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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되어야 소통하는 군주다.(#2) -하늘의 경고에 귀 기울인 순제-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09월14일 17시28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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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통(疏通)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듣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명령이고 지시이고 하달이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교화되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소통은 그냥 듣는 것이 아니고 ‘듣고 고침(聞改)’이다. 소통은 매우 어렵다. 첫째, 높은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둘째,  낮은 사람들이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육단여친(肉袒輿櫬), 즉 죽음을 각오하는 의미로 웃옷을 벗고 관과 상여를 끌고서 곧은 말을 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다. 셋째,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말이 통하는 길, 즉 언로(言路)가 대부분 막혀있다. 결국 소통은 듣는 자와 말하는 자와 길(언로)의 삼박자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듣는 사람이다.  

역사상 보기 드문 몇 가지 소통의 사례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수록된 중국 역사에서  간추려 시리즈로 엮어본다. 

 

 

(1) 후한 순제(재위:AD125년-144년)와 취약한 집권배경

 

후한 순제(후한 8대황제:재위AD115년-AD144년)는 안팎으로 매우 불우한 환경에서 집권했다. 순제를 낳자마자 이를 질투한 염황후에게 생모 후궁 이씨는 독살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섯 살 때(AD 120년) 책봉된 황태자지위도 4년 뒤(AD124년)에 뺏기고 만다. 훗날이 두려웠던 염황후와 그의 형제들이 태자를 몰아내고 보다 다루기 쉬운 사람을 꼭두각시 황제로 세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버지 안제(후한6대 황제:재위AD106년-125년), 즉 염황후의남편도 출발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4대황제인 삼촌 화제(和帝:재위 AD88년-AD105년)는 여러 아들이 낳자마자 죽자 새로 낳은 아들을 궁 밖에 내보내 키우도록 했는데 화제가 27세로 일찍 사망(AD105년)하자 황후인 등황후는 2살짜리 아이를 밖에서 데려와 황제로 세웠는데 이 사람이 상제(후한5대황제 殤和:재위AD105년-AD106년)였다. 그러나 상제가 그 다음 해에 갑자기 죽자 부인인 등황후는 조정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약한 상제의 친형 유승 대신 상제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똑똑하다는 소문이 있는 당시 12세의 조카 유호를 황제로 영입하기로 했는데 이 사람이 순제의 아버지 안제(후한6대:재위 AD106년-125년)였다. 

 

 직계 대신 방계를 택한데 대해 조정이 술렁거렸고 태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등태후(전의 등황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오빠 등즐이 우후, 양진, 하희, 이합과 같은 매우 훌륭한 사람을 등용시켰으므로 나라가 매우 안정되었다. 양진이란 사람은 은혜를 입었던 왕밀이 금 10근을 사례하면서 아무도 모른다고 하자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당신이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느냐”하는 고사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 등태후는 안제를 교체할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안제가 친정을 강화하려는 생각이 못 마땅했었던 것 같다. 등황후의 교체계획을 알게 된 안제의 유모 왕성이 즉시 등태후의 비리를 몰래 안제에게 알렸고 안제 또한 등태후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찼다. 마침 등태후가 다음 해에 죽자(AD121년3월) 안제 교체 건은 물 건너가게 되고 안제가 친정하면서 등태후에게 원한을 입었던 사람들이 염황후 일가를 등에 업고 등태후 일가를 숙청했다. 이 중에 한 사람이 종이를 발명한 환관 채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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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황후 일가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남편 안제를 설득해 태자를 폐위시켰다.(AD124년 9월) 그 다음해(AD125년) 3월 아버지 안제는 32세의 나이로 지방 순찰 중에 갑자기 죽었다. 대신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폐태자 유보(순제)가 있는 한 권력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한 염씨 일가는 일단 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서둘러 환궁한 다음 황제의 사망을 알리고 유조에 따라 유보 대신 북향후 유의를 후사로 세운다고 발표했다. 이 사람이 소제(후한7대 황제:재위AD125년)다.

 

 

염씨의 쿠테타, 즉 소제 옹립이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소제가 위독하다는 첩보를 접한 환관의 우두머리 손정이 왕강과 왕국등과 주도하여 염씨에 대한 반정 쿠테타를 일으켜 염씨 일당을 제거하고 11살 순제를 옹립한 것이다. 등태후에서 안제, 염씨의 소제, 그리고 손정의 순제로 숨 가쁘게 정권이 옮겨가는 상황에서 순제는 즉위한 것이다.(AD125년)

 

 

(2) 지진으로 땅이 85장이 갈라지다.

 

AD133년 7월 8일 낙양 선덕정의 땅이 85장(丈:약3미터)이나 크게 갈라졌다. 지난 4월 29일에도 낙양에 큰 지진이 있었던 터라 걱정이 컸던 황제는 바로 지시를 내렸다. 정치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황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허심탄회하게 지적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어떻게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을지 해답을 제시하라고 부탁했다. 이고(李固)가 대답했다.

 

 “ 첫째는 인사의 잘못입니다. 아무리 기른 은덕이 크다고 하나 유모에게 작위를 주고 봉국을 열게 하시는 것은 안 됩니다. 한 나라가 일어난 이래로 열여덟 왕이 계승을 했는데 그 누가 유모의 은덕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위로는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경전에 의거하여보니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책봉하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로, 비나 황후의 가족을 중용하시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비나 황후의 집안의 온전하지 못하게 끝난 것이 어찌 그들의 천성이나 본성이 원래부터 악해서 그랬겠습니까. 급히 작위를 높여주고 권력을 세워 주다보니 가득 찬 것을 줄여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하늘의 도리 때문 아니겠습니까. 지난 번 염황후 일가의 종말이 비극적이었던 것도 너무 빨리 권력을 갖게 된 때문 아니겠습니까. 노자가 말하기를 ‘빠르게 앞서가면 빠르게 무너진다(其進銳者 其退速也)‘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셋째로 내시들을 물리치셔야 합니다. 내시들은 황제의 곁에 붙어서 하늘을 진동시키고 자제들이 끝도 없이 권력의 핵심요직을 틀어쥐고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겸손하고 말이 없으며 바깥일에 간여하지 않는 척하지만 사실은 아첨하는 사악한 무리들과 짜고 인사에 깊이 간여하고 있습니다. 이들 무리를 속히 제거하셔야 합니다. 

 

넷째로 공적이 없는 종친들에게 관작을 내리신 것을 철회하셔야 합니다. 관직에 나쁜 인물이 등용되는 것은 그 폐해가 바로 백성에게 미치기 때문이요 정치가 한 번 잘못되면 백년이 지나도 고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시경>에도 ’위로 황제가 거꾸로 되면 아래로 백성이 병이 든다(上帝板板 下民卒癉)‘하지 않았습니까. 마땅히 사람을 뽑는 것에 심혈을 기우리셔서 바른 정치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겉으로 굽으며 반드시 그림자도 굽는 법이며 근원이 맑으면 흐르는 물도 맑은 법입니다.(表曲者景必邪 源淸者流必潔) 이렇게 하시면 모두들 만족하며 승평시대가 올 것입니다.” 

 

 마융, 장형 등 여러 사람들이 대책을 올렸지만 황제는 이고의 대책을 일등으로 삼고 그의 말대로 유모 송아를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이로 인해 모든 내시들이 잘못을 빌며 조정이 숙연해졌다.(AD133년)   

             

 

(3) 주거(周擧)의 말을 듣고 탐욕스럽고 요망한 자를 몰아 낸 순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도 10년이 되는 AD134년 3월부터 5월까지 무려 석 달 동안 하늘이 가물었다. 순제는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도 비가 오지 않자 궁궐 끝자락에 걸터앉아 하릴없이 비를 빌다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상서령 주거(周擧)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주거가 답했다. “폐하께서는 효문제와 광무제의 법도를 폐기하시고 망한 자(진)나라를 따라 사치를 하였습니다. 초목이 타들어가는 가뭄이 해가 거듭되는 되는데도 폐하께서 잘못을 고쳤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헛되이 궁궐 귀퉁이에 앉으셔서 이슬과 먼지를 덮어쓰신다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겉보기에 화려한 것만 좇으시고 실체를 돌아보지 않으시니 연목희어(緣木希魚)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실로 믿음으로 정치를 개혁하시고 바른 도를 상하시며 현혹됨을 고치셔야 합니다. 후궁 가운데 가까이 하지 않는 여인을 내보내시고 궁궐의 비용을 과감히 줄이셔야 합니다.<역전(易傳)>에 이르기를 ‘천자가 하늘을 감응시키는 것은 하루를 미루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서두르십시오.” 

황제가 다시 주거를 불러 물었다.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이요?” 

주거가 대답했다. “당연히 관리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탐욕스럽고 더러운 짓거리를 하는 사람은 즉시 내보내고 요망하고 사악한 자들도 쫓아내야 합니다.” 

황제가 궁금해 다시 물었다.“누가 탐욕스럽고 더러운 짓을 하며 요망하고 사악한 자들은  누구요?” 

주거가 다시 대답했다. “신은 기밀을 다루는 자가 아니어서 여러 신하를 판별할 능력이 없읍니다만, 공경대신 중에서 자주 쓴 소리를 직언하는 사람은 충성스러운 사람이고, 아첨하며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는 자는 요망하고 사악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곁에 있던 태사령 장형도 거들었다. “폐하께서 차마 잘라내지 못하시고 여러 사람들이 황제의 권위를 나누어 갖게 하고 계십니다. 형덕팔병(刑德八柄,형벌과 상작의 여덟가지 권한)은 천자에게서 나오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런 후에야 신성한 덕망이 가득 차 재화가 소멸될 것입니다.” 

순제는 주거의 요청대로 사도 유기와 사공 공부를 파직하고 그 후임으로 황상을 사도로, 왕탁을 사공으로 삼았다.   

 

 

(4) 이고를 신뢰한 순제의 비 양황후(梁皇后)도 대단하다. 

 

AD145년 순제가 30세의 나이로 죽었다. 넉 달 전에 태자로 책봉된 2세 아기 유병이 충제(후한9대황제:재위145년)가 되었지만 실권은 모두 양 황후와 동생 대장군 양기에게 있었다. 양황후(본명 梁妠,AD116년-150년)는 양상의 딸로써 아버지의 누나, 즉 큰고모는 화제의 생모이자 장제의 부인인 공희황후였으므로 본인은 대단한 황족이었다. 

 

 순제가 황후를 4명의 귀인 중 제비뽑기하려고 했다. 아마도 양귀인 집안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이 꺼림칙해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집안 배경으로 보나 재주로 보나 양귀인 만한 사람은 없었다. 또 황후를 제비뽑기로 결정한 예가 없었으므로 대신들도 반대했다. 

 결국 양귀인이 AD131년 황후가 되었다. 순제는 양황후를 매우 아껴 자주 찾았으나 양황후는 항상 이렇게 사양했다.

 “양(陽,즉 황제)은 베풀고 음(陰,즉 황후)은 오로지 독차지 하지 않는 법입니다. 종사(螽斯,메뚜기=황후)는 백가지 복의 근원이므로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아야 합니다. 소첩은 비와 구름의 혜택이 골고루 내려서 소첩이 죄를 벗어나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황제를 독점한 후 처참하게 말로를 맞이한 황후의 경우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스스로 절제한 것이다. 

 

남편 순제가 죽은 다음 해에 3세인 충제가 죽자 후계문제가 대두되었다. 충격에 빠진 대신들은 혼란을 막기 위해 국상의 발표를 미루자고 했다. 그러나 태위 이고(李固)는 안 된다고  했다. 

 “황제가 비록 어리다고는 하나 천하의 군부이셨습니다. 어찌 자식 된 사람으로 어찌 감출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 진시황제가 죽은 뒤 조고가 숨긴 일이며 북향후(즉, 7대황제 소제) 사건과 같이 국상을 숨기는 것은 천하가 금지하는 것입니다.” 

양태후가 이 말을 듣고 즉시 국상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황제계승권 1위와 2위인 유연평의 아들 청하왕 유산과 발해왕 유찬을 불렀다. 이 둘은 모두 유총의 아들이고 유항의 손자며 장제 유달의 증손자이다. 이고는 양태후와 대장군 양기에게 친정을 할 만큼 장성한 유산을 추천했으나 양기는 마음대로 조정이 쉬운 8세 유찬을 세웠다. 이 사람이 질제(후한10대 황제:재위 AD145-146)다. 

 

 그러나 양태후는 대장군 동생 양기보다는 태위 이고에게 모든 국사를 맡겼다. 환관의 폭정을 제거하고 순서를 뒤집고 초고속 승진한 관리 100여명을 면직시켜 버렸다. 이들 100명은 양기를 등에 업고 연명으로 이고를 모함했다. “태위 이고는 공적인 일을 핑계로 사적이익을 취했고 바른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악한 짓을 했으며 황제의 가까운 인척(양기를 의미)을 이간질하고도 모자라 스스로 당파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충제의 국상 때에 모든 사람이 울었으나 이고는 홀로 분칠을 하고 얼굴을 가다듬었으며 머리를 긁적거리며 배회하는 등 전혀 슬픈 기색이 없었습니다. 법령을 어기고 잘된 일은 자기 것으로 하고 잘못된 일은 황제에게 돌렸으며 근신을 배척하여 상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자식의 죄 가운데 아버지에게 누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고 신하의 죄 가운데 주군을 훼손하는 것 보다 더 깊은 것이 없습니다. 이고의 허물은 주살시키고도 모자라는 죄입니다.” 

 

양기가 이 고발장을 태후에게 보여주자 양태후는 그것을 즉각 묵살 폐기처분하였다.(AD145년) 양태후는 국정을 거의 이고에게 맡겼다. 악행을 저지르는 환관은 거의 제거되었고 무능한 관리도 도태되어 자치통감은 그 당시 전국이 태평성세에 가까웠다고 했다.

 

 

(5) 혼란에 빠지는 후한

 

질제는 어렸지만 총기가 넘쳐났다. 대장군 양기를 노려보며 “당신이 발호장군인가?”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양기는 이런 질제를 바로 독살시켜 버렸다(AD146년). 그리고 15세 유지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 사람이 환제(후한11대 황제:재위 AD146년-168년)다. 그리고 피의 숙청이 뒤따른다. 황제계승 서열에 올랐던 유산을 죽게 하고 순제의 3대 충신 이고(옥사), 등무(자결), 두교(옥사)를 제거한다(AD147년). 

양태후가 죽자(AD150년 2월) 양기와 그 처 손수는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남용하여 매관매직으로 축재하고 남의 재산과 사람을 빼앗았다. 10년도 안 되어 양기 일족도 멸문(AD159년)되고 그 권력의 공백을 황후들의 척족과 후람, 유보 그리고 장양과 조충의 10상시가 장악하게 되면서 환관실세시대로 접어든다. 채 30년도 안 되어 AD189년 조조는 위나라를 세워 삼국시대의 대혼란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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