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67>경제개혁이 시급하다 III. 공법으로 세제를 개혁하겠다.<下>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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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7 새로운 대안 : 토지 5분 -연분 9등의 경무법 공법
공법 문제로 세종은 머리가 매우 복잡해졌다. 반복해서 생각해도 조세의 요령을 얻기 힘들다고 털어 놓았다.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대처하며 또 백성들의 정서에 맞게 하겠는가. 누군가는 옛날 법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러나토지를 생산성에 따라 세분하게 나누자는 생각이 옳다고 세종은 믿었다.
“이번에 공법을 위해 토지의 등급을 다시 9등급으로 정하여 세금을
거두면 어떻겠는가. 그러나 금년이 흉년이라 백성들이 소요하면 안 되니
풍년을 기다리자. 다만 토지등급을 다시 매김에 있어서 하등급이 상등급
혹은 중급으로 되면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것이 오히려 원성을 사게 된
다. 토지등급을 다시 조사하지 않고 9등급으로 나누는 것은 어떨까.
(今欲因貢法 改量田品 分爲九等 以定租稅何如 然今年凶歉 不可使民騷擾
欲待豐年 但慮改量田 以下田反爲上中 則益生民怨矣 更不量田 仍分九等
何如 : 세종 25년 9월 11일)”
토지등급을 9등분으로 조정하여 과세하는 것에 대해 대부분 신하들은 별다른 의사표명이 없었다. 너무 조밀한 등분이라고 생각한 세종은 다시 대안으로 토지를 5등급으로 나누고 연분을 9등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각 도의 땅을 한두 해에 다시 양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옛 토
지등급을 가지고 다시 심사하여 먼저 5등급으로 나누고 결부제도 대신
경무법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조세를 거두면 어떨까. 만약 실시한다
면 금년에 하삼도의 토지등급 심사를 끝내면 어떨까.
(各道之田 一二年之間未易改量 姑將舊田案 審其田品 先分五等
結卜束把 改作頃畝步法 以收九等之租如何 若以爲可 則今年將畢審
下三道之田乎 : 세종 25년 10월 27일)”
세종은 획기적인 대안을 제시한 셈이었다. 먼저 토지 5등급 안은 상급과 중급은 그대로 두고 하등급 토지만 추가로 3등급으로 나누는 것이고, 연분 9등급은 풍흉에 따라 상상년과 하하년 사이에 7개 등급을 두어 작황의 정도에 따라 차등과세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토지 5등급 및 연분 9등급보다 더 파격적인 제안은 결부법 대신 경무법을 제안했다는 점이다. 결부법은 토지의 산출, 즉 생산량에 따라 토지의 면적이 달라지는 제도이다. 다만 1결에서 나오는 소출은 모두 같다는 편한 점이 있다. 그러나 경무법은 토지의 면적이 생산성과 상관없이 항상 일정한 제도이다.
세종이 왜 갑자기 경무법으로 변경하기를 제안했는지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토지의 생산성을 직접 실측해 보겠다던 세종이 가까운 지역(후원)에서 1결의 생산성을 실지로 측정하면서 토지 1결의 면적이 다 다르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고 당황했을 것은 분명했다. 토지의 면적 혹은 길이가 생산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조세상의 관습으로는 익숙했을지 몰라도 하늘 각도를 측정하고 시간 단위를 재며 측우기 제작을 시도하던 당시의 세종의 과학적 사고 체계로는 미스터리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 25년 11월 2일 드디어 공법의 내용이 확정되어 반포되고 그 시행을 전담할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가 동년 11월 13일 설립되었다. 둘째아들 진양대군이 도제조가 되고 하연과 정인지와 박종우가 제조로 참여하였다. 이때 확정된 공법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세종 25년 11월 2일) ;
(i) 토지를 3등급으로 하던 것을 5등급으로 변경하며 결부법을 고쳐
경무법으로 변경하여 1결의 면적은 어디든 동일하게 한다.
(ii) 종전에 각 군현을 3등분 하던 것을 폐지하고 각 도의 등분을
유지하며 밭 1품급은 논 2품급과 같고 밭 2품급은 논 3품급과
같게 설정한다.
(iii) 각 해의 풍흉에 따라 상중하년을 각각 3등분하여 연분을 9등분하여
차등 세율을 적용한다.
이 원칙을 기초로 하여 세부적인 토지등급(田品) 책정 지침을 마련한 호조는 이를 경차관 20명을 통해 하삼도에 내려 보냈다(세종 25년 11월 5일). 지침의 주요 내용은 종전의 상등전을 1등전으로 하고 중등전을 2등전으로 하며 하등전은 그 토질을 잘 파악하여 비옥하면 1등전 혹은 2등전 혹은 3등전으로 책정하고 모래와 돌로 되어있어 척박한 땅은 최하 등급인 5등전으로 하라는 내용이었다. 수령이 직접 책정하고 아전들한테 맡기지 말고 전품을 착오하여 책정하는 자는 경차관이 색출하여 엄단하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확성이 요구되므로 서두르지 말고 서서히 정밀하게 전품을 책정하라고 지시했다. 좌정언 윤면이 경기도의 흉년을 이유로 들어 경차관을 보내는 것과 전품을 나누는 것을 풍년으로 미루자고 했다. 세종이 엄하게 명령했다.
“여러 대신들과 숙의하여 결정한 것이므로 다시 언급하지 말라.
(其與諸大臣熟議而定 其勿復言:세종 25년 12월 17일)”
III.8 최종적인 절충타협안
[계속되는 반발]
전제상정소의 전품 책정에 관해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주로 의정부의 노대신들 반발이 컸다. 전품책정의 반발의 이유는 물론 상등전과 중등전을 너무 많이 책정함으로써 앞으로 세금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세종은 조목조목 반박해 나갔다.
“먼저 조세의 수를 정한 다음에 전품을 정한다면 참으로 여론이 떠드는
말과 같다하겠으나 그것이 아니다. 먼저 일 년의 총 수확량을 계산하고
그것을 5등으로 나누어 전품을 결정한 것이므로 부자가 많이 내고
가난한 자가 덜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어째서 떠들썩거리는가.
(先定租稅之數而等其田品 則誠如中外之喧說 此則不然 總計一年
所收之數 定其大略而分五等之田 則富者多輸 貧者寡輸 事之當然
何爲其喧說 : 세종 26년 1월 10일)”
벼 1말을 심어 1섬의 수확을 걷는 땅을 1등지로 했지만 그런 땅이 하삼도에 많고 경기도에 적어 그런 것이지 어찌 하삼도라고 1등지를 의도적으로 많이 책정했겠는가. 그리고 조세의 율을 대신들과 같이 의논해서 결정했는데 어찌 중함을 미리 알고 했겠는가. 세종은 정인지를 하산도 순찰사로 내려 보내 이런 마음을 하삼도 백성에게 잘 알리라고 지시했다(세종26년 1월10일).
공법에 대한 여러 불만 혹은 비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i) 전품(토지등급) 5등급에 연분 9등급으로 매우 복잡하다.
(ii) 1,2등급지가 너무 많다.
(iii) 경무법이 익숙치 않으니 결부법을 써야한다.
세종이 결국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다.
“경무법을 다시 고쳐 예전의 결부법을 쓰되 5등지를 1,2등의 추이를 봐
6등지로 하고 모두 주척을 사용하며 땅의 넓고 협소함을 봐서 동과로
세를 걷으면 어떻겠는가.
(改頃畝步法 仍舊爲結負束巴 以五等地田 一二等推移爲六等 其六等地田
皆用周尺量之 隨地廣狹 同科收稅如何 : 세종 26년 6월 6일)”
새로 확정된 공법안은 첫째 토지를 5등급이 아닌 6등급으로 한다는 것이다.전품 책정에서 1,2등이 너무 많다는 비판이 있었으므로 1,2등을 1,2,3등으로 늘이고 3,4,5등급 토지는 4,5,6등급 토지로 낮춘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경무법을 버리고 결부법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1결의 토지에서는 토지의 생산성에 상관없이 같은 세를 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지를 재는 척도를 무엇으로 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과거와 같은 손마디 기준(指斥)을 쓸 수 없는 것은 분명하므로 주척을 사용하기로 했다.
[청안현의 실험]
6등전 결부제 공법의 핵심은 6등급의 토지의 면적 단위(1결)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이고 이것은 각 등급의 토지 생산성이 얼마인지 측정되어야 해결되는 문제였다. 따라서 등급별 토지의 생산성을 실제로 측정하기 위해 세종은 괴산군 청안면을 택했다.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2월 충북 청주의 초수에 가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 때 만든 행재소에서 가까운 청안에 실험실을 만든 셈이었다. 먼저 경차관을 보내어 토지 전품을 책정하게 하고(세종 26년 윤7월 29일) 그 다음날에 예조판서 김종서와 우참찬 이숙치와 대제학 정인지를 보내어 토지의 수확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 때 측정한 수확량이 1결(57무)의 땅에서 상상년에 1등지는 40석, 6등지는 10석이었다. 청안현에서 실측한 결과에 따른 조세수입과 그 이전의 조세를 비교해 보면 새로운 6등 공법의 조세가 구공법체제보다 다소 많으며 손실법보다는 월등히 많았다.
예컨대 중상년의 경우 신공법에 의한 조세는 2689석이지만 손실법이 적용되던 기미년에는 1003석이었고 경신년에는 1515석이었다. 그런 현상은 충청도 비인현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실측 결과를 가지고 하삼도 도순찰사로 나가는 정인지에게 세종이 당부하였다.
“이번 청안의 전품을 책정한 것은 여러 주의 준칙이 된다. 행재소에
가장 가까이 있고 삼 대신이 직접 심사하여 책정한 것이므로 분명히
넘치거나 모자람의 허물이 없을 것이다. 여섯 주의 전품이 결정된 후
이번에 정한 것으로 조세를 계산하라. 너무 무거우면 감할 것이요 너무
가벼우면 더할 것이며 이 모든 것을 내가 생각하고 있으니 무엇이
어렵겠는가. (今定淸安田品 是諸州之所準則也 於行在所最近 而三大臣親
審己定 必無過不及之譏矣 六州田品畢定之後 以今定租稅計之 疑於太重
則減之 疑於太輕則可之 皆在予心 何難之有 : 세종 26년 8월 24일)”
석 달 뒤 전제상정소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확정된 공법안을 발표하였다(세종 26년 11월 13일). 새로운 공법의 원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i) 토지등급, 즉 전품은 6등급으로 한다.
(ii) 하등전 1결 면적(57무)의 소출을 기준으로 하여 1결의 소출은
상상년 80석, 하하년 20석으로 하고 12석씩 소출을 차등 적용한다.
(iii) 세율은 소출의 1/20로 한다.
(iv) 연분은 9등급으로 나눈다. 손실이 없는 해는 상상년, 손실이 10%면
상중년, 손실이 20%이면 상하년 등등의 방식으로 정한다.
(v) 모든 등급의 토지 1결의 면적은 조세 20말의 땅의 크기로 정한다.
이러하면 6등지 1결은 152무, 5등지는 95무, 4등지는 69무가 되며
1등지 1결의 면적은 38무가 된다.
세종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집요하게 추진해 온 공법은 세종 26년 11월 13일 하삼도 각 두 곳씩, 총 여섯 곳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되었고 세종 32년에는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 실시하였다. 공법은 세조 7년에 경기도, 세조8년에 충청도, 세조 9년에 경상도로 확대 적용되었고 함길도까지 공법을 적용하는 것은 성종 20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공법 폐단 상소]
예전에도 공법에 대한 비판은 많았지만 세종의 최종 확정된 공법안에 대해서도 비판이 없지 않았다. 그 중에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은 다음과 같이 폐단을 말했다 ; “공법을 실시하는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고 제도가 자세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실행함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많아 이제 겨우 한 두 해 실험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데도 백성의 원망과 탄식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 최근 가뭄이 계속되므로 겨우 국가의 구제곡식(환곡)을 얻어 세금을 내는데 환상곡 1석이면 반드시 두어 말을 보태야 정량 1석이 되고 또 도중의 운송비도 따로 부담해야 한다. 관에서 빌려 관에 바치고 추수한 뒤에는 환곡을 되갚아야 하니 살을 깎아 종기를 고치는 격(醫瘡剜肉)이 아니고 무엇인가. 빈궁과 곤고가 누적되어 배가 되니 어느 시절에 다시 소생할 수 있겠는가. 지난해에도 북을 쳐 답험을 다시 하기를 바랐으나 경차관이 와도 임금의 휼민의 뜻은 져버리고 오직 전례만 고집하여 조금도 살피지 않고 백성을 꺾어 누르며 들은 채도 않는다. 전혀 거두지도 못해 수확이 없는데도 세는 있으니 어찌 이런 법이 있겠는가(專不刈穫 無實有稅 寧有是理). 이것은 백성이 다같이 분하게 여기는 것이요(此百姓之共憤) 온 신하가 다 알고 있는 것이나(庶僚之共識) 오직 전하만 알지 못하는 것이다(獨殿下未知之耳). 시급히 폐단을 시정하여야 한다.”
이계전의 이와 같은 신랄한 상소는 당시 농촌의 경제적 어려움과 세금 부담이 과중함을 잘 보여 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상소는 공법의 폐단이라 하기보다는 공법 집행에 있어서 수령이나 경차관과 같은 관료들이 너무 형식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공법 운영상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지 공법 자체의 폐단을 지적한 것은 아니다. 세종은 이 상소를 보고 즉시 의정부를 소환하여 의논했다. 의정 대신들은 대개 허황한 말(광간,狂簡)에 불과하니 무시해도 된다는 투였다. 그러나 세종은 두려움을 느꼈다.
“최근 연속으로 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이 안심하고 살지 못하니
사람의 일을 잘못하는 게 있는지 두렵다.
(近連歲旱荒民不聊生 恐有人事未盡 : 세종 28년 5월 3일)”
보다 치밀하고 대담한 비판은 성균관의 학생으로부터 나왔다. 성균주부 이보흠은 옛 제도를 깊이 살펴보고 또 농촌에서 자세히 물어 연구한 끝에 공법의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지적하였다(세종 28년 7월 2일) ; (i) 무오년(세종20년,1438) 공법을 경상도에 적용한 이후 5년 동안을 보면 대체로 공법에 의한 징수가 무난하였으나 그 중 경신년 (세종22년,1440)은 3개월 비가 오지 않고 또 수재가 겹쳤는데도 세금이 너무 과중하여 백성의 큰 원성을 샀다. (ii) 경신년에 고을을 상중하로 나누었는데 군위, 대구, 성주는 전지가 모두 손상되었는데도 상등도(경상도)의 중지현(上之中)이라 과세하였고, 안동, 예안, 봉화, 순흥, 문경은 비가 와 곡식이 잘 걷혔는데도 상지하(上之下)로 과세했으니 불합리하다. (iii) 한번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그 현장실무자가 고을에 피해를 보고하고, 그러면 고을 수령은 사실을 확인한 후에 문서를 작성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차사원을 다시 현장에 보내 그것을 현장실무자와 확인한 뒤 감사에게 보고하면 그것을 호조를 거쳐 임금님께 보고하여 임금의 지시를 하달하여 최종적으로 세를 거두게 되는데 흉년에 이런 복잡한 절차에 따른 번거로움이 손실답험의 폐단보다 여러 갑절이다. (iv) 감사가 흉년을 이조에 보고하면 경차관이 내려오는데 몇 달이나 걸리므로 신속한 대응이 불가능하고 또 혼자서 일일이 검색할 수가 없다. (v) 전품을 책정함에 있어서 중등도의 상품 전지가 과거에 비해 10배나 많아졌다는 데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vi) 흉풍에 따라 연분을 9등분한 예가 없다. (vii) 토지를 5등급 혹은 6등급으로 한다는 것이 전례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 후 포기한 제도이다. (viii) 유휴지(진전,陳田)가 일정 비율이 넘으면 세를 감면하는 것을 악용하여 일부러 경작지를 유휴지로 놀리는 일이 있으니 이것은 비합리적인 제도이다. (ix) 땅의 비옥함은 농부가 잘 알 뿐 서생이나 귀족 자제들은 모르는데 이런 서생들이 주축이 되어 전품을 조사하는 것이 올바른 조사가 되겠는가.
이보흠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할 방법도 함께 제시하였다. 공법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전품 책정의 자의성과 토지대장(전적)의 부정확성 그리고 풍흉에 따른 연분도 지역에 따라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런 내재적인 한계 때문에 세종 재위 기간 중에는 전라도 지역에만 적용될 뿐 전국적으로 적용되지 못했다. 1/8의 성공이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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