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54>국가위기와 행정개혁 II. 가뭄과 가뭄대책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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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1 계속되는 가뭄의 원인 : 무능과 부덕
[왕의 무능과 부덕의 소치]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하늘이 가뭄을 내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왕의 잘못, 정치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금이 부덕하고 정사가 고르지 못하면 하늘이 가뭄 같은 재앙으로 왕을 경계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세종 5년 4월 가뭄이 심해지자 모든 신하들에게 하교(下敎)하여 말하였다.
“내가 아주 작은 몸으로 신민의 윗자리에 의지하고 있으나 총명함으로
세상을 밝히지 못하고 덕이 백성을 편안케 못하였으니 해마다 홍수와
가뭄의 흉년이 그치질 않는다. 백성이 고통에 시달리고 집집이 흩어져도
창고가 텅 비어 구제할 수도 없다. 이제 햇볕 많은 달인데 다시 한재가
닥치려하여 차분히 허물의 원인을 생각하니 죄는 실로 내게 있다.
마음이 아프고 얼굴이 부끄러워 어떻게 다스려야 할 지 모르겠다. 곧은
말을 간곡하게 청해 듣고 몸소 수행하여 따스한 기운을 부를까 한다.
(予以眇眇之身 託乎臣民之上 明不能燭 德不能綏 水旱凶荒 連年不息
百姓愁苦 戶口流離 而倉廩匱竭 無以賑恤 今當正陽之月 復罹暵乾之災
靜省咎徵 罪實在予 痛心靦面 罔知攸濟 渴聽讜言 庶幾修行 以召和氣
: 세종 5년 4월 25일)”
사람의 일이 아래서 감동하면 반드시 위에서 하늘이 감응하므로 한재는 반드시 사람이 불러서 일으키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 들으니 사람의 일이 아래에 닿으면 하늘의 변화가 위에서 일어나서
홍수와 가뭄의 천재지변이 모두 사람이 부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내가 덕도 없이 큰 국가를 물려받아 신민의 임금이 되어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혹시나 허둥대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융평의
정치를 하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총명함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혜택
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는구나.
(蓋聞 人事感於下 則天變應於上 水旱凶荒之災 靡不爲人召之也 予以凉德
嗣守丕基 托于臣民之上 夙夜祗懼 罔敢或遑 以圖隆平之治 然明不能燭理
澤不能及民 : 세종 7년 6월 20일)”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왕이 되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무술년에 세자가 되었을 때 곡식이 잘 되었는데 가을 즉위하니
장마로 곡식이 상하였다. 기해년 가뭄에 경자년 또 가뭄은 즉위함이
부당한 내가 즉위해서 그런 것이다.
(予於戊戌爲世子 禾稼稍盛 至秋卽位 霖雨傷稼 己亥早旱 庚子又早旱
以予爲不當卽位而卽位之所致也 : 세종 21년 7월 4일)”
무자격에다 정치까지 못하는 왕이니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줄 생각까지 한다.
“병진년 가뭄과 기근은 너무 심하여 고금에 없던 일이다. 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으나 재변을 당하여 큰 자리를 물려준다면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이루지 못했다.
(丙辰歲旱荒 飢饉太甚 古今所無 予欲禪位世子 然乘災變遽禪大位 則恐致
或者之疑 故未果矣 : 세종 21년 7월 4일)”
[잘못된 정치]
자격도 없는데다가 왕이 되어서 정치까지 잘못하니 백성의 억울함이 하늘에 닿아 가뭄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벌을 하늘이 내리는 것으로 믿었다.
“이제 농번기를 당하여 비가 제 때 오지 않으니 잘못된 정치가
있어 재난에 이른 것이 아닌가 걱정되어 내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
(今當農事方殷 雨澤愆期 慮有闕政 以致災咎 予固惕然于中
: 세종 25년 7월 8일)”
형벌이 잘못되지나 않았는지도 걱정이 되었다.
“대개 평상시와 다른 이상한 일들이 생기면 이를 재변이라고 한다.
이번과 같은 가뭄은 하늘이 아주 크게 꾸짖는 것이다. 혹시 형벌에
있어 공정하지 못하여 억울함을 펴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
(凡有異於常者 皆謂之災變 今旱乾乃譴告之大者也 無乃刑政失中
冤抑未伸歟 : 세종 18년 7월 7일)”
“이제 농사철을 당하여 비가 제때 오지 않으니 혹시 형벌을 바로
내리지 않아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한 적이 있지는 않는가.
(今當農月 雨澤愆期 慮有刑罰不中 冤抑莫伸 : 세종 25년 5월 14일)”
형벌착오나 정치의 실패가 가뭄 등 자연재변으로 나타난다고 믿은 세종은 항상 마음속에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고 이 두려움이 반드시 정치를 바로 해야만 한다는 각오와 신념을 갖게 한 동력이었다.
II.2 눈병과 황우(黃雨)
세종 23년 2월 임금의 안질이 매우 악화되었다. 그 때 세종의 고백에 따르면 이미 10년 정도 안질을 앓고 있다했으므로 대략 세종 14년서부터 안질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발병 초기에는 정무를 보는 데 큰 지장이 없었으나 4,5년 전부터는 증세가 악화되었고 올해에는 정무를 보기가 힘들 정도로 심한 편이었다. 몸과 마음을 편히 쉬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눈병을 이미 십년 앓았는데 이제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몸을 조절
하여 병을 다스리고자 하니 매월 대조회와 아일조참(궁중의 매일 조례
모임)과 야인숙배 외에는 모두 없애도록 하라. 향과 축문도 직접 하지
않겠다.(予得眼疾 今己十年 玆欲安心調攝 每月大朝會及衙日朝參 野人肅
拜外餘悉除之 香祝 亦欲勿親傳 : 세종 23년 2월 20일)”
세종은 자신의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서 입춘부터는 음침하거나 어두운 곳은 보이지 않아 지팡이 없이는 걷기가 어렵다고 했다. 온천욕이 눈병에 좋다는 말을 듣고 1월에 이미 신하를 보내 과연 그런지 실험을 시킨 것을 보면 안질이 심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의 눈병은 모든 일을 부지런히 처리하고 또 밤낮으로 책을 읽는 임금의 과로 때문이었다. 신하들도 진심으로 임금이 휴식하기를 바랐다. 도승지 조서강은 온천욕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건의했다. 임금은 싫다고 했다.
“이제 곧 농사철이 다가오는데 시끄러움이 실로 많아 불가하다.
(今當農月 騷擾實多 不可也 : 세종 23년 2월 20일)”
그래도 승지들이 물러서지 않고 설득하자 마침내 임금이 승낙했다.
“내 눈병이 십여 년 되었는데 지금 너희들이 간곡히 청하므로 이번
온천 행차를 가겠다. 마땅히 대신들로 하여금 내 본뜻을 잘 알게 하라.
(予之眼疾十有餘年 今爾等固請 乃有此行 宜使大臣 知予本意
: 세종 23년 2월 20일)”
세종은 3월 17일 온양으로 출발했다가 5월 7일 돌아왔다. 온천욕도 처음에는 효험이 없는 듯했으나 어제 밤에는 효험이 있는 듯했다. 잔잔한 글자와 깨알 같은 주석도 잘 보였다. 도승지가 기뻐하며 온정에 오래 머무시어 영구히 치료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조서강에게 말했다.
“이제 곧 여름이 오면 흙비가 올까 두렵다. 다음 달 초하루 돌아가려고
한다. (今當夏月 恐有霾雨 故欲於來月初吉還宮 : 세종 23년 4월 4일)”
한참 온천에서 요양 중에 있는 세종에게 급보가 올라왔다. 도성지역에 황우가 내렸다는 것이다(세종 23년 4월 26일). 고인 물 색깔이 누렇다고 사람들이 웅성거린다는 의정부와 예조의 보고였다. 황우란 하늘이 저주할 때 내린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러나 궁에 남아 세종 대신에 사무를 맡아보던 안평대군 이용이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그것은 황우가 아니라 송홧가루 섞인 빗물이라고 보고했다. 어제 밤에 내린 빗물에는 송홧가루가 없었고 오늘 낮에 길가에 고인 물에만 송홧가루가 있으니 필시 송홧가루라는 것이었다. 물맛도 송홧가루 같이 매운 맛이 나고 색깔도 누런색이 아니라 송홧가루 색깔과 비슷하니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세종 23년 4월 26일).
황우의 괴변 소식을 접한 세종은 즉각 환궁에 따르는 모든 번잡한 환영행사를 일체 정지하라고 명령했다. 황우가 하늘의 분노 때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평대군의 말에 다소 위안이 되기는 했지만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보름 전에 흙비를 염려하여 서둘러 환궁하겠다고 했는데 정말 황우가 내린 것이라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만약 하늘에서 내린 것이 아니면 그만이지만 하늘에서 내린 것이라면
그것은 재앙이다. 실로 측량할 수 가 없으니 걱정 근심이 없겠는가.
이미 정부가 황우라고 했으니 연소자(용)의 말을 믿을 수는 없다.
황우가 내린 지 며칠이 지났으니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서 어떻게 능히
진위를 가릴 수가 있겠는가.
(若非天所降 則己矣 如天所降 則其爲災 實未可測也 何可恝개然不自憂懼
政府旣以爲黃雨 不宜以年少子弟之言爲信 況下雨日久 無迹可驗 安能辨
其眞僞也 : 세종 23년 4월 29일)”
하늘이 재앙으로 내린 황우가 아니기를 바랐으나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고 걱정했다. 하연과 정연 등 신하들은 임금을 위로하려 했다. 만일 재변이라면 당연히 임금께서 두려움으로 조심하시고 반성하셔야 하지만 재변이 아닌데 스스로 변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옳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비도 제때 잘 와 풍년을 기대하게 된 것을 보면 하늘이 노한 증거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세종은 옳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들 말이 옳다. 그러나 일이 요괴스런 징조인가 길조인가에 관계된
문제이니 어찌 감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卿等言是矣 然事關妖祥 予安敢不慮 : 세종 23년 4월 29일) ”
결국 황우소동은 송홧가루 섞인 비를 잘못 보고한 늙은 의정부와 육조의 실수로 단정했고 임금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세종은 5월 2일 온양을 출발하여 닷새 만에 서둘러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세종이 환궁을 서두른 이유는 흙비였다. 기록을 보면 흙비는 거의 7,8년을 주기로 거세게 내렸다. 세종 1년 3월에는 먹비라고 부를 정도로 짙은 비가 내렸고 6월에도 심했다. 세종 9년에는 1월에 하루 종일 흙비가 내렸다고 했고 16년 5월에도 흙비가 너무 심해 매일 보는 정무(常參)를 2개월 동안 정지하기도 했었다. 흙비는 늘 있는 일이라서 하늘의 재앙인 황우와는 다른 문제지만 그래도 세종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II.3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라.
세종 23년 6월 들어 전국적으로 가뭄이 찾아왔다. 한참 비가 많이 와야 할 4월과 5월에 비가 거의 없어 전국의 농토가 말라가고 있었다. 6월 3일에 황충(메뚜기) 떼가 황해도에 나타났고 4일과 11일에는 함길도 갑산과 경상도 밀양 등지에 우박이 내렸으며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등지의 농지가 심한 가뭄에 시달려 기우제를 지내었다. 6월 22일 임금은 몸소 가뭄을 해소해주기를 바라는 기우제를 자하문 밖에서 지내었다(세종 23년 6월 22일). 세종은 다시 긴장했다. 이렇게 심한 가뭄은 혹 하늘이 자신을 또 책망하려는 것이 아닌지 걱정했다. 특히 재판에서 억울한 형을 받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즉시 형조에 지시하여 가벼운 죄를 범한 사람을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이제 더위가 몹시 심해 갇혀 있는 죄수의 고통이 보통 때의 갑절은
될 것이다. 가벼운 죄를 지은 죄수의 석방을 검토하라. (今當盛熱 囹圄
之苦 倍於常時 輕罪囚人 保放推考 : 세종 23년 6월 25일)”
그리고 전국의 감옥 방이 설계대로 제대로 잘 지어져있는지를 전국 도관찰사에게 검사하도록 지시했다. 하늘이 가뭄을 주는 이유는 옥사가 잘못되어 원성이 하늘에 미쳤기 때문에 하루 빨리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만 하늘이 노여움을 풀고 비를 내릴 것이라 생각했다.
“옥의 일은 매우 중요하다. 관리들이 죄수를 가볍게 다루어 심한 추위,
더위, 장맛비에 노출되어 죽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기미년에 감옥의
형태와 구조를 설계하여 각 도에 보냈는데 이제 각 관에서는 설계대로
건축되었는지 여부를 검사하여 보고하라.
(獄關係至重 官吏輕忽 囚人祈寒暑雨 屢致殞命 去己未年間 圖書獄犴形制
頒諸各道 今各官依圖造成與否 檢驗以聞 : 세종 23년 6월 29일)”
세종은 그 날로 사직단에 나아가 기우제를 올렸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속으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바른 정치를 하려면 과거 정치의 역사를 잘 챙겨보아 교훈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해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는구나, 그래서 가뭄이나 홍수나 황충 피해가 오는 구나” 세종은 궐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정인지를 불러 이렇게 지시했다.
“모든 정치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과거 치세와 난세의 기록을 봐야
하며 그 기록을 보고자 하면 반드시 역사책을 상고해야 한다. 주나라
이후 각 나라마다 역사책이 있었으나 그 편찬한 양이 너무 많아 모두
보는 것이 쉽지 않다.(중략) 경이 그 역사책을 두루 보고 그 선악으로
본보기가 될 것들을 뽑아 책으로 펴서 쉽게 열람하도록 하여 후세
자손들의 영원한 본보기가 되게 하라.
(凡欲爲治 必觀前代治亂之迹 欲觀其迹 惟史籍是稽 自周以降 代各有史
然編簡浩穰 未易遍考(中略) 卿其考閱史籍 其善惡之可爲勸懲者 撰次成書
使便觀覽 以爲後世子孫之永鑑 : 세종 23년 6월 28일) ”
세종 27년 3월 30일 드디어 <치평요람>이 완성되었다. 세종이 정인지에게 명령을 내린지 꼭 3년 9개월 만이었다. 그동안 가뭄이 심했던 세종 25년 여름에는 작업을 그만두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시나 소설 같은 작업은 중지할 수 있어도 <치평요람>작업은 중지할 수 없다는 것이 세종의 소신이었다. 우참찬 정인지가 쓴 <치평요람> 전문의 내용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다스린 자는 일어나고 어지러운 자는 망하나니 얻고 잃음이 지난 역사에
다 실려 있습니다. 옳은 것은 본받고 악한 것을 경계하여 권하고 징계함
을 모두 마땅히 후인들에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 책을 모아서
만세를 드러내어 밝게 나타내었습니다.(중략)
옛 주나라로부터 명나라까지 이르렀고 본국은 기자 때로부터 고려까지
실었습니다. 옛 역사의 기록을 모으고 소설의 기록도 실어 국가의 흥망과
임금 및 신하의 옳고 그름과 정치와 교육의 잘잘못과 풍습의 좋고 나쁨
을 밑으로는 필부로부터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에 이르기까지 인륜에
관계되는 모든 사소한 일을 기록하였으며 정치에 도움 되는 모든 일을
남김없이 실었습니다. 사이사이 여러 전문가의 주석을 싣기도 하고 옛 선
비들의 의견을 달기도 하였습니다. 넓게 박식하고 두루 갖추심은 임금님
의 다스림의 근본이시며 명백하고 근엄하심은 참으로 역사기록 이외에
마음을 전하는 중요한 모범입니다. 신 정인지는 높으신 위촉을 받아 미진
한 노력이나마 다하여 해와 달과 같은 밝음을 드높이고(宣日月之華) 물
방울이나 먼지만한 보탬(涓埃之補)이라도 될까하여 강령을 잡고 항목을
나열하여 비록 펴 넓힘에는 부족하오나 눈으로 보시어 마음으로 깨우침
이 있으시면 정치에 도움이 될까합니다. 치평요람 150권을 신중하게 다
듬어 제본 완성된 책을 전문과 함께 올립니다(세종 27년 3월 30일).”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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