전통적으로 내관들이 장악하고 통제했으며 뿐 만 아니라 지방의 군사권(예를 들면 당나라 시대의 절도사)을 통제하기 위해 내관에게 감군(監軍)이라는 직책을 부여하여 모든 절도사의 군권을 일일이 통제지휘감독하게 하였다.

 

일곱 번째, 내관들의 세력을 대대로 유지하기 위해 양자를 입양하여 권력을 세습하기도 하였다. 정상적인 가정의 자녀를 내관의 양아들로 입양하여 권력을 세습하기도 했다. 조조의 친아버지 조숭은 후한 환제 때 내관 실력자였던 조등에게 입양된 대표적인 예였다.

위와 같은 내관들의 몇 가지 기본 행동원칙으로 인하여 중국 역사에 나타난 여러 나라들이 어떻게 망해갔는지 자치통감에서 몇 가지 예를 찾아 옮겨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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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제 붕어와 영제즉위 및 두태후(AD167)

 

AD167년 12월 28일 후한 11대 황제 환제 유지(劉志, AD132-AD168)가 36세로 죽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황후가 있었는데 제일 먼저 부인 양황후(양여영)는 8년 전(AD159)에 죽었고 그 뒤를 이은 등황후(등맹녀)는 투기가 심해 2년 전(AD165)에 폐출되고 곧바로 죽었으므로 두무의 딸 두묘가 귀인에서 세 번째 황후로 올라갔다. 남편 환제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12살 짜리 5촌 조카 유굉(AD156-AD189)을 세워 후한 12대 황제 영제(靈帝)가 되었고 두황후는 자연스레 두태후가 되었다.

 

3년 전 등황후가 죽었을 때 두태후는 귀인이었는데 황후책봉 문제로 조정은 의견이 심하게 갈렸었다. 환제 본인은 귀인아래 직급인 채녀 전성을 몹시 사랑했으므로 그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사예교위 응봉과 태위 진번은 “모후의 신분이 흥망성쇠의 근본이므로 다섯 가지 흠(부인상을 당한 자의 장녀, 형벌을 입은 집안, 부정한 죄를 지은 집안, 역적집안, 병이 있는 집안)이 있는 집안 여자를 세우면 안 된다고 반대했었기 때문에 명문가문이었던 두귀인을 황후로 세운 것이다.(AD165) 평소에 시기가 심하고 잔인하였던 두태후는 남편의 애첩이었던 전성을 바로 죽여 버리고 아버지 두무를 대장군, 진번을 태부, 유구를 태위, 그리고 호관을 사도로 임명했다. 그리고 황제를 세운 공신 11명을 임명했는데 대부분이 두무의 아들, 조카 등 무씨 일족이었고 단 한명의 환관 조절이 공신록에 들어가 있었다. 노식이라는 사람이 두무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 영제가 후사가 된 것은 족보의 순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된 것인데 무슨 공이 있다고들 작위를 받으시는 거요. 하늘이 정해준 순서에 따른 것일 뿐이니 자신들의 공이라 할 수 없소. 마땅히 사양하시고 몸과 명성을 온전히 지키시요.” 

 

두태후는 과거 자신을 지지해 준 진번에게 특히 고양향후라는 작위를 수여하려 했으나 ‘올바른 도로 얻지 않은 작위’라 하여 거부하였다. 진번은 이응, 두밀, 윤훈, 유유와 같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을 징소(등용)시킴으로써 태평시대를 기대하는 온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다.

 

(2) 황제유모 조요와  중상시 조절과 왕보(AD168)

 

12세 황제 유지에게는 어릴 적부터 젖을 먹이며 길러 준 유모 조요(趙嬈)와 여러 명의 여상시가 있었는데 이들은 환관무리의 우두머리인 중상시 조절과 왕보 등과 함께 당을 결성하여 두태후에게 붙어서 아침저녁으로 아첨과 아양을 떨어 두태후의 신임을 얻었다. 두태후는 유모와 여상시는 물론 조절과 왕보를 깊이 신뢰하였으므로 그들에게 높은 작위와 상을 내리는 것은 물론 중요한 국정에도 그들의 입김이 미치게 되었다.

 

(3) 두무와 진번의 환관척결 시도(AD168)

 

대장군(병권장악) 두무와 태위(총리) 진번은 모두 그들을 경계하고 혐오하였는데 진번이 두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절과 왕보 등 내관들은 돌아가신 황제시절부터 나라 권력을 잡고 농단하여 나라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혀왔으니 지금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는 도모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두무도 그럴 것이라고 동조했다. 두무의 내심을 파악한 진번은 기쁜 마음으로 나와 동지인 상서령 윤훈과 함께 계책을 확정했다. 때마침 일식이 있었다. 진번이 두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옛날 소망지는 석현 한(전한 원제 때 환관) 명을 처리하는데도 곤란을 느꼈는데 요즘같이 그런 무리가 수 십 명인 경우에야 어떻겠습니까. 저는 팔십이나 먹은 나이에 국가와 장군을 위해 해로운 자를 제거하고자 하오니 이번 일식을 계기로 환관을 파직시킴으로써 하늘이 내리는 변고를 막아야 할 것입니다.”

 

두무가 자기 딸인 두태후에게 가서 말했다. “ 예로부터 황문과 상시는 단지 궁궐 안의 일만 담당할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정사에도 깊숙이 간여하고 중요한 권한을 맡으며 양자로 입양한 자제들을 포진시켜 오로지 흉악하고 탐욕포악한 짓을 일삼고 있습니다. 천하가 흉흉한 것은 바로 그 까닭이니 서둘러 모두 죽이거나 폐출시켜서 조정을 깨끗하게 하셔야 합니다.” 두태후가 이렇게 반문했다. “ 한나라 초기서부터 환관이 있어왔는데 단지 죄 있는 사람을 죽여야지 어찌 모두 다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두태후가 거부하므로 두무도 할 수 없이 궁궐 안에서 난폭하기로 이름난 환관 관패와 소강만을 체포하겠다고 대답하고는 나와서 모든 낮은 직급의 환관을 연좌시켜 죽여 버렸다. 

 

그러나 환관의 수령격인 조절, 후람 등은 죽일 수가 없었다. 진번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 지금 경사(장안)이 매우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후람, 조절, 공승흔, 왕보, 정삽 등과 같은 환관 거두들이 조요와 함께 당을 이루어 따르는 자는 승진시키고 따르지 않는 자는 중상모략을 받고 있습니다. 온 조정의 신하들은 마치 강 위에 떠있는 나뭇조각 같이 되어 둥둥 떠다니며 오로지 봉록만 축을 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지금 이 무리들을 죽이지 않으시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 나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니 그 화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기는 신의 상소문을 널리 알리시고 천하의 간사한 자들에게 신이 그들을 미워하고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황제는 두태후에게 어찌할지를 물었고 두태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태후와 황제가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자 대장군 두무와 태위 진번은 환관과 가까운 사람을 몰아내고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조정 요직을 재편하는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환관을 총지휘하는 황문령의 자리에 조절 왕보 등과 가까운 위표를 파면시키고 대신 산빙을 임명했다. 그리고 산빙에게 환관 측 상서 정삽을 체포하여 고문하도록 하였다.

진번이 두무에게 다그쳤다. “ 아니 저 무리들은 의당 붙잡아 서둘러 죽여야 하는데 어찌 자꾸 고문만 하고 계십니까.” 두무는 죽이지 않고 계속 고문하여 결국 조절과 왕보가 연루된 중요한 단서를 포착했다. 두무는 즉시 윤훈과 산빙을 시켜 조절과 왕보 등을 체포하겠다는 상주문을 써서 유유에게 황제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4) 조절에게 죽은 시대의 으뜸(三君) 두무와 진번과 유숙(AD168)

 

조사와 심문을 대강 마치고 조절과 왕보의 체포명령을 내리기로 결정한 두무는 그동안 지내던 궁궐에서 나와 궁궐 바깥에 있는 대장군부로 옮겨갔다. 그런데 윤훈과 산빙이 쓰고 유유가 올린 체포문서를 훔쳐 본 환관이 즉시 달려 가 태후궁(장락궁)의 여상시 감독관 주우에게 보고했고 주우는 소리치며 욕을 쏟아 부었다. “ 방종한 내시들이야 죽어 마땅하다지만 우리들이야 무슨 죄가 있어 멸족까지 시킨단 말인가.” 화가 난 주우는 크게 소리치며 황제와 두태후에게 보고했다. “ 두무와 진번이 태후에게 아뢰어 황제를 폐위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대역죄입니다.” 곧바로 장락궁의 건장한 무사 공보, 장량과 같은 자 17명을 규합하여 피를 나누어 마시며 두무를 죽일 것을 맹약했다. 

 

조절은 황급히 황제에게 가서 상황이 긴박하니 덕양전으로 피해야 한다고 권했다. 황제에게 칼을 들려 뛰어가게 하고 그 옆으로 유모 조요와 여상시들이 황제를 호위하였다. 무력으로 협박하여 궁궐 문을 폐쇄시키고 황문령에 왕보를 임명하였으며 모든 권신을 체포하라는 조서를 써서 내렸다. 조서를 받은 산빙이 조서를 의심하자 왕보가 그 자리에서 타살했으며 윤훈도 죽였다. 체포되었던 정삽을 풀어 주자 정삽은 두태후를 위협하여 그의 인새와 인수를 모두 빼앗았고 두무를 체포하러 사람을 대사마부로 보냈다. 두무는 정삽이 보낸 사람을 죽이면서 말했다. “황문과 상시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힘을 다해 막는 자는 열후에 봉할 것이다.” 진번도 문하생 80여명과 함께 궁궐로 돌격했다. 진번은 왕보에게 잡혀 옥에 갇힌 뒤 환관에게 처참하게 죽었다. 조절은 황제의 조서를 고쳐서 지방에서 장안으로 소환되어 오던 장환에게 두무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온다는 소문에 두무의 군사들은 다 도망가 버렸다. 두무와 그 아들 두소는 결국 자결을 선택하였다. 두무나 진번은 현제 황제 영제의 할아버지 유숙과 함께 후한 말 시대의 가장 으뜸이 되는 세 군자(삼군) 중의 한 사람이었다.  

 

두무의 종친과 빈객과 인척이 모두 주살되었다. 유유의 일족도 마찬가지였다. 진번과 두무가 추천한 사람은 모두 면직되거나 가두었다. 조정의 실권은 환관 우두머리 조절과 왕보가 잡게 되었다. 조절은 위위가 되었고 훈작으로는 육양후를 내려 받았다. 왕보는 중상시가 되었다. 공적이 큰 주우, 공보, 장량 등 6인은 열후로 책봉되었고 나머지 11명은 관내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장환은 이용된 것을 알고 속으로 후회하며 사양하였다. 두태후는 남궁으로 옮겨 유폐되었고 영제는 동귀인을 황후로 책봉했다.

 

 

(5) 2차 당고의 화(AD169)

 

조절과 함께 환관세력의 우두머리였던 후람은 장검에 대해 원한이 있었다. 3년 전(AD166) 후람이 모친 상을 당했을 때 고향 산동성 어합현에서 크게 상례를 치르고 묘를 과도하게 크게 조성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그 지역 감독이었던 장검이 후람의 죄상을 조정에 밝혀 올렸던 일이 있었다. 후람이 재빨리 상주문을 중간에서 탈취하긴 했지만 그것을 안 장검이 후람의 모친 분묘를 파헤치고 고향가택을 파괴하며 재산을 몰수한 적이 있었다. 장검이 재차 후람의 죄상을 올렸으나 후람이 차단하였으므로 황제에게까지 올라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시 조정은 두무와 진번과 같은 사대부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후람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AD168년 두무와 진번이 죽고 조절 등 환관 세력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고 나자 세상은 바뀌었다. 마침 장검에게 사소한 인사 불이익을 받아 원한을 품고 있던 주병이라는 자가 후람에게 장검을 무고했다. 고향 사람 24명으로 당인을 결성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후람은 즉각 수사명령을 내리고 장검을 채포했다. 이 기회를 틈타 사대부를 발본하겠다는 생각을 한 대장추 조절은 황제에게 이렇게 요청했다.“우방, 이응, 두밀, 주우(이 주우는 앞(4)의 여상시 감독관 주우와는 다른 인물), 순익, 적초, 유유 범방 등이 구당(갈구리로 긁어모은 무리,鉤黨)을 결성하였으니 수사하게 해 주십시오.“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사대부들이었다. 황제가 왜 ‘구당’이라고 부르느냐고 묻자, 조절은 ‘못된 패거리(당인)’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대답했다. 황제가 왜 죽여야 하느냐고 다시 묻자 조절은 불궤한 짓을 하려 했다고 답했다. 황제가 불궤한 짓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자 조절은 ‘사직에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14살짜리 황제는 그들의 체포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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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지난 번 제1차 당고의 난(AD166)때에도 크게 화를 당한 이응에게 서둘러 도망가라고 권했다. 이응이 이렇게 말했다. “임금을 섬기는 일에는 어려운 일을 사양하지 ㅇ낳는 법이며 죄를 지었다면 벌을 피하지 않는 것이 절개입니다. 내 나이 예순에 죽고 사는 것이 하늘에 달려 있으니 도망간 들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이응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범벙을 체포하라는 문서를 받은 여남 감독 오도는 통곡을 했다. 범방이 오도가 크게 통곡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드시 나 때문일 것이다.”하고는 자진하여 자수했다. 현령 곽읍이 같이 도망가자고 하자 범방이 이렇게 말했다. “범방이 죽으면 모든 환란이 끝나는 것을 어찌 그대에게 화를 미치게 할 것이며 또 어찌 노모를 이리저리 떠돌게 하겠소?” 그 범방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 너는 이응, 두밀과 이름을 같이 했느네 죽은 들 무엇이 한스럽겠느냐. 아름다운 이름과 오래 사는 장수를 어찌 겸하여 같이 가질 수 있겠느냐? 내가 너에게 악행을 하라고 해도 해서는 안 될 것인데 네가 선을 행하도록 가르쳤으니 나 또한 악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2차 당고의 화로 약 100여명의 올바른 선비들이 죽었고 처자들은  변방으로 쫓겨났다. 곽태가 그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말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없어져 나락 병들고 시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로구나. ‘까마귀가 어디에 머무를지 모른다(瞻烏)’는 것이 이것이로구나.” 이제부터 후한은 본격적으로 조절이 주도하는 혼미한 환관집권의 시대로 접어든다.

 

(6) 장검(張儉)을 숨겨 주는 미덕

 

장검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도피했다. 다행이 그의 명성을 높이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집을 깨뜨려서라도 숨겨주었다. 이독이라는 집에 숨어있었을 때 모흠이라는 현령이 수색하러 왔다. 이독이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어찌 장검과 같은 죄인을 숨겨 주겠으며 혹 숨겨 주었다 하더라도 모흠과 같은 현인이 어찌 그를 잡아가겠소?” 모흠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거백옥이라는 현인은 혼자만 군자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데 어찌 공이 혼자만 의롭게 되려고 하시오.” 이독이 대답했다.“ 안 그래도 나누어 가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공께서 절반을 갖고 가시는군요.” 장검은 이독의 집을 나와 노나라 친구 공포에게로 갔으나 없었다. 마침 공포의동생 공융이 장검을 숨겨주었다. 장검이 공융의 집에 숨어있다는 정보가 새어 나가 결국 장검은 잡혔는데 공표와 공융도 숨겨 준 죄로 체포되었다. 공표가 나서면서 멀했다. 나를 찾아 온 것이니 내가 죄인이요.“ 동생 공융이 말리며 나섰다. ”숨겨 준 것은 나이니 내가 죄인인것입니다.“ 그 때 공표 형제의 모친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그 집안의 최고 어른이 나이니 내가 허물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현에서는 죄를 정할 수가 없어서 조정에 물었고 조정은 공표에게 죄를 주었다. 수년 뒤 당고의 화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복권조치가 내려져서 장검은 풀려 나와 위위까지 승진하였고 84세에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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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6년11월04일 10시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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