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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33> 추사체, 한석봉체, 윤석열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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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12월28일 16시43분
  • 최종수정 2023년09월12일 11시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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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체? 꼴값하고 있네.”

“굶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어린놈이 장난질이나 하고….”


 2018년 2월 10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그의 필체가 화제가 됐다. 가로획의 기울기가 오른쪽으로 갈수록 가파르게 올라가는 모습인데, ㅍ ㄷ ㅅ 등 일부 자음의 경우 다른 자음보다 더 큰 모습이다. 같은 해 4월 2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판문점 방명록에 남긴 글도 같은 서체였다. 이 서체는 김일성 필체를 다듬어 만들었다는데 북한에서는 김정일, 김정은 삼부자의 필체를 ‘백두체’ 또는 ‘태양 서체’라고 부른다고 한다. (김일성 종합대학 문패도 이 서체로 쓰였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필체가 같을 수 없으니, 김정일 김정은 모두 어릴 때부터 이 필체를 익히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김여정도 마찬가지일 테고. 아무튼 그 나라에는 ‘김정일화(花)’라는 꽃도 있으니 웃고 말았는데 이게 웬걸?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같은 모습을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백드롭(배경 막)의 글씨는 윤석열 당선인이 직접 자필로 쓴 ‘석열체’임을 알려드립니다.”

2022년 3월 18일 윤석열 당선인 주재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첫 전체 회의가 열렸다. 윤 당선인 뒤에는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란 글씨가 걸렸는데, 인수위에서 “이 글씨가 윤 당선인이 직접 자필로 쓴 ‘석열체’임을 알려드린다”라고 공지한 것이다. 추사체, 한석봉체는 들어봤지만 ‘석열체’라니? 대선 선거운동을 위해 국민의힘은 윤 당선인 필체를 본떠 디지털 폰트를 만들었다. 이 디지털 폰트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후보의 손 편지 등에 활용됐는데 이날 뒤에 걸린 글씨체도 이 폰트를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후보의 필체를 선거운동에 활용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후보가 직접 썼던, 후보 필체를 활용해 만들었던 대한민국을 책임질 대통령 당선인의 각오를 백드롭에 새기고 국민에게 알리는 것도 좋다. 문제는 … 당선인의 글씨체를 ‘윤석열체’라고 이름 짓고, 끝내 그걸 외부에 알린 사람들의 정신상태다. 캠프나 인수위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부르는 이름이었다면 별문제다. 하지만 전 국민이 보는 곳에 걸어놓고, 그걸 당당하게 기자들에게 당선인이 자필로 쓴 ‘석열체’라고 공지를 하는 것은-너무 과민반응일지는 모르겠지만-마치 북쪽 어느 나라의 우상화 작업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스스로 제왕적 대통령을 탈피하겠다며 청와대에 안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나. 아래 사람들이 장난으로 부르더라도 못 쓰게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나보고 “그냥 웃어 넘어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지 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문제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게 하나, 둘 모이고 쌓여서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된다. 김일성이 “내 필체가 훌륭하니, 연구하고 개발해서 ‘백두체’라고 부르고 대대손손 배우게 하라”고 했을까? 어느 간신 하나가 그렇게 하면 수령님이 좋아하실 것 같으니까 먼저 건의하고 김일성종합대 현판도 위대하신 수령님의 필체로 하자고 한 결과 아닐까. 세상에는 정의나 진실, 옳고 그름, 품격과 체면 이런 것은 다 “Fuck you!”고, 자신에게 이득만 된다면 다리도 걸기 전에 자빠지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북한 곳곳에 퍼져있는 김 씨 삼부자에 대한 우상화 결과가 그 3명의 머리에서만 다 나왔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 수많은 신격화의 결과물들이 어느 날 모두 한꺼번에 동시에 생긴 것도 아닐 것이다. 한강도 시작은 작은 샘물이다. 


 내가 너무 야박한 걸까. 아니면 별것 아닌 것을 침소봉대하는 걸까. 그런데 만약 문재인 대통령의 글씨를 청와대가 ‘문재인체’라고 발표했다면 국민의힘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다. 간신(奸臣)은 바퀴벌레처럼 평소에는 숨어서 기회를 엿보지만, 틈이 생기면 어느새 몰려나와 집과 사는 사람을 망친다. 백두체니, 김정은화니 이런 거 만들었다고 국민에게 공개하고 좋아하는 지도자가 이끄는 나라 꼴은 안 봐도 뻔하다. 

 우리는 우리를 이끄는 지도자와 그 집단에 대해 야박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그들이 힘들어 울어야 국민이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건…정책이나 전문가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국민보다 힘들지 않고 편하게 살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적용되는 잣대보다 그들에게 적용되는 잣대가 더 느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집을 두세 채 갖고, 모두가 용이 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자기 아이는 서류를 조작해서 의사를 만들어도 죄라는 생각을 안 한다. 세상 어느 부모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우리 애 승마를 위해 말을 사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새벽에 집안사람들(국민) 깰까 봐 뒤꿈치를 들고 걷는 것처럼 매사에 언행을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맹자가 “공자가 춘추(春秋)를 완성하니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움에 떨었다”라고 했다. 이 책을 ‘춘추’에 비한다는 건 그야말로 ‘석열체’에 버금가는 교만한 행동이지만, 위정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적해 그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공자님께서도 조금은 용서해주시지 않을까. 윤 당선인은 인수위 첫 전체 회의에서 “정부 초기 모습을 보면 정부의 임기 말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맞다.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PS/ 윤 당선인의 인수위 현판은 세계적인 서예가 운학 박경동 선생이 소나무를 직접 깎아 만들었다고 한다. 서체는 훈민정음 판본체인데 국민을 진정성 있게 받들고자 하는 새 정부의 의지를 표현했다는 후문이다. 이것도 나만의 까탈일 수 있는데, 이런 행동은 이제 안 하면 안 될까? 50여 일 후에는 버려질 현판을 세계적인 서예가의 작품으로 건다는 것도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다. 정치판에 특히 현판식 문화가 많은데 당이나 국회 내에 작은 위원회 하나 만들면서도 자기들끼리 문패 걸고 현판식을 한다. 역대 대통령들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현판은 다 어디 갔을까? 이름도 같으니 재활용해도 되련만…. 

 

<ifsPOST>​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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