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66>경제개혁이 시급하다 III. 공법으로 세제를 개혁하겠다.<中>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III.4 공법 재논의 시도
[김득례 사건]
한동안 논란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공법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발생했다. 근년에 찾아보기 드물게 작황이 상당히 좋았던 세종 17년 충청도의 세수가 터무니없이 적게 걷혔다. 충청도에 논과 밭이 합해서 22만 2394결인데 이 중에서 경작된 논이 6969결, 그리고 밭이 1만 763결로 집계된 것이다. 이 수치는 작황이 더 나빴던 작년의 경작 논 1만 1022결과 밭 1만 1414결보다도 크게 적은 것이었다. 이렇듯 부실하게 답험하여 국고를 손상시키고 백성을 구휼할 양곡 수입을 줄여서 들여온 충청도 도사 김득례를 엄격하게 문책하자는 호조의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세종 17년 12월 14일).
충주만 놓고 보더라도 논 147결 중 경작지(실전)는 14결, 밭 150결 중 경작지는 4결이라면 이는 너무 터무니없이 경작지를 작게 잡은 것이 분명하니 김득례를 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옛 말에 백성이 풍족하면 어찌 임금이 부족한가라고 했고 또
왕의 부(富)는 백성 안에 저장되어 있다고 했다. 어찌 백성에게 가볍게
과세하여 백성을 후하게 한 득례에게 죄를 주겠는가.
득례에게 죄를 주면 반드시 작황을 높게 책정하는 폐단이 그 죄 때문에 일어날 것이다.
(然古人有言 百姓足 君孰與不足 又曰 王者之富 藏於民 豈可以過輕而厚於
民 罪得禮哉 且罪得禮 則高重踏驗之弊 必因此起矣 :
세종 17년 12월 17일)”
호조에서는 충청도 감사 정인지도 김득례와 같이 처벌하기를 청하였으나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정인지가 서생으로 집현전에만 오래 있어 경험도 없었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또 공법에 찬성하여 공법을 밀고 갈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공법 재논의 돌입]
김득례 사건으로 답험 제도의 문제점을 또 한 번 깨달은 세종은 스스로 공법논쟁을 다시 점화했다. 이번에는 매우 감성적으로 접근했다.
“우리나라 손실답험 문제는 매우 중대한 일이다. 최근 답험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많으면 포악한 걸과 같이 되고 적으면 오랑캐 같이 되니
내가 걱정이 매우 많다. 조정신하들은 자기 의견만 고집하여 의견이
분분하고 따를 만한 것이 없으니 어쩔 것인가. 예로부터 공법이 매우
좋은 제도이건만 실시하려 해도 하지를 못하는 구나.
(我國家損實之事 關係至重 近來踏驗失中 多則桀 寡則貊 予甚慮焉
朝臣各執所見 議論紛紜 莫適所從 何以處之 古之貢法善矣
欲行而未得爲也 : 세종 18년 2월 23일)”
신하에 대한 원망과 한탄과 넋두리를 모두 한 데 섞어 놓은 것 같은 어투였다. 찬성 신개와 대사헌 이숙치가 나서서 공법을 시행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말했다. 세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잠정적으로 공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내가 세상일에 불통하여 조종지법을 쉽게 고치지 못하고 공법을 지금
까지 시행을 못하고 있다. 이번에 폐단이 저러하니 한 일이년 시험 삼아
시행해 보는 것이 어떤가. 그러나 공법의 세금이 너무 많으면 백성이
견딜 수 없으므로 흉년과 같이 생각하고 경감하는 게 좋겠다. 또 1결에
이십 두(斗)면 너무 많으니 십오 두로 정하면 어떨까. 너무 많아도 안
되고 너무 적어도 안 된다. (予不通於世務 祖宗之法 不可輕改 故貢法迨
今未行 今其弊如此 一二年試之如何 然貢法數多則民不堪焉 如遇凶年 減
數可矣 且一結二十豆過多 以十五斗爲定若何 過多不可 過少亦不可
: 세종 18년 2월 23일)”
한 번 시험 삼아 해보자는 것이었다. 공법이 시험 삼아 하거나 말거나 할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접근한 것은 신하들의 반대를 염두에 둔 고도의 전략이었다. 실패하면 곧 물리겠으니, 일단 해보기나 하자는 것이었다. 반대를 고집하던 신하들을 일단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세종은 조금씩 자기 의견 쪽으로 끌고나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제시하면 경솔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니 신중하게 생각해보자며 미루었다. 영의정 황희가 각 도를 좌도 혹은 우도로 나누고 토지의 비옥도를 작년의 실적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누면 어떠냐고 묻자 바로 이렇게 대꾸했다.
“그 문제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니 내일 다시 의논하기로 하자.
(此事匪輕 明日當更議之 : 세종 18년 5월 21일)”
황희의 의견을 깊이 생각해 본 뒤 세종은 그 다음날 다시 그 문제를 의논했다. 황희는 생각을 다시 바꾸어 각 도를 3등으로 나누어 상등도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중등도는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그리고 하등도는 함길도와 평안도로 제시했다. 토지도 3등급으로 나누자고 했다. 각 도를 삼등분하는 것과 토지를 삼등분하는 법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였으나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의정부와 호조와 세종의 의견 일치가 힘들었다. 참찬 하연은 각도를 3등급으로 나누되 토지등급 3등분 대신 토지등급과 연분 3등법을 혼합하는 안을 제안하였다. 토질이 좋은 토지를 상, 그 다음이 중, 그리고 최악의 토지를 하로 하고 여기에 작황에 따라 상등년, 중등년, 하등년의 삼등분 체계를 원용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하연의 안은 도등급과 토지등급과 연분등급의 세 등급을 복합하여 적용하자는 것이었다(세종 18년 윤6월 19일). 예를 들어 상등도인 전라도는 연 작황이 상등인 경우 상급 토지는 1결당 22두, 중급 토지는 21두, 하급 토지는 20두 세금을 내며 작황이 중등이면 상등지는 19두, 중등지는 18두 하등지는 17두를 세로 내도록 하였다. 여전히 의견은 분분하였다. 공법상정소를 만들어 이 문제를 전담하도록 하였다(세종 18년 윤6월 15일).
[제1차 호조공법안]
공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도 한참동안 세부사항에 대해 논란을 거듭되자 세종이 재촉하고 나섰다. 공법을 원하는 자가 많으나 조정 의견이 분분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호조가 서둘러 공법안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세종 19년 7월 9일). 이렇게 해서 나온 공법안이 도를 3등분하고 토지도 3등분하여 모두 9등분으로 마련한 제1차 호조공법안이다. 비교적 간결하면서도 획기적인 이 공법 체계는 실현되지 못했다. 함경도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함경도 관찰사가 아뢰기를 공법을 시행하면 하등도인 함길도에 가장 낮은 하등전을 적용하더라도 작년에 비해 갑절 이상으로 세 부담이 늘어나므로 종전 법대로 하든지 아니면 공법을 시행하되 특례로 세를 절반 감해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세종은 세금 경감안을 수용했다.
“공법은 이미 정해진 법이고 입법초년이라서 쉽게 바꾸기 어렵다. 그러
나 만약 공법대로 세금을 거두면 민생이 필시 원망할 것인 즉 환상을
갚을 때 독촉하더라도 다 받아 낼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금년에
10-20%를 관대히 줄여 줌이 어떻겠는가. 가능하다면 경들이 각 고을
수령들과 의논해서 작년과 금년의 환상을 적당히 조절 수납함으로써
백성들 마음을 위안하고 편안하게 하라.
(貢法己定 今當立法初年 勢難更改 若以貢法收稅 民生必怨 則還上收納之時
不必盡收督納 今年當寬假一二分何如 如其可爲 則卿議又 各官守令
往今年還上 臨機酌量收納 以慰民心爲便 : 세종 19년 8월 2일)”
공법 시행을 어렵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역별로 흉풍이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각 도마다 작황이 크게 다른 상황에서 공법을 시행하면 형평성에 큰 문제가 생김을 세종은 직감했다.
“이번 공법은 본래 백성들을 편히 하고자 만든 법이다. 이제 올해
각 도의 흉풍이 고르지 못하니 새 법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데도
일체로 시행하게 되면 슬픔과 한탄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금년 전세는
경상도와 전라도 양도는 공법에 따라 시행하되 충청도는 1/4을 감하고
경기 강원 황해 평안 4도는 1/3을 감하며 함길도는 절반을 면제하라.
함길도 4진과 함길도와 평안도의 새로운 이주민은 2/3를 감하라.
(今行貢法 本欲便於民也 第念今歲各道豊歉不齊 而當立新法之初 若一切
行之 則恐生愁歎 故今年田稅 慶尙全羅兩道 依貢法施行 其餘忠淸道 減
稅四分之一 京畿江原黃海平安 等四道 減三分之一 咸吉道 減半 咸吉道
新設四鎭及新徙之民 平安道新徙之民 減三分之二
: 세종 19년 8월 7일)”
[잠정공법 시행 정지]
어떻게 해서든지 새로 만든 공법이 정착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여건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평안도에서는 경작하지도 않는 땅에 세금이 매겨져 불만을 토해냈고 경상도에서는 메뚜기 피해와 홍수피해를 이유로 감세를 요구해왔다. 공법에 대한 이런 저런 항의와 반발이 일어났다. 승정원이 조심스럽게 나서서 공법을 잠시 유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세종의 말이다.
“내 뜻도 그러하다마는 이미 정해진 법이라 감히 가볍게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에 공법을 감행함으로써 백성이 두려워하여 혹
유랑하거나 혹 사망자가 생길까 진실로 두렵다. 당연히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라. (予意亦如此 但己定 故未敢輕改耳 今强行貢法 則恐
民或有流離者 或有死亡者 誠可慮也 黨與大臣議之
: 세종 19년 8월 27일)”
조금 있다가 세종은 다시 도승지 신인손과 좌부승지 권채를 불러 공법 시행에 관한 그간의 내막을 털어놓았다. 원래 세종은 공법을 한두 마을만 시범삼아 실시하고자 하였었다. 그런데 대신들이 팔도에 확대적용하자고 해서 실시한 것이었다는 설명이었다. 세종의 생각에는 풍년이 들것 같아서 공법을 전국적으로 시작했는데 날씨가 고르지 못해 이런 반발이 일어난 것이라 해명했다. 세종은 의정 대신들로 하여금 공법 보류를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황희는 여전히 옛날 세법을 옹호했고 신개와 판중추부사 안순은 가볍게 고칠 수 없다고 맞섰다. 의론이 분분해지자 공법 시행을 유보한다는 최종 결정을 세종이 내렸다.
“공법은 옛 역사를 고찰하고 지금 상황을 참작하여 대신들과 의논하여
만든 것이었다. 본래 백성을 편하게 하고자 하였는데 내 부덕으로 재위
이십여 년 중 한 해도 풍년이 없었고 매년 흉년이 들었으니 앞으로도
풍년이 들지 알 수가 없다. 공법은 단연코 시행할 수 없겠구나. 그러나
법으로 확정이 되었고 또 내외에 반포했으니 후세 자손들이 반드시
실시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황희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貢法 考古參今 與大臣議定 本欲便於民也 予以否德在位二十餘年 未嘗有
一年之豐 連歲凶歉 後世之豐 亦未必也 此法斷不可行也 然此法旣定 頒于
中外 則後世子孫 必有可行之時 今從喜之議 : 세종 19년 8월 28일)”
III.5 경상도와 전라도에 공법을 실시하라.
이 날 이후 약 일 년 동안 공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거의 일 년이 지난 뒤 세종이 갑자기 공법 의논을 다시 제기했다. 공법에 대한 세종의 집념 혹은 애착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알 수 있다. 작년에 공법을 유보했던 이유를 해명했다. 예상치 못했던 흉년 때문이기도 했지만 공법에 대한 의지가 약했고 자신이 없었던 것도 솔직히 반성했다.
“평시 생각해보면 그 결과가 뜻한 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게다가 근래에 기력이 많이 쇠약해져서 비록 이해가 뚜렷이 보여도
오히려 잘못된 옛 법을 고치지 않으려 하는데 하물며 요즘 같은
기근 아래 새 법을 시행하는 것의 이해를 철저히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끝내 공법을 강행할 수 있었겠는가.
(予平時料事 其終不如意者多矣 而近來氣己衰耗 雖易見利害之事
尙不欲更舊制 而況如此饑饉之餘 新法之行 終始利害 不能徹見
予乃强欲行之乎 : 세종 20년 7월 10일)”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의 입장을 반성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다시 공법을 시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공법은 언젠가 반드시 도입해야만 하는 법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경상도나 전라도 주민의 2/3가 찬성하면 공법을 실시할 의사가 있으니 여론조사를 하고 실시하는 것이 어떨지 의견을 물었다.
“만약 공법의 폐단이 생기면 즉시 그 폐단에 따라 고치면 거의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반드시 그 법을 시행할 마음인 것은
아니다. 경들은 그 법의 이해를 잘 숙지하여 속히 의논하여 보고하라.
(若行此法以弊生 則隨卽改定 庶乎無弊 然予心非必欲行此法也
卿等熟知此法利害 速議以啓 : 세종 20년 7월 10일)”
갑론을박이 다시 이어졌다. 영의정 황희는 강원도와 황해도에 시험 실시해본 다음 확대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고 우의정 허조는 공법은 결단코 안 된다고 했다. 병조참판 신인손은 농사 작황이 좋지 않으니 미루자고 했고 안순은 다시 여론을 물어보자고 했다. 좌찬성 신개와 병조판서 황보인과 공조판서 성억과 참판 유계문 정도가 안순에 동의했다. 그날도 의견이 분분하자 내일 다시 의논하자고 했다.
“공법이 불가하다는 사람도 그렇지만 혹 가하다는 자들도 방문을 해 본
다음에 하자고 하기도 하고 또 방문이 필요 없다고도 하니 의견이 일치
되지 않는구나. 반드시 의견일치를 본 뒤에야 정할 것이니 내일 다
시 의논하자.
(其云不可行者則己矣 其云可行者 或云訪問而後行 或云 不必訪問
議又不一 須更歸一而後定之矣 明日更議 : 세종 20년 7월 10일)”
세종은 그 다음날 안순, 조계생, 신개, 우승범, 황보인, 유계문, 심도원, 안숭선, 하연 등 공법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신하들과 공법 재시행을 다시 의논했다. 이들은 입을 모아 경상도와 전라도 양도에만 공법을 실시하자고 건의했다. 어제 임금의 말을 듣고 자기들끼리 미리 의견을 조정한 것이 분명했다. 우승범과 안숭선은 “큰 일은 원래 여러 사람과 더불어 의논하는 것이 아니다.”고 까지 말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시험적 공법 시행이 결정된 것이다(세종 20년 7월 11일). 2년 뒤 경상도와 전라도는 시험 실시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본격적으로 공법체제로 들어갔다(세종 22년 5월 8일).
[이어지는 반대와 강력한 공법 시행의지]
공법에 대한 세종의 의지를 시험이라도 할 듯이, 또 공법 반대자들에게 멋진 명분이라도 줄 듯이 경상도와 전라도에 수재가 발생했다. 곡식이 물에 잠겨 수확이 불가능한 곳이 많았다. 공법의 규정에는 한 가정이 모든 경작전을 비워뒀거나 모두 손실이 나는 경우(全陳損者)에만 면세된다고 했으므로 그 규정에 따라 세를 결정하면 될 것이라고 호조는 생각했다. 그러나 공법의 강력한 지지자 중 한 사람 좌찬성 신개는 공법으로 인해 인민의 원망이 심하며 또 다른 도에서도 경상, 전라 양 도의 처리 상황을 보고 공법에 대한 판단을 할 것이므로 면세해 주자고 세종에게 요청했다. 시험 실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면제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세종은 대단히 화가 났다. 도승지 김돈 등에게 물었다.
“공법을 실시한 것은 답험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이번에 공법을
시험 실시하는데 또 심사를 해서 세를 면제해 주자면 공법을 반드시
실시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랬기 때문에 경상감사의 보고와 전라도
백성의 요청을 묵살했던 것 아닌가. 이제 신개가 저러하니 너희들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貢法之設 所以除踏驗之弊也 今欲試貢
法 又審而免稅 則何必行貢法乎 故慶尙監司之所啓 全羅人民之上言 曾寢
不行 今申槪所啓如此 汝等之意以爲何如 : 세종 20년 10월 1일)”
김돈은 그 지역이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막혀 곡식이 썩는 곳이 맞으므로 신개의 의견을 좇자고 했다. 세종은 궁으로 돌아가서 다시 의논하겠다고 했다.
궁으로 돌아온 세종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재 면적이 각각 1800결과 1570결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호조에서는 연이어 10결이 피해를 본 곳만 세를 감면한다는 공법 조항을 적용하여 처리하면 된다고 했다. 특별히 이번 수재라고 더 봐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황희와 허조는 연이어 10결 피해를 본 사람만이 면세를 받는다면 그 혜택은 다 부호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농촌 실정 상 대부분 농가가 3-4결 이하의 땅을 가진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은 수재로 인한 면세 혜택을 못 받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따라서 3-4결 이하의 땅을 가진 자들이 수재 피해를 봤으면 혜택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조는 다시 반박했다. 그 땅은 강가의 땅이며 대부분의 경작자들은 강가의 땅 말고 다른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실정에서 3-4결 수해를 본 사람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면 수재가 없는 다른 자기 경작지에 대해 부당한 면세가 되는 것이므로 옳지 않다고 해석했다. 세종은 호조의 말이 맞기도 하지만 공법에서 또 다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공법 규정대로 하라고 했다(세종 20년 11월 20일).
[사간원의 공법반대 : 유휴지(陳田)에 대한 고려 요청]
공법을 경상도와 전라도 양도에만 시험 삼아 실시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간원이 긴 반대 상소를 올렸다. 태조가 창업하여 답험법을 세워 모두가 풍족한데 어찌 새 법을 만들었으며 ‘예전보다 이로움이 열 배가 되지 않는 한 법은 고치지 않는 것’이라는 옛 말씀에도 위배되는 것이라 지적했다. 자기들의 망상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들은 것으로 공법의 폐단을 말하겠다하고 나섰다.
첫째로, 우리나라 땅이 구불구불하고 척박하여 비옥도의 차이가 매우 크
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밀하게 토지의 생산성을 살펴보고 과세하지 않으
면 비옥한 땅은 세금을 덜 내고 척박한 땅은 과세가 과중하여 불공평한
과세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둘째로는 토지의 등급을 매김에 있어서 매우 부당한 바가 있었으나 손
실답험제도에서는 토질의 차이가 그때그때 인정이 되었지만 지금의 공
법에서는 한번 정해진 토지등급을 변경할 수가 없으므로 구조적으로
부당한 과세가 계속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간원의 이 말은 그 자체로는 맞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는 손실답험의 번거로움과 비용과 부당함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논리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공법에서의 세율이 손실답험에서의 세율보다 많이 낮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과도한 과세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매우 화가 난 세종은 이렇게 호통을 쳤다.
“내가 큰 법을 세우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어찌 저렇게 번거롭게
요청하는가. (今欲立大法 而汝等何煩請如是乎 : 세종 21년 7월 21일)”
사간원은 처음부터 공법에 반대했었다. 계속해서 폐지하자고 간청을 드려도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자 이제는 전략을 바꾸었다. 공법의 폐단을 수정하자는 것이다. 그들이 지적한 폐단은 경작지(墾田)에 붙어있는 유휴지, 즉 놀려두는 땅(陳田)의 문제였다. 원래 토지를 측량할 때 경작지와 붙어있는 유휴지는 합하여 1결 혹은 10결로 묶었었는데 이는 유휴지의 경작을 촉진하기 위해서 였었다. 그런데 세금을 물릴 때에는 경작 여부에 상관없이 유휴지에도 과세하기 때문에 원성이 자자하니 이를 시정하자고 했다. 특히 간전과 진전의 비율이 1:9 혹은 2:8로 결합된 토지는 완전히 면세를 해줘야 공정한 과세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III.6 공법의 보완
세종 9년 3월 문과중시 책문에 처음 공법에 대해 출제를 한 뒤 여론조사를 거쳐 세종 19년 7월 최초로 공법을 시도한 후 미루다가 경상도와 전라도에 한해 시험적으로 실시(세종 20년 7월)한 후 자신감을 얻은 세종은 전라 경상 두 도에 공법을 확정하여 실시했다(세종 22년 5월 8일). 그러나 공법이 완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간원의 비판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공법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었다. 특히 토지의 생산성 차이가 상전, 중전, 하전의 삼분체계로 되어있어 실제 생산성 차이를 크게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을 많이 지적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토지의 생산성을 다시 측량 조사하는 것은 매우 큰일이므로 간편하게 마을 단위로 토질을 상중하로 구분함이 좋을 것 같다고 의정부가 보고했다. 그리고 상등전과 중등전은 10%도 되지 않으리만치 작고 또한 생산성의 차이도 거의 없으므로 동일한 세율을 적용하자고 건의했다. 그리고 각 도의 등급도 조정하여 충청도를 상등도에서 중등도로 낮추고 강원도는 중등도에서 하등도로 낮추었다(세종 22년 8월 30일).
[보완 문제점]
우의정 신개는 새로 마련된 공법 제도를 가지고 각 도의 세수를 추정해 보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모든 도에서 공법 실시 후의 세수는 손실답험 시절수확실적이 좋았던 해에 비하여 작게는 34.3%(경기도), 많게는 244.8%(황해도)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공법을 실시하면서 모든 도에서 그동안 가장 작황이 좋았던 해보다도 훨씬 세수가 많이 걷혔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상등전이 전체의 10% 안팎 밖에 안 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세수 증대는 거의 모두 하등전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등전에서 세수 증가가 발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손실답험법과 달리 작황여부에 상관없이 하등전에게 과세를 물렸기 때문이었고 이것은 공법에 대한 불만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신개는 이 부분을 지적했다. 세수 증가가 대부분 하등전에서 나온 것이며 하등전 소유주는 대개 가난한 계층이다. 하등전은 기상이 조금만 안 좋아도 수확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작은 기상재변은 하층민들에게는 치명적인 경제적 위협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거기다가 저렇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신개는 하등전을 삼등급으로 세분화하자고 했다. 사간원도 또 다시 4년 전 올렸던 유휴지에 대한 공법의 과세는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조세감면]
세종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공법은 백성을 편하게 하려함인데 황희는 줄기차게 반대하고 또 신개는 줄기차게 찬성한다. 황희는 자기가 만난 모든 사람이 반대한다고 말하고 신개 또한 자기 주변 모든 사람이 찬성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 갈피를 못 잡는데 백성 또한 힘들다고 하니 세를 깎아주면 될 일이나 백성을 위해 만든 공법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신하들에게 또 한 번 길을 묻고자 하였다.
“과연 이것이야 말로 본래 백성을 편하게 하자는 뜻이 결국 백성에게
병이 된 것이다. 부득이 공법을 정지하고 조세를 감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고자 한다. 너희들은 모두 근신이고 이미 의논의 본말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소견에 구애받지 말고 허심으로 깊이 생각하여 솔직히 말해보라.
(果如是則本欲便民而反以病民也 不得己而行貢法 則減其租稅
庶幾便民 爾皆近臣也 己知是議之本末 其勿拘所見 虛心力思
悉言之 : 세종 25년 7월 15일)”
신개는 여전히 하등전을 다시 삼등분하자고 했지만 대다수 신하들은 감세가 불가피하다고 하였다. 김종서와 하연은 다시 토지를 측량하고 평가하여 등급을 새로 매기는 것은 시간도 없지만 불필요한 소요를 불러일으킬 것이므로 지난 번 세금의 액으로 감면해주자고 했다. 세종은 이렇게 지시했다.
“지금 세금 걷은 것이 옛날의 배가 되니 백성의 원망을 역시 알겠다.
내가 공법으로 후히 걷어 부국을 만들려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백성의
손실답험의 폐해를 걱정해서 공법을 만들었던 것인데 이렇게 되고 보
니 많이 걷으려 했다는 질책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법이란 쉽게 변
경하는 것이 아니고 또 공법이 백성을 편하게 하는 법이므로 대신들
과 같이 깊이 생각하여 보고하라.
(視今之收租 倍於古 民之怨咨 亦可知矣 予非以貢法厚斂而富其國 但慮損
實之弊 乃立此法 今至於此 難以逃後斂之譏矣 然法不可以朝更夕變也 仍
貢法而便於民者 其與大臣商確以啓 : 세종 25년 7월 10일)”
그 다음날 대신들의 의논을 듣고 난 뒤 일단 하등급 토지의 전세를 1결 당 2두를 감면해 주기로 하고 토지등급 조정은 추후에 하기로 하였다.
<ifsPOS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