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과 21세기 시대정신 : 불평등(inequality)-미국의 헐리우드가 한국영화 ‘기생충’에 열광했던 결정적인 한 가지 이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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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세계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새 날을 맞았다. 세계 영화의 메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헐리우드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제작한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 각본상 등 무려 4개 부문에서 오스카상을 휩쓸었다. 세계인들에게 ‘기생충’의 오스카상 작품상을 비롯한 4개 부문 수상은 K-POP의 대명사가 된 BTS의 빌보드 차트 석권에 버금가는 K-MOVIE의 쾌거이자 또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동안 백인들의 영화지배구조 속에서 ‘백인들만의 잔치’라는 비판을 받아 올 만큼 백인 이외의 타 인종과 이질적 문화에 대해서는 높은 폐쇄성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번 헐리우드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 내용과 형식의 전반적 차원에서 과거 백인들의 이기적이고 자족적인 ‘그들만의 리그’라는 기존의 인식과 관념의 벽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렸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과연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이번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은 백인들이 자신들의 문화 권력의 안전한 요새로서 높이 쌓아 올린 헐리우드라는 성벽(城壁:기득벽)을 스스로 열어준 포용성 때문일까? 아니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기생충’이 헐리우드의 높고 견고한 성벽을 뚫고 들어간 것일까? 나는 전자와 후자가 동시에 결합된 것으로 평가한다. 이를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결과로 말하고 싶다. 마치 한 마리의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오기 위해서는 알 바깥쪽에서 어미 닭이 달걀 겉껍질을 쪼아 깨주는 것과 동시에 알 안으로부터는 부화될 병아리가 밖을 향하여 달걀 껍질을 쪼아 깨는 아픔이 동시에 맞아떨어져야만 마침내 한 마리의 병아리라는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는 것처럼, ‘기생충’의 수상의 영광 또한 안(헐리우드)과 밖(충무로와 봉준호 감독)의 동시적 노력으로 이뤄진 ‘줄탁동시’의 산물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금번 ‘기생충’의 오스카상 수상의 의미는 한국영화가 그동안 좁디 좁은 작은 계란 껍질 속에 갇혀 있던 왜소하고 고립된 미약한 존재에서 이제 달걀을 깨고 나와 광활한 우주를 누빌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거대한 생명체로 탄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애벌레와 올챙이 상태에 머물렀던 한국영화는 이제 날개를 단 나비가 되어 세상을 날 수 있는 단계로 성장했으며, 우물 안 올챙이는 우물 밖 세상으로 펄쩍 뛰쳐나와 새로운 세상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럼 영화 ‘기생충’이 밤하늘의 기라성처럼 반짝이는 헐리우드 톱스타와 대(大)감독들을 뒤로 물리치고 아카데미 4개 부문의 수상을 휩쓸게 된 원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첫째,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점에 있고, 둘째, 오로지 영화제작에만 몰입해서 인생을 살아온 봉준호 감독의 혼신을 바친 영화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며, 셋째, ‘기생충’이 갖고 있는 탁월한 작품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체제는 50여 년간 지속된 미국과 소련 간의 동서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신자유주의라는 세계화의 물결에 뒤덮이면서 또다시 ‘부(富)의 불평등’이라는 양극화 시대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과거의 냉전체제가 미소(美蘇)로 대표되는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 체제였다면, 탈냉전의 새로운 세계체제는 경제적 불평등의 양극화 체제로 변했다.
영화계와 문화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헐리우드라는 영화의 지배 블록(power block)은 세계 영화계의 중심축이자 영화 권력의 절대적 파워센터로서 고대 로마와 같은 존재였다. 로마 대제국 시대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영화는 헐리우드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헐리우드의 영화지배구조 속에서 헐리우드와 비(非)헐리우드는 영화계의 대표적인 불평등의 상징이다. 그동안 헐리우드는 미국 이외의 국가들에게는 넘볼 수 없는 배타적 영화의 기득구조이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城)이었으며, 특히 아시안들에게는 쉽게 헐리어지지 않는 성채(城砦)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영화계의 철옹성인 헐리우드의 성벽이 마침내 한국영화 ‘기생충’에 의해 허물어졌다. 한국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부의 불평등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춰 제작된 영화 ‘기생충’은 한국의 불평등구조를 허물어뜨리기 이전에 헐리우드와 비헐리우드로 나누어진 세계 영화계의 불평등 구조를 먼저 깨는 것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는 분명 ‘기생충’의 제작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얻게 된 행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생충’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고 전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생충’은 세계 영화계의 평등화를 앞당긴 역사적인 벤처작품으로 기록될 만한 가치를 얻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번 ‘기생충’의 오스카상 수상의 진정한 의미는 먼저 국제사회의 문화적 불평등구조를 깼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지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대해 한국인들보다도 세계인들이 더 열광하며 흥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기생충의 작품성이 탁월하더라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최 측이 폐쇄성을 유지하기로 결심했다면 기생충이 획득한 오늘의 영광을 쉽게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특징은 세계화 시대의 파고를 타고서 전 세계를 향해 유감없이 보여준 개방성과 포용성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동안 미국 백인들만의 ‘국내용 잔치’로부터 벗어나 ‘전 세계인들이 참여하는 국제적 영화축제’로 그 차원을 높이고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런데, ‘기생충’이라는 영화 제목이 공전(空前)의 히트를 치게 된 시점 또한 매우 특이한 상황이다. 전 세계가 중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우한 폐렴)의 공포증에 휩싸이고, 미국에서는 예년보다 심각한 독감(flu)의 유행과 확산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바로 그 절묘한 타임에 ‘기생충’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원래 기생충은 바이러스가 없는 해충이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은 바이러스가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나 플루보다 그 전염속도가 훨씬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것도 기이한 현상이다. 특히 우한 폐렴이나 미국의 플루는 전 세계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반면에, ‘기생충’은 전 세계인들이 열광하고 반긴다는 점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럼,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영화 ‘기생충’의 오스카상 수상을 어떻게 해석하며,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기생충의 오스카상 수상을 협의(俠義)의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이는 한국인의 ‘멋과 흥과 끼’가 하나로 융합된 한국적 문화 창조물이고 특산품이자 한류의 세계화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광의(廣義)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대한민국이 한국적 매력의 극대화를 통해 소프트 파워의 강대국 블록에 진입했음을 의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생충’은 한류 드라마 열풍, 싸이의 강남스타일, BTS 신드롬의 맥을 이으면서 대한민국의 문화적 파워와 위상을 한 차원 높였고, 한류의 세계화에 있어서도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우환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퍼뜨린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감과 편견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일거에 씻어내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점을 갖게 만들었다. 이처럼 기생충은 한국에 대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아시아인에 대한 이미지도 한껏 업그레이드시켰다는 점에서 작품 본래의 문화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한 사회문화적 파급력과 가치를 창출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경제와 산업을 제조업 중심의 수출산업으로부터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문화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한껏 보여줬다는 점에서 한국경제에 새로운 비전과 활력의 틈새를 열어놨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경제적 가치만을 고려하더라도 이번 ‘기생충’의 수상은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해외 엔터테인먼트 투자자들의 관심도를 집중시키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는 곧 한국이 영화 수출국의 입지를 다지는 데도 한 몫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세계 경제가 이제 3차산업인 서비스업과 4차 산업혁명의 온라인 네트워크의 융합적 창조산업으로 이미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기생충’은 한국의 문화산업의 잠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이에 따른 신세대들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기회까지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1993년 영화 ‘쥬라기공원’이 세계적 히트를 기록하면서 벌어들인 수익이 당시 기준으로 현대자동차가 2년간 벌어들인 수익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기생충’으로 하여금 한국을 뛰어넘어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게 했을까? 기생충의 어떤 요인이 도도한 헐리우드의 빗장을 열어 오스카상을 거머쥐게 했고 세계 영화계에 새로운 충격의 물결을 몰고 왔을까? 나는 기생충이 세계인들의 공감을 사게 된 가장 원천적인 질료는 다름 아닌 ‘소재의 적실성’, ‘콘텐츠의 시대성’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불평등(Inequality)’ 문제로 집약된다.
오늘날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세계적인 문제는 불평등 문제이다. 불평등 문제는 이미 지구온난화 문제 못지않게 인류의 고민거리로 등장했고 이의 해결을 위해 노력한 많은 경제학자들에게 노벨경제학상이 수여된 것처럼, 기생충 역시 전 세계의 시대적 난제인 불평등 문제의 심각성을 끄집어낸 것 자체만으로도 ‘세계공공의 이익’(global public good)에 기여했다는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어쩌면 지금 전 세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불평등 문제는 지구온난화문제, 핵문제에 비해 그 심각성이 결코 덜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불평등 문제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자와 가난한 자간의 소득 불평등, 부의 불평등 문제이다. 둘째, 남녀 간의 성 불평등 문제이다. 일명 '젠더 갭'(gender gap)의 문제이다. 셋째, 백인과 비백인 간의 인종 불평등(인종차별) 문제이다. 이 중에서도 전 세계 인류가 가장 절박하게 고민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는 바로 소득 불평등이다. 소득 불평등 문제는 한국과 북한, 동양과 서양, 미국과 중국, 체제와 이념을 넘어서서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현실의 문제이자 난제(難題)이다.
불행한 예언이지만 경제적 소득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정치, 사회적 불평등 역시 심화된다. 그리고 이런 불평등 구조가 고착되면 사회는 갈등과 대결의 위기감이 커지면서 분열과 충돌이 발생되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더 이상 시민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된다. 무정부 상태는 안정과 조화와 균형이 깨지는 혼란과 혼돈의 아수라장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법도 원칙도 양심도 윤리도 힘을 잃게 되며 오직 힘 있는 강자의 말과 행동만이 정의며 법이 된다. 즉,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되며 동물의 왕국과 같은 무법천지의 자연 상태에 이른다. 이런 상태에서 국가라는 공동체는 아무런 유용성이 없어진다. 그리고 이런 혼란의 국가에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며 미래는 없다. 갈등의 포화상태는 곧 계급충돌의 지름길이다.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충돌은 곧 절망이자 불행이다.
최근 들어 갈등의 씨앗인 인류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갈수록 좁혀지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농촌과 도시 간의 경제적 불평등, 지방과 중앙 간의 경제적 불평등, 고등교육자와 차등교육자 간의 경제적 불평등, 금융자본과 임금소득자 간의 경제적 불평등, 부의 상속자와 고용노동자 간의 경제적 불평등은 갈수록 커지고만 있다. 그리고 이런 불평등의 경제구조는 일상의 생활구조로 뿌리내리면서 사회는 새로운 불평등의 계급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부의 불평등에 따라 유산(有産)계급과 무산(無産)계급으로 분리된다. 10 대 90 사회 혹은 20 대 80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이다. 그런데 지금은 1 대 99의 사회로 불평등의 양극화가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 즉, 한 국가 내의 1%의 가진 자들이 나머지 99%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한 사회를 의미한다. 이런 나라의 모든 정책들이 ‘1%의, 1%를 위한, 1%에 의한’ 정책들로 펼쳐진다면 1%들의 탐욕은 끝이 없을 것이고, 99%의 고통 또한 끝이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인들이 지난 2011년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고 주창한 시위운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부의 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국민적 분노의 표출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 시위운동에 참가한 시민은 소수였지만, 미국인의 3분의 2가 이 시위를 지지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위를 지지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불만을 품은 사람들만은 아니었다는 점 또한 잊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 일부에서조차 시위를 지지하는 발언이 나온 것은 지금 미국이 맞고 있는 부의 불평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바로 이런 사회적 배경 때문에 헐리우드는 ‘기생충’을 미국 사회의 자화상으로 봤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기생충’이 헐리우드의 공감을 샀던 핵심 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분석한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소재로 선택했지만, 이는 세계가 안고 있는 현실의 문제임과 동시에 우리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는 오늘날 미국의 불평등구조를 가장 절묘한 방식으로 표출해냈기 때문에 헐리우드로부터 전폭적인 박수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미국의 헐리우드는 오늘날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시대적 난제인 불평등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공감대를 확산시킬만한 영화를 만들지 못했고, 이에 대한 자괴감도 컸을 것이다. 그런 찰나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그들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한국보다 훨씬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안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그 모든 것을 ‘기생충’으로 대체하고 싶은 강한 유혹과 대리만족을 느꼈으며, 이것이 마침내 자신들의 문제를 표출한 대리작이자 창작물이라는 공감대까지 형성했던 것이다. 기생충이 4개 부문의 오스카상을 휩쓸게 된 보이지 않은 배경에는 불평등이라는 소재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럼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불평등이 확산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자리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과 시장의 실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시장과 경제를 모르는 무능한 정부가 시장을 관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불평등의 싹이 트고 그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
우리의 정치와 정부는 지금 불평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내놓고 있는가? ‘기생충’은 우리 사회가 불평등의 확산을 막지 못할 경우, 어떤 파국적 종말을 맞게 될 것인가를 너무도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기생충’은 한국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의 창’이자 ‘미래 예감도’라 할 수 있다. 나는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평등 문제의 해결 없이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시스템과 자유시장주의라는 경제시스템이 동시에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우려감을 가졌다. 기생충을 본 미국의 헐리우드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그래서 봉준호의 ‘기생충’에 그토록 열광했던 것은 아닐까?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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