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65>경제개혁이 시급하다 III. 공법으로 세제를 개혁하겠다<上>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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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공법(貢法)으로 세제를 개혁하겠다.
조선의 조세는 토지에서 나오는 전조(田租)와 각 지역에서 조정에 바치는 공물(貢)과 각종 공사에 노역을 제공하는 요역(役)의 세 가지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요역은 각 마을의 규모에 따라 차등 부과하였고 전조와 공물은 경작지의 크기에 따라 부과되었다. 조선의 토지에 대한 세제는 토지 크기를 결정하는 결부제(結負制)와 생산 실적을 결정하는 손실답험제도(損失踏驗制度)를 양대 축으로 하고 있다. 결부제란 토지의 생산성에 따라 1결의 면적을 차등 적용(隨等異尺)함으로써 토지 1결의 생산량을 동일하게 유지하는 제도이다. 예컨대 생산성이 100인 토지 1결은 생산성이 50인 토지 1결 면적의 1/2 이고 토지 생산성이 200인 토지 1결 면적의 2배가 된다. 손실답험제도란 매년 농사의 작황을 검사하여 그 측정결과에 따라 전조를 차등하여 부과하는 제도이다. 이 두 제도 모두 중대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III.1 결부세제의 문제점
결부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생산성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모든 토지의 생산성을 정확하게 측정한다면 그 측정 결과에 따라 같은 생산물(X)를 산출하는 땅 1결의 면적을 다음과 같이 책정하면 될 것이다.
i-지의 1결의 면적(Ai) = 일정한 생산물(X) / i-지의 생산성 (Pi)
X ; 1결 토지의 일정한 생산물
그러나 모든 토지의 생산성 P(i) 을 측정하는 것도 어렵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토지의 등급(i)을 무한하게 많은 등급으로 할 수도 없다. 따라서 토지의 생산성을 보통 상, 중, 하의 세 단계로 나누게 되는데 이들 등급의 생산성 차이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토지 1결의 면적이 대단히 불균등하게 설정될 가능성이 높다. 즉, 상중하 등급 토지의 생산성을 3:2:1 로 하면 1결 토지의 면적은 상 중 하등 토지의 넓이 비율은 1:2:3이 된다. 만약 토지 생산성의 비율을 4:3:2으로 하면 면적의 비율은 2:3:4의 비례가 된다. 따라서 생산성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1결 토지의 면적도 달라지고 조세부담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에 있어서는 상등지와 중등지와 하등지 토지의 ‘한 변의 길이의 비율’을 20:25:30으로 했다. 이것은 하등지와 중등지와 상등지의 넓이(역으로 생산성)의 비율을 1: (1.25)²:(1.5)²로 규정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상등지 면적을 기준(=1)으로 할 때 중등지 면적은 (1.25)²=1.5625배가 되고, 하등지의 면적은 (1.5)²=2.25배가 되는 것이다. 만약 상등지와 중등지와 하등지의 한 변의 길이 비를 30:35:40 으로 잡으면 상등지 면적을 기준으로 할 때 중등지 면적은 1.3611배가 되고 하등지 면적은 약 1.778가 되어 어떻게 생산성의 차이를 규정하느냐에 따라 각 등급지의 면적의 비율에 차이가 나게 된다.
[손실답험의 문제]
그러나 ‘토지의 생산성이 같아지도록 토지의 면적을 정’하는 결부제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현실적인 문제는 매년 수확을 실사에 의해 측정하는 손실답험제도에 있었다. 처음에는 수조권을 가지고 있는 전주들에게 수확량을 측정하게 했으나 전주들의 횡포가 너무 심하고 농민들을 착취함에 따라 정부는 제3자적인 입장에서 지방의 감사나 수령 혹은 경우에 따라 중앙에서 보내는 경차관이 손실답험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중앙에서 보낸 경차관이나 수령이 손실답험을 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실제 답험 업무는 모두 현지 아전이나 향원읍리들이 답험 업무를 담당하였다. 관리들이 현장 업무를 잘 알지도 못했고 또 직접 나설 의욕이나 인센티브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전들이 주도하여 농사 실적을 과대평가하여 세금을 늘이기도 하고 또 불법적으로 수확을 누락하여 세금을 횡령하기도 했다. 동일한 땅인데도 측정 여부에 따라 세금을 들쭉날쭉 내게 된다면 대단히 비합리적인 제도임에 틀림없다. 세종은 이것을 획기적으로 개혁하고 싶었다. 즉, 땅의 수확성 또는 생산성을 확실하게 정함으로써 수확을 일일이 측정하는데 따른 비합리성과 번거로움을 제거하자는 생각이었다. 결국 결부제와 손실답험의 폐해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묘안이 공법(貢法)이었다.
III.2 공법(貢法)제도 도입의 구상
공법은 평균적인 토지생산의 1/10을 과세하는 매우 간편한 과세제도이다. 원래 중국 하나라 공법은 모든 백성에게 50무의 토지를 주고 그 중 5무(10%)의 땅에서 나는 소출을 세금으로 내는 제도였다. 은나라의 조법은 밭을 우물 정(井) 자로 나눈 뒤 여덟 가구에게 가구당 70무의 경지를 주고 중앙의 공전 100무를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여 세금으로 걷어 들였다. 일정한 비율을 세로 낸다는 점에서 공법은 철법이나 조법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제도들의 공통적인 장점은 평균적인 수확을 기초로 일정한 비율, 즉 1/10을 세로 내므로 매년 실제 수확을 측정(손실답험)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수확측정에 관련된 각종 불편함과 불공정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법 도입의 구상]
세종이 공법 도입을 처음 생각했던 때는 즉위 초기였다. 세종 21년 5월 경상도 도관찰사 이선에게 ‘공법을 생각해 온 지 이십여 년 되었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감히 공법을 실시할 생각을 한 것은 이십여 년이 되었고 대신
들과 의논한 것도 벌써 육 년이나 되었다.
(肆予欲行貢法 于今二十餘年 謀議大臣又己六年 : 세종 21년 5월 4일)”
왜 공법을 도입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언급은 없지만 세종 9년 3월의 문과중시 책문을 보면 세종의 공법에 대한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대업을 이어 받은 사람으로써 융평의 치세를 만들고 싶은데 너무 모자라고 부족하여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내가 대업을 이어받고 오직 조종의 가르침을 생각
하면서 융평의 치세를 기대했으나 그 방법을 구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니 어떻게 수련해야 거기에 다다를까. 전에 들으니 다스림의 요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애민의 처음은
오로지 백성들로부터 걷어들이는 제도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 백성들
로부터 취함에 있어서는 전제와 조공과 부역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肆予寡昧 嗣承丕基 仰惟祖宗之訓 期至隆平之治 未得其道 顧何修而致歟
嘗聞致治之要 莫先於愛民 愛民之始 惟取民有制耳 今之取於民 莫田制貢
賦之爲重 : 세종 9년 3월 16일)”
즉,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치를 하고 싶은데 애민은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능력 있는 수령을 보내고 또 유능한 경차관을 보내었지만 전제의 폐단은 사라지지 않고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있으니 매우 못마땅하다고 했다. 특히 손실답험의 폐단은 극심하다고 했다.
“손실답험이 오로지 사람의 애증에만 달려 사람의 손에 따라 높아지고
낮아지니 백성들이 그 폐단을 당한다. 그 폐악을 해결하고 싶은데
당연히 공법과 조법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損失踏驗 苟循愛憎 高下在手 民受其弊 欲救斯弊 當於貢助求之
: 세종 9년 3월 16일)”
공법을 실시하려는 진정한 목적은 백성들에게 불공정한 세 부담을 주는 현행 세법의 폐단을 없애는 것, 그리하여 백성들의 세 부담을 줄여주는 것, 그럼으로써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III.3 여론에 묻다.
공법에 대한 세종의 확신은 이미 오래 전에 형성되어 있었다. 다만 세종 혼자 문제를 풀어갈 것이 아니라 신하들의 의견을 묻고 신하들의 협력이 필요했다. 특히 작황이 좋을 때에는 어려움이 없겠지만 작황이 나쁠 때 공법은 원망과 근심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또 공법이 비록 아름답다고는 하나 수손급손법(隨損給損)은 조종의 성헌
이므로 가볍게 고칠 수 없다. 만약 공법을 시행한다고 하면 풍년에는
비록 더 걷는다는 문제를 면할 수 있지만 흉년에는 반드시 원망과 근심
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어찌하면 좋을까.(且貢法雖曰美矣 然
隨損給損 祖宗成憲 不可輕改 若貢法一行 則豐年雖免多取之患
凶歲必不免愁怨 如之何則可 : 세종 10년 1월 16일)”
공법은 최근 몇 년 동안의 평균 수확량을 기준으로 삼아 수확량의 일정률을 세금으로 거두는 제도다. 따라서 평년 이상의 풍년에는 사실상 덜 걷는 셈이 되고 흉년에는 좀 더 걷는 셈이 되지만 평균적으로는 세금이 같다. 그러나 실제 수확보다 덜 걷을 때는 가만있다가도 더 걷는다 싶으면 목소리를 높여 불평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그것이 걱정이 된 세종이 황희의 의견을 물었다. 좌의정 황희는 만약 손실답험에서 수확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 평가관리의 손에 달려서 불합리한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공법을 본떠서 (수시로) 토지의 평균 수확량을 계산해서 토지 몇 부당 쌀(혹은 콩) 몇 말씩 과세하되 작황을 풍년, 중년, 흉년으로 삼등분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호조판서 안순도 그 안에 동의했다. 이 안은 평균 수확량을 계산한다는 점에서는 공법과 같다. 그러나 그 계산을 자주해서 내려 보내야 한다는 불편함도 있고 토지의 생산성에 따라 땅의 넓이가 달라진다는 결부법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안이었다. 그러니까 문제의 핵심, 세종의 진정한 뜻을 읽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은 공법에 반대하고 있었다.
[전국적인 여론조사 : 세종 12년 8월 10일]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가 있으면 공법 추진이 만만치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공법에 대한 여론은 어떨까. 전국적으로 공법에 대한 의견을 묻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여론에 부칠 공법의 초안을 호조에게 마련하도록 했다. 호조의 안은 간단했다. 모든 토지의 세를 1결당 10말을 거두되 평안도와 함길도는 7말을 걷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수해나 풍재나 상해와 같은 자연재해를 당한 경우에는 조세를 전부 면제하기로 했다. 보통 토지 1결 당 20두 혹은 30두씩 세금을 냈던 것에 비하면 토지 1결 당 10말의 세는 꽤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 안을 가지고 여론조사에 들어갔다.
세종 12년 3월 5일 임금의 명령으로 여론조사에 들어간 지 5개월 만에 호조가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총 인원 17만 2806명이 참여하여 찬성 98657명(57.1%) 반대 7만4149명(42.9%)을 결과를 얻었다. 표면적으로는 공법 찬성의 승리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일단 의정부 핵심 지도층이 거의 모두 반대했다. 영의정이 공석인 가운데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우찬성 허조, 판부사 최윤덕 등 중진 대신들이 모두 반대였다. 오직 전 형조판서 조말생과 황자후와 정인지 정도가 찬성했다. 또 하나의 걱정은 모든 도관찰사가 하나같이 반대했다는 점이다. 기록에 나와 있지 않은 황해도 도관찰사를 제외하면 7도 감사 전원이 반대한 것이다. 물론 수령의 경우에는 찬성이 192명, 반대가 137명으로 다소 의견이 갈리었지만 감사와 견줄 것은 못되었다. 게다가 공법에 대한 찬반이 지역적으로 확연히 갈라졌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압도적으로 찬성한 반면 서울과 경기도는 찬성이 우세,그리고 그 이외의 지역은 압도적 반대였다. 반대한 사람들의 이유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i) 1결당 30두(말)의 세를 내던 것에 비해 1결당 10두의 과세는 너무
적어서 국가 재정이 크게 우려된다는 점,
(ii)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섞여 있는 처지에 일괄적으로 결당
10두의 과세를 하면 불공평하다는 점,
(iii) 1결당 10두의 세는 종전의 제도에 따르면 손실률이 60%에 이를
때 적용되는 세인데 그런 예가 없었다는 점,
(iv) 함길도와 평안도는 1결당 7두의 세를 내는데 종전의 2/3 과세에
비해 너무 과도한 세금이라는 점 들을 들었다.
반대론자들은 다양한 수정안을 제시하였다. 토지의 비옥도에 차이를 두자는 것과 흉풍에 따른 연도별 차등을 두자는 것과 이 둘을 혼합하자는 안 등이었다. 특히 전체 토지의 90%에 가까이가 하등지이므로 보다 현실적인 세제가 되기 위해서는 상등지와 중등지는 그대로 두고 하등지를 더 세분화하자는 안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제안은 결부양전, 즉 생산성에 따라 토1결의 토지 크기를 달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세종은 여론조사 결과에 대단히 실망했다. 그러나 힘으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시간을 두고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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