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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 전쟁 부른 쌀 산업, 지속 가능한 미래의 선택은? <10> 쌀의 선택, 사회적 잉여와 권력의 탄생 ④ 국가권력의 농과 쌀에 대한 지배: 고조선 건국 신화와 곡(穀)의 지배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8월2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8월21일 12시14분

작성자

  • 최양부
  • 흙살림 고문,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메타정보

  • 1

본문

 <국가권력에 의한 농과 쌀에 대한 지배>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5,000~17,000년 전의 청주 소로리볍씨 이후 거의 10,000년의 ‘불상(不詳)의 시대’를 지나 신석기시대인 5,000년 전 양쯔강 유역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서해안으로 볍씨와 벼농사가 전해지고, 청동기시대인 3,300~2,800년 전경 산동-요동 반도를 거쳐 한반도에 벼농사가 전해지면서부터라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 혹은 한(韓)민족사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농(農), 즉 농업, 농촌, 농민의 3농과 농지에 대한 지배는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시작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 

   

한(韓)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건국신화

 

  1281년 (고려 충령왕 7년)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기원전 2,333년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건국의 기원과 시조에 관한 신화와 역사, 고조선 해체 이후 마한, 진한, 변한, 부여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옥저, 등 열국 시대의 전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삼국 정립(鼎立) 시대로의 발전, 그리고 신라에 의한 통일과 발해의 이국시대를 지나 왕건에 의한 고려 건국과 신라 등 흡수 통합 936년까지 3,300여 년간의 한민족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일연은 삼국유사 제1, 2권을 ‘기이편(紀異編)’으로 구분하여 고조선을 비롯한 삼국의 건국과 시조에 관한 ‘모두 신비스럽고 기이한 이야기(신화)’들을1)

 기이편에 모아 싣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권 <三國遺事 卷第一 紀異卷 第一>’ 2) ‘고조선(왕검조선) (古朝鮮 王儉朝鮮)’편에 실린 고조선의 시조와 건국에 관한 신화는 한민족의 정신적 근원과 시대적 발전단계에 대한 역사적 기술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리차드 리키는 그의 저서 '인류의 기원' 4)에서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기원 신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의 사회는 모두 기원에 관한 신화를 갖고 있다. 그 신화는 모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이러한 기원 신화는 내성적인 의식이라는 근원지에서 샘솟은 것이다...신화의 공통적 주제는 동물에게-때로는 산이나 폭풍과 같은 생물이 아닌 물질적 대사나 힘에 대해서까지-사람과 유사한 동기와 감정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인화의 경향은 의식의 진화라는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기원 신화는5) 의식의 진화과정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이며 기록이라는 것이다. 문자에 의한 기록이 가능해지면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망각의 세월에 빠진 장구한 역사를 축약적으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신화적 서술은 자연스러운 서술기법으로 채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연이 삼국유사 기이편 제1조에 기록한 <고조선 단국왕검>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화적 서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연은 중국의 ‘위서(魏書)’와 6) ‘고기(古記)’를7) 인용하여 ‘고조선과 환인, 환웅, 단군왕검에 관한 신화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위서(魏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하였으니, 바로 중국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고기(古記)』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옛날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종종 하늘 아래 세상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그래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내려가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삼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이분을 바로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한다. 환웅천왕은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주곡(主穀, 농사), 주명(主命, 생명)ㆍ주병(主病, 질병)ㆍ주형(主刑, 형벌)ㆍ주선악(主善惡)...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神雄, 환웅)에게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도하였다. 이때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삼칠일(21일) 동안 참아서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날마다 신단수 아래에서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고,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 분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한다. 

  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을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8)

 

  요약하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삼 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신시에 도읍을 정하고 웅녀(곰貊족 여인)를 만나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았고, 단군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 1500년 동안 다스렸다’는 것이다. 

  일연이 전하는 고조선 건국 신화는 근래에 이르러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9) 중국 하북성, 내몽골, 요녕성과 요하 강과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황하문명보다 3,000년 정도 앞선 기원전 8,000년경부터 기원전 1,500년경까지로 추정되는 ‘요하 문명’과 이를 대표하는 ‘홍산 문화’와 ‘하가점 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고, 특히 이들의 유물과 유적들이 고조선의 유물 유적인 빗살무늬토기, 비파형동검, 적석총(돌무덤) 등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요하 문명과 홍산 문화를 이끈 주도 세력이 한민족(동이족)이었다는 사실은 고조선의 역사적 실존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0) 

  고조선 건국 신화를 한민족의 사회적, 집단적, 국가적 발전단계의 관점에서 재정리하면11) ‘환인시대는 대체로 8,000년 전 이전의 신석기시대 초기 가족과 씨족이 중심이 되는 혈연적으로 형성된 씨족공동체의 무리 (부족 部族)사회 단계이며, 환웅시대는 4,000년 전 이전의 신석기시대로 일정한 지리적, 공간적 거처(定住)를 중심으로 3,000명의 무리가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기본 식량인 주곡(主穀)을 생산하는 농경 활동을 수행하는 자연 부락 혹은 마을 중심의 부락(지역)공동체의 마을(촌 村, 부락 部落)과 고을 (읍 邑) 사회단계, 그리고 한(韓)족인 환웅과 맥(貊)족인 웅녀와 결혼, 그리고 예(濊)족과 연합하여 마을연맹사회단계를 거처 기원전 2,333년 이후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단군왕검에 의한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졌다’고 요약할 수 있다. 12)

 

 곡(穀)을 지배한 최초의 권력자, 환웅천왕(桓雄天王)

 

   ‘고조선 건국 신화’는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농경(農耕) 문명적 기원, 다시 말하면 식량 (주곡) 생산을 위한 농경지(땅)와 노동력(사람)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 기원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은 환웅천왕이었다. 환웅은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목적으로 3,000명의 무리와 함께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세상으로 내려와 인간세계의 곡식(穀),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하기 위하여(弘益人間)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들을 깨우쳤다(在世理化).

 

  환웅은 3,000명이란 적지 않은 무리를 이끄는 ‘마을(촌, 村) 혹은 부락(部落) 공동체’ 의 수장으로서 그들의 생존을 위한 먹을거리인 주곡(主穀)의 안전한 생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비와 바람, 구름과 같은 천문, 기상을 살피는 전문가를 별도로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13)

 이는 환웅시대 이미 신석기 농경문화가 자리를 잡고 농업생산 활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사회경제적 분업체계가 확립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환웅은 태백산 아래에 도읍을 정하고 그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환웅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는 신시 일대는 동북아시아 신석기 농경 문명의 중심거점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며 내몽고와 요하, 만주 요서, 요동 일대의 요하문명을 일으키는 주도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시를 중심으로 3,000명의 무리가 거처할 수 있는 주거지를 정하고, 환웅의 거처를 중심으로 역할분담에 따라 무리의 주거지를 배치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마을(촌, 부락)공동체는 하나의 자치적이고 독립적인 관리 운영체계를 갖춘 정주생활권(定住生活圈)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자연부락 혹은 마을 사회는 일정한 인구(노동력)와 농경지를 기반으로 하는 생활공동체였으며 다른 공동체에 대해 배타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는 건국 이후 오랜 기간 6촌(부) 연맹체로 운영되면서 6촌 장들은 자신의 강역의 토지와 주민에 대한 독자적이고 배타적인 권한을 행사했을 것이다. 

  환웅이 웅족의 여인과 결혼하여 연맹체를 결성하고 고조선을 건국한 것과 이후 신라가 6촌(六村)이라고 부르는 6 부족의 연맹체를 바탕으로 나라를 세운 것 모두가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을(촌)은 고대 한민족 사회조직의 가장 기본 단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농촌 지역의 사회조직이 마을(부락)을 기본 단위로 읍면-시군과 같은 행정조직이 형성되어 있는 것의 근원적 뿌리도 이와 같은 마을공동체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환웅에게 주어진 가장 최우선의 일은 무리의 일용할 양식, 주곡을 재배하기 위한 농경지를 조성하는 ‘개전(開田) 사업’을 추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개전 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환웅을 비롯한 일단의 지도자들은 신시 주변의 산세와 지형을 살피고 밭을 일구기 위해 공동체의 노동 인구를 파악하고 그들을 각종 작업에 적절하게 배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보여주는 것처럼 효과적인 농지개발을 위해 필요한 기구, 예를 들면 돌도끼, 돌괭이, 돌가래, 돌보습, 돌호미 갈돌 등과 같은 다양한 돌 농기구를 개발 사용하였을 것이다. 14)

  그렇게 조성된 농지(토지)는 마을 공동체의 것이 되었을 것이고 환웅이 관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가 조성한 농경지는 그 농경지의 배타적 소유권과 이용권이 해당 마을(과 사람들)에게 귀속되었을 것이며 마을 공동체 지도자가 그 권한을 대신 행사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는 고대국가의 ‘모든 산과 농경지 등 토지 일체는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으로15)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도자가 농경지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국가의 왕토사상은 왕권에 의한 실질적인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나 배타적/독점적 권리 행사를 의미하는 ‘토지국유제’를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토지국유제에 대한 하나의 관념적인 의제(擬制)였을 뿐 현실적인 토지소유관계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그럼에도 당시 지배층들이 왕토사상을 강조한 이유는 토지를 매개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실제에 있어서는 농민 사유에 속하는 토지를 국가의 것으로 관념하고 그것을 농민에게 나누어 주는 급부(給付) 형식을 취하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조세·공부(公賦)·부역(賦役) 등을 부과하고 징수하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16)

  그러나 마을 공동체가 연맹체로 발전하게 되면서 각각의 마을 공동체는 연맹 결성 이후에도 일정한 면적의 토지에 대해 배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행으로 마을 공동체가 연맹체제로 발전하고 국가를 형성하면서, 특히 신라의 경우 국가가 공신 등에게 일정한 호수를 기준으로 마을과 농경지 및 사람 모두에 대한 배타적 관리권과 해당 지역에 대한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수조권(收租權)을 부여하는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환웅이 주관한 곡(穀)은 요하 문명의 대표적 오곡(五穀)인17) 기장(黍서), 메기장(稷직), 수수(粱량, 高粱), 피(稗패), 조(粟속) 등의 밭곡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환웅 시대에는 기후 환경 등의 지리적 조건이 벼(稻)농사는 적합하지 않아 재배를 시작하지 않았거나 시작하였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의 주요 곡식(穀食)에는 포함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고대사회에서 천문 기상, 기후변화, 특히 비와 가뭄 등과 같은 자연환경의 힘은 주곡생산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을 뿐 아니라 때에 따른 적절한 비가 내리고 안 내리는 현상 자체를 고대인들은 최고 지도자인 왕과 하늘의 뜻과의 교감, 소통의 결과로 인식하였을 것이다. 특히 가뭄의 경우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제왕의 부덕(孤之不德)’의18) 소치로 여겼고 임금은 석고대죄하는 기우제를 통해 하늘의 진노를 달래고 죄사 함을 구하는 제사를 드려야 했을 것이다. 

 

고조선의 국가이념, ‘홍익인간, 재세리화’

 

  고조선 건국 신화는 국가 시대인 단군 시대 이전의 환웅시대인 신석기 중기 이미 백성들의 식량 생산과 분배에 대한 공권력의 지배가 확립되었으며 농경을 기본으로 하는 정치, 경제질서가 체계적으로 수립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 목적이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함(弘益人間)이며 이를 위해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ㆍ생명ㆍ질병ㆍ형벌ㆍ선악...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들을 깨우치고, 변화시켜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게 하기 위함(在世理化)이다’는 점은 한민족이 세운 고대국가 지도자들이 죄표로 삼아야 할 국정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신과 여신의 사랑, 그리고 영웅들의 전쟁과 무용담 등이 주를 이루는 것에 비해 단군신화의 환인과 환웅은 오로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백성을 먹이고, 돌보고, 선악을 깨우치고, 형벌로 다스리는 등 교화시키는 것을 생각하는 도덕적이고19)

 교육자적 지도자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신화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한 지도자와 백성의 덕목이 무엇이고 그들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적,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그리고 교육적인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환웅이 설정한 ‘홍익인간, 재세리화’는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국가들의 이념이 되었고, 지도자들이 수행해야 할 국정지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를 비롯한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고, 일제와 현대로 까지 이어지면서 한민족의 정신적 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20) 심지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직후인 1949년 12월 31일 제정 공포한 것을 2007년 12월 21일 부분적으로 수정한 ‘대한민국 교육기본법’은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로 정하기도 했다.

 

 환웅을 기다리는 ’환웅 신드롬’?

 

  환웅은 한민족사에서 백성을 위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홍수, 가뭄 등 자연재해에 대비하여 주곡의 생산(과 분배)를 주관하고 백성들을 안전하게 먹이고 보살피는 책무를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의 전범(典範)을 보여준 최초의 정치 지도자이며, 단군신화는 주곡 생산과 분배, 농(農) 또는 곡(穀)에 대한 ‘권력의 지배’가 지도자와 백성 간 상명하복의 수직적, 약탈적 관계가 아닌 상호 호혜적, 유기적 관계여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환웅은 백성의 먹을거리인 주곡을 안정적으로 생산하여 먹이는 일은 국가 지도자가 솔선수범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임을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농업과 농지와 농민과 농촌에 기반을 두고 있는 농경사회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이상적인 덕목을 환웅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18세기 중반(1760년경)에서 19세기 초반(1820년경)까지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기원전 10,000년경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 발전시켜온 농경사회를 300여 년 만에 송두리째 해체하고 새로운 도시산업사회로 대전환시켜왔다. 서구사회는 국가 경제 기반을 농지에서 에너지(석탄, 석유, 원자력, 전기등)로, 농업에서 공업으로, 지식정보산업으로, 농민에서 공장노동자로, 지식정보산업인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초거대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속에 한국 사회도 불과 60여 년 전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을 시작으로 산업화를 시작한 이후 인류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빠른 속도로 농경사회를 해체하고 도시산업사회, 지식정보사회로 탈바꿈하는 질풍노도와 같은 대격변(‘한강의 기적’)을 겪어왔다.

  이와 같은 초고속의 대격변으로 한국의 농민들은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가 경제사회의 중심에 있었던 농업, 농지, 농촌, 농민이 주변으로 밀려나고 그 절대적 가치마저 추락하는 격변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밥 한 공기 값이 커피 한 잔 값에도 미치지도 못하는 경제사회가 되면서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추락한 자신들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위상변화에 울분을 토하고 있다. 

  농경사회의 해체와 급격한 산업사회로의 대체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으로 알알이 맺힌 ‘분노의 나락’이 된 농민들은 ‘정치경제의 중심에 서서 국가적으로 대접받던 농경시대(’환웅시대‘)를 그리워하는 문화 증후군 (신드롬 Syndrome)’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급격한 도시화, 공업화, 산업화, 정보화,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 농을 붙잡고 환웅과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 줄 것을 기다리는 ‘환웅 신드룸’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현대와 같은 고도의 산업정보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농경 사회적 농민의 의식과 생활양식은 여전히 농경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철저하게 파괴되고 해체된 사회에서 고립된 농경적 농민의 외롭게 ‘환웅을 기다리는 환웅 신드롬’은 현대의 도시산업사회, 지식정보사회, 그리고 세계화 사회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급격한 도시산업사회화가 배태한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현대와 같이 세계화된 초고속의 도시산업•정보사회에서 농업과 농지, 농촌, 농민은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농경적 농민의 초고령화와 그로 인한 인구의 감소와 함께 나타나고 있는 농촌(마을)의 소멸과 함께 농경적 농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인가? 농경적 농의 소멸이 불가피하다면 21세기의 인류는 살기 위한 먹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게 될 것인가? 21세기적 고도 산업•정보사회의 농은 어떠한 농이 될 것인가? 그런데 세계를 위협하는 지구 기후 위기 속에서 21세기의 농은 어떠한 농이 되어야 하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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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릇 옛날 성인들이 바야흐로 예(禮)와 악(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仁)과 의(義)로 교화를 펼치고자 할 때면, 괴이한 일과 완력, 어지러운 일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하지만 제왕이 일어날 때는, 제왕이 되라는 하늘의 명을 받고 예언서를 받게 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일반 사람과는 다른 일이 있는 법이다. 이렇게 된 연후에야 큰 변화를 타고 군왕의 지위를 장악하여 제왕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즉 삼국의 시조가 모두 다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에서 나온 것을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이것이 기이편을 모든 편의 첫머리로 삼는 까닭이며, 그 의도도 바로 여기에 있다.(叙曰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然而帝王之將興也 膺符命 受圖籙 必有以異於人者 然後能乘大變 握大器 成大業也....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紀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

2)[韓國 古代史]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2003년 조선촉 간행본이 대한민국 국보 제306호로 지정되었다.

3)“고조선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한국사를 체계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부모도 모르는 채 자신의 정체성을 운위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다. 고조선은 우리 존재의 뿌리이고, 따라서 그 역사의 규명은 우리 존재의 입각점을 다지는 일이 된다.” 서의식, “고조선사의 실증적 연구를 위한 각서,” 한창균 편, 요하문명과 고조선, 지식산업사, 2015: 13 

4)리차드 리키, ’인류의 기원‘, ㈜사이언스북스, 2005:  287-288). 

​5) “원시 인민들은 우주의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지식이 없었으므로, 우주에 신이 있다고 가상하고는 모든 것을 신의 조작으로 돌리어 신을 숭배하였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06:92

6)위서는 554~559년간 중국 북제의 위수가 편찬한 북위의 정사이다. 위서 (역사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7) 고기는 한국의 고대 역사서로 1145년 (고려인종 23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사료로 기록되어있다.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고기 (역사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8)<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 無葉山 亦云 白岳 在白州地 或云 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古記云 昔有桓因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堯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 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9) 이덕일, 이덕일의 한국통사: 선사시대-대한제국, 다산북스, 2019:35-45

​10)한창균 편, 요하문명과 고조선, 지식산업사, 2015

11) “<단군신화〉를 4단계의 역사적 발전단계가 압축된 것으로 보아 무리사회 단계인 환인시대, 부락사회 단계인 환웅시대, 부락연맹체사회 단계인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 국가사회 단계인 단군시대로 보아 한민족의 역사적 체험, 즉 인류사회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각 시대를 고고학 자료와 연결시켜 환인시대는 1만 년 이전의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 환웅시대는 1만 년 전 전후부터 6,000여 년 전까지의 전기신석기시대,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는 6,300~4,300여 년 전(BC 2300경)의 후기신석기시대, 고조선시대는 BC 2300년경부터 BC 2세기말까지로 보아 신화의 내용 대부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함께 랴오닝[遼寧] 지역의 풍하문화(豊下文化:夏家店下層文化)가 청동기문화로서 단군의 개국연대와 연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단군신화 삼국유사 원문(삼국유사본) - 온누리게시판 - 한겨레참역사 (daum.net)

12)이도상, 미래세대를 위한 한국 고대사 바로 읽기, 만권당, 2022:73-79, 302-310

13) 김용섭, “고대의 농경문화와 고조선이 성립발전,” 한창균 편, 요하문명과 고조선, 지식산업사, 2015: 141

14) 김용섭, “고대의 농경문화와 고조선이 성립발전,” 한창균 편, 요하문명과 고조선, 지식산업사, 2015: 126-127

15) 왕토는 선언적 의미의 왕의 땅을 의미할 뿐 실질적으로 왕이 모든 땅에 대한 소유권/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대국가에서도 공전(公田)과 함께 개인 소유의 민전(民田)또는 私田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6) 박용운 (왕토사상의 실상) 우리역사넷 (history.go.kr)

17) 오곡이란 모든 곡물이란 의미와 함께 다섯 가지 곡물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오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18) 897년 진성왕 11년(서기 897) 여름 6월, 임금이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 (十一年 夏六月 王謂左右曰 近年以來 百姓困窮 盜賊蜂起 此 孤之不德也 避賢讓位 吾意決矣

19)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 역사 (전면 개정판), 경세원, 2004:77

20)강정모(홍익국부론: 혹인인간사상에 한국경제의 길이 있다, 율곡출판사:2016: 26-32)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홍익인간이 등장한 이후 한말에 이르기까지 홍익인간을 거론한 문헌은 발견되지 않는다”며 홍익인간사상이 오랫동안 한국사에서 실종되고 망각되어왔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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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8월2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8월21일 12시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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