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55>국가위기와 행정개혁 III. 용관(冗官)을 줄이고 비용을 줄여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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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1 쓸데없는 관리를 없애라 (용관혁파,冗官革罷)
가뭄이 계속되고 백성과 삶과 국가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세종이 단행한 조치중 하나가 ‘필요 없는 관리’, 즉 용관(冗官)을 줄이는 것이었다. 세종이 즉위하고 5년 뒤인 계묘년(1423)에 수해와 한해가 번갈아 닥치자 신하들은 불필요한 관직을 대폭 없애자고 요구하였다. 심지어 40여명에 달하는 재상급 자리도 줄여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그때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계묘년에 수재와 한재가 겹쳐 백성이 기근에 처해있고 적절히 처리함
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어 불필요한 관리를 줄이자는 의논을 하고
신하들이 재상의 수를 마땅히 줄여야한다고 하나 부왕의 말씀을 받아
청을 들어주지는 못하고 다만 각 관사의 긴요치 않은 관원만을 줄였다.
(歲在癸卯 水旱相仍 民罹饑饉 調度甚繁 議革冗官 廷臣有曰 宜減宰樞之數
然予親承父王之訓 不從其請 只罷諸司不緊之員 : 세종 16년 10월 12일)”
계묘년에 단행한 용관 구조조정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아래 [표.3-5]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모든 기관이 구조조정의 대상이었다. 구조조정 대상 직급도 최고책임자급인 제조는 물론 부제조와 별좌와 같은 하위직급을 골고루 감축하였다. 전체적으로 29개 기관의 총 141개 직원을 84개로 줄였으니 감축 율로는 40%의 축소였다. 그러나 모든 관서의 관원이 감축된 것은 아니고 충호위, 선공감, 제용감 제조 등 일부 증원된 곳도 있었다. 이와 함께 각 도 감사, 도절제사, 처치사, 경력 및 판관 등 지방 관리를 겸직으로 임명하여 녹봉을 거의 3천석 절감하였다고 하였다(세종 16년 10월 12일).
초기에는 세종이 주도적으로 불필요한 관원의 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종 후반기로 가면 오히려 대신들이 용관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 27년 7월 대대적인 군사조직의 개편으로 갑사의 수를 6천에서 4천 5백으로 줄인 데 이어 세종 28년에도 인원 감축의 의논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의정부에서 말을 꺼냈다. 계해년(세종 25년,1443) 이후 크고 작은 가뭄이 4년 연속으로 이어지며 국가재정이 위태로워지자 의정부가 나서서 군사조직의 추가 감축을 건의한 것이다. 그 주된 내용은 갑사의 수를 1천 5백에서 1천으로 더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자소의 책 간행과 군자감의 공작을 금년 가을에 한해서 중지하고 삼군(중군, 좌군, 우군)의 숫자도 병조와 의논해 감축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세종은 의정부의 안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세종 28년 4월 30일).
보름여 뒤에는 용관이 아니라 정승과 재상의 감축문제가 또 대두되었다(세종 28년 5월 17일). 임금은 정승재상의 숫자가 많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각 도 감사와 중국에 보내는 사신은 모두 재상 급이어야 하므로 그렇게 본다면 재상이 많은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여러 재상자리를 동시에 없애는 것(汰去)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 나무랐다.
“요사이 각 도 감사와 중국에 보내는 사신과 큰 마을 및 각 진지에
모두 재상들을 파견하니 오히려 모자라는 형편인데 어떻게 없애자고
하는가. 경들이 생각도 없이 억측으로 추려내자는 게 말이 되는가.
(今各道監司赴京使臣 大邑巨鎭 皆以宰樞差遣 此猶不足 況汰之乎
卿等不察 遽以臆意請汰 可乎 : 세종 28년 5월 17일)”
이때 영의정 황희는 노환으로 집에 머물렀고 좌의정 신개는 4개월 전에 죽었으므로 우의정 하연이 실질적으로 최고위직에 있었다. 세종의 질책은 매우 엄중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의정 하연은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개성의 유수는 한 명으로 족하고 한성부도 판부사 한 명에 부윤 두 명이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우찬성 겸 예조판서 김종서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국가 대사를 논할 재상을 줄이기보다 일반 사무직 관원을 줄이자는 것이 세종의 뜻인 것을 김종서는 읽고 있었다. 김종서가 나서서 연이은 가뭄으로 국가의 형편이 매우 좋지 않으므로 쓸데없는 관원은 줄여야 국가에 보탬이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세종은 영구히 줄이는 것이냐 일시적인 감축이냐고 반문했다. 하연은 영구적이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김종서와 황보인은 흉년으로 인하여 청구하는 것이니 영구적으로 없앨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퇴직하는 사람의 자리를 채우지 않으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용관을 줄이자고 말을 꺼낸 것이 세종이 아니라 의정부였으므로 임금은 나서지 않고 묵묵히 김종서와 황보인의 편을 들었다.
III.2 갑사(甲士)를 줄여라.
정치를 바로 잡으려고 용관을 혁파하고 온갖 행정혁신의 절차와 방법을 찾던 세종에게 더 큰 가뭄이 닥쳐왔다. 세종 18년 병진년 대가뭄을 당한 것이다. 4월 하순부터 가뭄이 심해지더니 5월부터 8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5월 들어서부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우제를 올렸다. 토룡, 남방적룡, 화룡, 백룡, 흑룡, 석척 등 모든 토신들에게 기우제를 드렸다. 그래도 비는 오지 않았다. 갖은 행정혁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큰 가뭄의 재앙을 겪게 되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 하늘이 원하지 않는 정치”가 무엇일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태껏 개혁되지 못한 정치가 무엇일까 고민했다. 세종은 그것이 갑사의 수가 너무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갑사는 총 여섯 개 조(번)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조당 원래 5백 명이었는데 태종과 정종에 대한 호위병사 수가 적다고 느껴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한 조당 천 명, 총 6천 명으로 늘렸었다. 갑사의 수는 그동안 한 번도 줄이지 않았다. 세종은 이 갑사 증원 때문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세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근년 이래 국가경비가 너무 커 앞으로 걱정된다. 내가 그 반을
줄이려고 하는데 어떤가. (然近年以來 國家經費頗多 將可慮也 予欲革除
其半 何如 : 세종 18년 5월 22일)”
세종의 이 제안에 대해 황희 신개 심도원 등 대부분의 신하들은 반대했고 오직 안순만 찬성했다. 갑사의 수를 그대로 두자는 대신들도 갑사를 다른 녹직이나 체아직(임시직)에 임명하자는 사람(하연과 심도원)과 당상관 이상의 군직을 줄이자는 사람(황희), 그리고 용관을 줄이자는 사람(신개) 으로 나뉘었다. 대다수 대신의 의견이 감축불가로 기울자 안순도 의견을 바꾸어 갑사의 수는 그대로 두고 퇴직하는 자리에 갑사를 임명하여 군사의 수는 종전대로 유지하자고 건의했다. 여러 대신들의 의견이 갑사를 줄이지 말자는 쪽으로 기울자 세종은 생각을 고쳤다.
“이 일은 가볍게 고쳐 시행할 것이 아니다. 내가 다시 생각해 보겠다.
(此事不可輕易施行 予更思之 : 세종 18년 5월 22일)”
갑사 조직에 대한 구조조정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세종 27년 7월에 단행된다. 갑사는 시위의 정예 군사로써 총 6천명이 6개 조(번)로 나누어 매번 천 명씩 근무하였다. 그러나 6개 번으로 나누어 근무하다보니 근무하는 날은 적고 노는 날만 많아서 해이해지고 병기나 마필도 돌보지 않아 폐단이 매우 많았다. 따라서 의정부와 병조의 의논에 따라 대대적으로 군사조직을 개편하면서 갑사의 조직을 6개 조에 조당 1천명 이던 것을 3개조에 각 조 병력 1천 5백 명으로 개편하였다. 시위는 3개 조가 1천 5백 명씩으로 나뉘어 교대 근무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갑사의 수를 총 6천명에서 4천 5백명으로 줄였다.(세종 27년 7월 18일).
III.3 비용을 절감하라(무득망비,毋得妄費).
[솔선수범]
하늘의 재난을 당하여 밖으로 정치의 바른 도를 역사에서 찾고 또 여러 관서의 인원과 조직을 추림과 동시에 안으로는 곳곳에 숨어있는 낭비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작게는 궁궐의 기왓장과 어가의 장식에서부터 크게는 임금의 정기적인 군사훈련인 강무나 혹은 온정행차까지도 비용절감을 위해 진력했다. 세종 15년 장맛비에 근정전 지붕 모서리 취두(鷲頭)가 떨어져 깨졌다. 다시 고쳐서 올려야겠는데 청기와로 하면 비용이 많이 들 것이므로 세종은 보다 싼 아연와로 하라고 지시했다(세종 15년 7월 12일). 또 근정전 천정의 천화판이 너무 호화롭다는 허조의 지적을 흔쾌히 받아들여 즉시 금색 칠을 지우라고 명령하기도 했었다(세종 8년 11월 3일). 이때 허조의 지적은 매우 정확했다.
“위에서 좋아하시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욱 더 심해질 것입니다.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 : 세종 8년 11월 3일)”
연회를 열어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은 조선 왕조의 전통처럼 되어있었다. 특히 태종 때에는 그런 연회가 더욱 많았다. 임금이 신하와 같이 어울려 춤을 추기도 하고 술을 나누어 마시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임금과 신하의 정이 두터워지고 또 소통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국은 연이은 가뭄과 태풍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태연하게 연회를 여는 것은 하늘에 대한 오만이요 백성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군신간의 정은 연회로 소통하는 법이다. 그러나 예가 지나치면 거리가
있게 되고 흥이 지나치면 방탕하게 되는 법이다. 여러 신하들이 일 년
내내 힘써 고생했으니 내 어찌 같이 어울려 즐기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비용이 충분치 못한 것이 우려되고 또 폭우와 가뭄이 덩달아 와
백성들 생활이 즐겁지 못하였는데 금년에 잠시나마 잠잠한 듯하나
내년 일을 알 수가 없으니 정지하도록 하라.
(君臣之情 因宴而通 且禮勝則離 樂勝則流 群臣終歲勤勞
予豈不欲一與合歡乎 但慮用度之未裕也 此來水旱相仍 民不聊生
乃至今年 暫得蘇息 明年之事未可知也 姑停之 : 세종 6년 11월 6일)”
[온정행차의 비용절감]
세종의 비용절감은 공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한 온천행차에서도 엄격히 비용을 절약하려고 노력했다. 세종은 재위 기간 중 다섯 번 온천 행차를 하였다(위 [표.3-4] 참조). 세종 15년 3월 온양, 23년 4월 온양, 24년 3월 이천, 25년 3월 온양, 그리고 마지막으로 31년 12월 배천온천이다. 이 다섯 번의 온천행차를 보면 처음 온천에 갔던 세종 15년 이전은 5년(세종 10년 이후 세종 14년 까지) 동안 큰 가뭄이 없었다. 아마 세종 치세 기간 중 적어도 가뭄의 측면에서는 가장 기후가 좋았던 5년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온정행을 결정한 세종도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덜 송구스러웠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온정을 간 세종 23, 24 및 25년의 삼 년도 가뭄피해가 크지 않았던 해였다. 세종 22년 대가뭄과 25년 대가뭄 사이에 갔던 것이다. 이를 보면 세종의 온정행차도 경제적 여건을 면밀하게 고려하여 떠났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세종 23년과 24년은 가뭄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기상이 좋은 해였으므로 온정으로 향하는 세종의 마음도 매우 가벼웠을 것이다. 내년(세종 24년 3월)에 있을 이천(강원도) 온천행차를 계획하던 사헌부가 보고를 올렸다. 온천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고을들이 행차에 필요한 물건을 바쳐야 할 텐데 그 값이 너무 비싸 민폐가 크게 걱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미리 수량을 정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보고였다. 세종은 신하들의 알뜰한 절약 정신에 매우 감탄하며 말했다.
“내년 행차의 폐가 어찌 하나이겠느냐. 그렇지만 부득이하여 이 행차가
있는 것이다. 임금을 위하여 아래 신하가 모두 진력할 텐데 매사에
줄이고 절약할 것을 경계하였는데 어찌 그 뜻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너희들의 그 지적하는 말을 들으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생각한다.
(明年行幸弊事非一 然不獲己而有是擧耳 臣子於爲上事 皆欲盡心 故予當每
事戒其省約 豈意至此乎 今聞爾等言 予心嘉之 : 세종 23년 11월 15일)”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경비절감]
세종은 왕위에 오른 후 앞으로 다가올 가뭄이나 장마에 대해 긴장의 끈을 푼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온 백성과 신하들이 절도 있게 소비하고 낭비하지 않기를 항상 바랐다. 그것이 백성이 해야 할 도리요 또 천재를 방지할 수 있는 확실한 처방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번 비가 재난이 되어 장차 큰 흉년이 닥칠 것 같다.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각자가 절용하여 허망하게 낭비하지 않도록 하라.(今者雨水爲
災 將値凶歉 凡爾臣庶 各者節用 毋得妄費 : 세종 3년 6월 16일)”
세종 21년과 22년은 기록적인 가뭄이 연속된 기간이다. 수많은 백성들이 살던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며 어려운 살림을 살고 있었다. 농지가 부족한 함길도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의로 혹은 타의로 유입되었으므로 비축해 둔 양곡이 부족할 것은 확실하였다. 세종은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에게 양곡을 미리 축적해 두기를 간곡히 당부하였다.
“변경으로 이사한 사람이 수만 명이 되지만 축적된 것이 부족하여 속
히 도와주기가 정말 어렵다. 만약 절약하지 않다가 졸지에 흉년을
만나게 되면 폐단이 장차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들은 마땅히 마음
을 다하여 깊이 생각하여 민생을 후히 하도록 하라.
(徙邊之民 幾至數萬 而畜積不足 飛輓實難 若不撙節 而猝遇凶荒
弊將莫救矣 卿等宜盡心思之 以厚民生 : 세종 23년 3월 13일)”
지난 병진년(세종 18년) 가뭄과 같이 계해년(세종 25년) 가뭄에도 각종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세종은 몸소 노력했다.
“내가 감선하기를 원하고 모든 연향을 없애려고 한다. 또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공부(貢賦)의 부담을 줄여 국가의 보탬에 쓰려고 한다.
만약 내 의복과 관련된 것이라면 내가 잘 알아 절약하는 것이 어렵지
지만 그 외 경비라면 내가 잘 알지 못한다. 만약 해당 관서 관리가
잘 알아서 줄이라고 명령해도 분명히 불충분하고 또 더딜 것이다.
(予欲減膳 凡諸燕享 一皆停斷 且欲省浮費 又減貢賦 以舒國用 若予服於所
需緜絲等物 予悉知之 減省無難 其餘經費 予實不知 若令當該攸司
磨勘蠲減 則必致遲緩矣 : 세종 25년 7월 17일)”
그러니 승정원에서 호조와 함께 모든 관서의 비용을 낱낱이 파헤쳐 신속하게 절약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III.4 꼭 써야할 비용은 아끼지 말라(當省而省 當費而費).
연이은 흉년에다 야인들에 대한 토벌 및 성벽 건축 등으로 국가의 재정형편이 매우 좋지 않았다. 불필요한 관원과 갑사의 숫자를 줄이고 또 곳곳의 지출을 줄이는 절용정책을 세종은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렇지만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비용절감 정책을 추진했던 것은 아니다. 꼭 줄여야하는 부분만 줄이고 꼭 써야할 부분은 써야한다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세종이 좌대언 조종생을 보내 영보도량(靈寶道場)에 분향을 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분향을 마치고 돌아온 조종생이 세종께 말했다. 가서 보니 제단에 동전 1개가 달랑 제물로 올려져 있어서 이유를 물었더니 전에는 규정상 제물 금액이 정포 한 필이었다가 오종포(五綜布) 1필로 바뀌었다가 저화 한 장으로 줄어든 다음 지금은 동전 한 닢으로 줄었다는 설명이었다. 세종이 개탄하며 말했다.
“호조가 국가재정의 출납을 장악하여 지출을 줄여야 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거둘 줄만 알고 뿌릴 줄은 모르며 써야 할 곳에 쓸 줄 모르는
것 역시 옳지 않다. 부인이 절에서 불사를 일으키는 일이야 절약함이
가능하지만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국가의 법이므로 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국가도량 소격전에서 보시(布施)를
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으나, 한다면서 어찌 저렇게 심하게 야박하게
할 수 있는가. 진실로 이것은 속이는 것이다.
(戶曹掌錢穀之出納 省費節用 固其宜也 然知斂而不知散 當用而不知用
亦非也 若婦寺佛事之事 則省之可矣 至於祭星 國典所不廢 道流布施
不爲則己 爲之則 何若是其甚薄耶 眞欺罔也 : 세종 7년 10월 16일)”
무차별적으로 생각 없이 절용정책을 쓰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상황을 잘 파악해서 꼭 써야하는가 아닌가를 구별하여 절용해야 한다. 세종 7년(1425)은 왕에 오르고 나서 가장 심한 가뭄이 닥친 해였다. 전국에 사면령을 내리고 또 전체 관원들에게 가뭄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의견을 올리도록 했던 해였다. 그런데 가뭄이라고 경비절감을 너무 심하게 추진하다 보니 하급 관리들이 급여를 제때 받지 못하는 엉뚱한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세종이 이를 질타하며 말했다.
“호조가 국고와 곡식을 맡아서 비용과 재정의 절약을 관장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당연히 줄여야 할 것을 줄이지 않고 또 당연히 써야 할 것을 쓰
지 않음은 모두 옳지 않은 것이다. 최근에 들으니 임진강 도승이 봉급이
끊어져 호조에 부탁했는데도 얻지 못하여 부득이 자비로 먹는다고 한다.
또 경중 각 관청에서 종일 사무를 보는 데도 사비로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이것이 어찌 임금이 신하를 대접하는 예라 할 수 있겠는가.
(戶曹職掌錢穀 裁省冗煩 固其宜也 然當省而不省 當費而不費 俱非也
近聞臨津渡丞俸廩不繼 請於戶曹 而不得自費而食之 且京中各司竟日治事
私備點心 豈人君待臣之禮乎 : 세종 7년 10월 21일)”
[급여체계의 변경 : 녹전(祿田)에서 봉록(俸祿)으로]
관리들은 급여를 쌀과 같은 물건으로 받기도 하지만 밭을 받아 그 소출로 급여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는데 지방 수령이 녹봉을 위해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는 밭을 아록위전(衙祿位田)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록위전에서 나오는 소출은 작황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또 나쁠 수도 있다. 특히 가뭄이 심한 경우에는 거의 소출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럴 때면 지방수령들은 할 수 없이 국고에서 몰래 거짓으로 출납(나이출납:挪移出納)하여 국고를 전용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런 폐단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세종은 급여체계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와 군대가 저축한 것을 절약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찌
마땅히 써야 할 것을 쓰지 않고서 낭비를 없앴다고 말하겠는가. 그러고서
어찌 충을 믿고 후하게 녹을 주어 신하를 격려한다고 하겠는가. 아록위전
을 없애고 대신 국고의 쌀과 콩으로 지급하고자 하니 경들은 잘 의논해
보고하라. (軍國所儲 固宜節用 然豈爲當用而不用 謂其無妄費也 而況忠信
重祿 所以勸士 予欲革衙祿位田 以國庫米豆支給 卿等擬議以聞 :
세종 8년 4월 28일)”
[학교지원을 확충하라]
정부의 경비절감 정책으로 학교가 재정적인 타격을 많이 받았다. 지방 학교의 경우 경학이 밝은 사람을 학장으로 임명하여 정부의 교수관에 준하여 급여를 주므로 원래 직업은 그만두고 교육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충청도의 흉년이 심하여 도의 급여지원이 어렵게 되자 학장이 자기 돈으로 양식을 사야 할 형편이 되었다. 이를 걱정한 충청도 감사가 세종에게 국고의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세종은 충청도 뿐 아니라 전국의 향교의 학장에 대해 국가가 봉급을 주도록 했다(세종 11년 5월 1일).
국학(성균관)의 생원과 진사 학생은 항상 2백 명을 유지했었으나 병진년 대 가뭄인 있었던 다음 해에 경비 절감을 이유로 학생을 1백 명으로 줄였었다. 그러나 실제 학생은 백 명을 채우기도 힘들게 되자 예조가 정원을 다시 150명 으로 증원해 주기를 청하자 즉각 들어주었다(세종 21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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