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53>국가위기와 행정개혁 I. 국가위기의 해법을 신하에게 묻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태종은 이종무와 김효손과 환관 김용기를 불러 술상을 차려 놓고 자기에게는 세 가지 눈물이 있다고 고백했다. 하나는 아들이 적지 않았으나 눈앞에 다 있지 않음이 첫째 눈물이고, 효령과 충령이 조석으로 출입하며 안부를 묻곤 했는데 이제 충령이 왕이 되어 자주 보지 못함이 둘째 눈물이요, 재위 19년 동안 가뭄 없는 해가 한 해도 없었음이 셋째 눈물이라 한 적이 있다. 가뭄은 국사에 관한 한 태종에게 최대의 어려움이었다는 말이다. 세종 때 들어와 가뭄은 더욱 심했다. 세종 재위 전반기 보다 후반기로 갈수록 피해는 더욱 컸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가뭄기사의 건수를 기준으로 보면 가뭄에 관한 기사가 가장 많았던 해는 세종 18년(1436,병진)으로 이 해 가뭄은 4월서부터 8월까지 5개월에 걸쳐 발생하여 세종 32년 중 최악의 가뭄으로 평가된다. 소위 병진년 대가뭄이라는 것이다.
병진년(1436) 다음으로 가뭄 피해가 심했던 해는 세종 21년(기미,1439)으로 이 해 가뭄기사는 25건이나 되었다. 이외에 세종 22년(경신,1440) 및 25년(계해,1443)의 23건과 이어서 세종 9년(정미,1427) 17건과 세종 7년(을사,1425) 16건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 재위기간 중 가뭄이 가장 심했던 4년은 모두 세종 재위 18년에서 25년 사이에 일어났으며 좀 더 넓게 보면 세종 17년부터 세종 26년까지가 가뭄이 가장 혹심했던 10년이었다.
I.1 철야 기도로 죽을 뻔하다.
[열흘의 철야 기도로 임금이 쓰러지다.]
세종이 즉위한 다음에도 가뭄은 이어졌다. 세종 1년(1419)에 큰 가뭄이 있었고 4년 뒤 세종 5년(1423)에도 큰 가뭄이 닥쳤다. 그러나 세종 집권 초기의 가장 극심한 가뭄은 세종 7년에 있었다. 그 해의 가뭄은 재위 32년 중가뭄 랭킹 6위였다.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닥친 가뭄이라 매우 놀라고 당황했다. 자신이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 세종은 견딜 수 없는 자책감에 시달려야했다. 가뭄이 한창인 세종 7년 7월 18일부터 세종은 밤을 새워 하늘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정상적으로 정사를 보고 윤대(임금이 가까운 신하들과 돌아가며 의논하는 작은 회의)를 행했지만 모두가 물러간 밤에는 홀로 궁궐 대청에 나와 앉아 밤을 새웠다. 열흘 동안 임금은 잠을 자지 않았다. 자기학대라면 자기 학대이고 하늘에 대한 간절한 기도라면 기도였다. 임금은 날로 여위고 초췌해져 갔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열흘 만에 임금이 병으로 쓰러졌다(세종 7년 7월 28일). 의원과 승지들은 며칠 전 병이 난 것을 알았지만 외인에게 알리지 못하게 했는데 임금이 쓰러지고 나서야 대신들이 알게 되었다.
다음날 종친 의정대신 육조의 모든 신하들이 문병을 왔다. 세종은 말했다.
“어제부터 내 병에 차도가 있으니 다시 문안오지 말라.
(自昨日 予疾己差 勿復問安 : 세종 7년 7월 29일)”
대신들이 지신사 곽존중에게 왜 진작 편찮으시다는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곽존중은 임금이 경미한 병이므로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고 했다. 궐내에서는 의원과 지신사 둘만 알고 있었으며 다른 대언들도 몰랐다고 했다. 영의정 유정현은 반드시 임금의 병을 알려야 하며 또 의원이 약을 주더라도 반드시 대신이 주관해서 약을 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때 명나라에서는 인종 홍희제(1378-1425)가 죽었다. 조선은 왕은 물론 온 조정 신하들이 대궐 뜰에 소복으로 나와 곡례를 올릴 때였다. 황제에 대한 곡례를 드리는 몹시 초췌해진 임금의 모습을 이때서야 비로소 볼 수 있었다. 용안이 ‘몹시 파리하고 검어져 병환이 심한 줄 알고 모두 놀랐다’고 했다. 7월 하순 병환이 처음 발생하고 한 달이나 지났지만 병환의 차도는 없었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이제 모든 신하들이 산천과 종묘에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금등고사(주나라 무왕이 위독하자 주공이 글을 지어 신에게 고하면서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했다는 고사)의 예에 따라 글도 지었다. 통상적으로 산천종묘 기도는 절망적이라고 느낄 때에 드리는 것이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기도의 장소는 종묘, 사직, 소격전, 삼각산, 백악산, 목멱산, 송악산, 개성의 덕적도, 삼성산, 감악산, 양주 서낭당의 열 한 곳으로 정했다(세종 7년 윤7월 24일). 세종이 부처님을 좋게 여기므로 부처를 모신 절에도 기도를 드리려 했으나 그 사실을 안 임금이 말렸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의례적으로 하듯이 거처를 장의동 잠저로 옮기기도 하였다(세종 7년 윤7월 28일). 승하하시는 것이 기정사실과도 같이 여겨졌다. 그러나 세종은 다시 일어났다.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8월 9일부터 세종의 병환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병환으로 쓰러진 지 50일 만이었다.
“내가 처음 병을 얻은 지 벌써 50일이나 되고 또 극심하게 아픈 것이
열흘정도 되지만 정신은 혼미하지 않으니 내가 장차 나을 것을 알겠다.
(予初得疾己五旬 增劇亦且十日 然吾心氣不昏 予知其將愈矣
: 세종 7년 8월 9일)”
I.2 위기의 해법을 신하에게 묻다.
철야기도로 목숨을 거의 잃을 만큼 가뭄은 세종에게 있어서 최대의 정책과제였다. 세종은 가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른 정치의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대언들은 적절한 말씀이라고 칭찬했다. 세종은 대언들에게 명하여 좋은 말을 구하는 교지(敎旨)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 되는 때의 교지내용이다.
“내가 부왕의 무거운 부탁을 이어받고 지극한 정치를 해 풍년이 들기를
바랐으나 덕이 부족하고 천심을 받들지 못해 정치를 하자마자 한재가
드니 기도가 간절해도 비가 내릴 징조가 없어 밤낮으로 두려워 어찌 할
도리를 모르겠다. 바른 말을 자문하여 들고 재변을 그치게 하고자 하니
대소 신료 한량 원로들은 각자 품고 있는 정치의 잘못이나 백성의 아픔
을 바로 잡을 생각을 숨김없이 진술하여 나의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부응하게 하라. 틀린 말이라도 죄 주지 않겠다.
(予承父王付托之重 盡心圖治 冀底豐平 顧惟否德 未享天心 莅政之初
遽罹旱災 祈禱雖切 略無雨徵 夙夜祗懼 罔知所措 顧聞讜言 以弭災變
大小臣僚 閑良 耆老 各敷乃心 惟是時政闕失 生民疾苦 極陳無隱
以副予畏天恤民之意 言雖不中 亦不加罪 : 세종 1년 6월 2일)”
정치의 잘못이나 백성의 고통을 바로 잡을 방법을 다 진술해 주기를 바랐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 자신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기를 부탁했다. 4년 뒤 세종 5년(1423) 또 큰 가뭄이 닥쳤을 때에도 같았다. 왕위에 오른 이래로 수재와 한재가 겹쳐 백성들 삶이 매우 어려운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무자격과 부덕과 무능 때문에 왔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더 정치를 잘할 수 있는지, 그래서 하늘이 재앙을 내리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세종은 일단 신하들에게서 그 해답을 구했다. 왕의 잘못이라도 숨김없이 지적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대소 신료들은 하늘의 경계를 깊이 생각하여 위로는 임금 자신의
잘못 및 관료들의 흉허물과 아래로는 마을의 희로애락과 백성의
이해 및 병폐를 진심으로 숨기는 것 없이 직언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大小臣僚 其各勉思天戒 上而寡躬之闕失 政令之疵愆 下以田里休戚 生民
利病 直言盡意 無有所諱 以副予畏天憂民之至懷 : 세종 5년 4월 25일)
세종 7년에는 더 큰 가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쓰러지기 직전의 가뭄이었다. 이번에도 세종은 신하들에게 바른 정치의 해답을 구했다.
“바른 말을 들어 반성하며 몸을 닦는 자료로 삼고자 하니 대소 신료는
각자 깊이 생각하여 임금의 잘못이나 정책의 하자나 민생의 질고를 숨김
없이 말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
응하도록 하라.
(欲聞讜言 以資修省 庶答天戒 大小臣僚 其各勉思 躬寡之闕失 政令之疵瑕
民生之疾苦 悉言無諱 以副予畏天憂民之至懷 : 세종 7년 6월 20일)”
세종은 가뭄과 같은 국가적 재난을 당할 때마다 항상 그것을 자신의 정치 잘못 때문으로 해석했다. 형식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 밑에는 ‘하늘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畏天憂民之至懷)’이 깔려 있었다. 부덕하고 능력이 모자라는 자신이 정치를 잘못하여 가뭄과 같은 국가위기가 발생한 것이므로 그 해법을 신하들에게 묻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세종은 국가의 모든 중대사에 이렇게 ‘다양한 의견을 묻는 방식’을 도입했다. 가뭄의 해법 뿐 아니라 교육개혁의 방법, 미풍양속을 펼치는 방법, 국토 방어와 전쟁을 치르는 방법, 행정 혁신을 이루는 방법,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 공법을 치를지 여부 등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마다 혹은 대소신료 혹은 백성에게 뜻을 묻고 나서 결정하였다.
I.3 신하들의 진언 내용
임금의 간곡한 요청을 받은 신하들은 정성껏 자기의 생각을 올렸고 세종은 그것을 밤을 새워가며 다 읽었다.
“내가 어젯밤 진언한 것을 다 읽어 보았더니 역시 취할 것이 있었다.
의정부와 육조가 같이 의논하여 올리면 내가 서둘러 시행할 것이다.
(吾今夜盡覽陳言 亦有可取者 爾與議政府六曹擬議 予當亟行之
: 세종 7년 6월 22일)”
세종의 부탁을 받고 모두 127명이 제안을 올렸다. 정치의 근본 잘못이 무엇인가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은 크게 일반행정 부문과 지방행정 부문 그리고 민생관련 부문의 세 부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총 127명이 올린 제언내용은 아래 [표.3-2]에 요약하였다.
공조판서 이맹균을 포함하여 가장 많은 신하들이 공통적으로 제안했던 내용은 ‘지방장관의 재물 전용 혹은 유용(나이출납,挪移出納)를 엄벌하자는 요구’와 ‘민간 배의 수송에 따른 규제철폐 요구’였다. 특히 민간 배로 물건을 수송하는 경우 적절한 증빙서류가 없으면 수송물자를 모두 관가에서 몰수하였는데 기상여건이 나쁘거나 혹은 개인사정으로 말미암아 증빙서류를 갖추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 물건을 모두 몰수하는 것은 실로 민생에 큰 원망을 사는 일이었다. 그 다음으로 지적된 것은 ‘사원과 중의 탈선 문제’였다. 중들이 재물과 이익을 탐하고 과도한 재산을 축적하며 재를 핑계로 백성의 재산을 편취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재상(宰相)의 숫자가 70인으로 너무 많다는 지적과 부민의 수령고소금지법을 완화하자는 안도 있었다. 세종은 이런 제안들을 의정부와 육조가 의논해서 정책으로 반영하라고 지시했다. 과거와 같이 묵혀두거나 방치해 두는 일이 결코 없도록 세종은 당부하였다.
세종은 이 중에서 일곱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그 일곱 가지란 장물죄 범죄자의 사면혜택 부여, 지방관의 재물 오남용 죄, 정승 수의 축소, 사복시의 말 수효 축소, 절에서의 수륙재 폐지, 부민수령고소금지 완화 및 관리 임기 3년 제한(육기법폐지)이었다.
가뭄으로 세종이 신하에게 정치를 바로 잡을 방법을 물었던 적이 또 있다. 바로 세종 25년 계해년(1443) 가뭄 때였다. 집권 후반기 또다시 가뭄피해가 극심했던 세종 25년에 임금은 조정의 신하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제 농사일이 여러모로 바쁜데 비의 혜택이 기일을 못 지키니 정치가
잘못되어 한재가 올까 염려된다. 내 마음에 두려움이 있어 동반 각품과
서반 4품 이상 관원으로 혹 제언할 말이 있으면 숨김없이 모두 밀봉하
여 올리도록 하라.(今當農事方殷 雨澤愆期 慮有厥政 以致災咎 予固惕然
于中 其令東班各品 及西班四品以上 如有可言之事 悉陳無諱 密封以啓
: 세종 25년 7월 8일)”
임금의 지시에 따라 그날 예조와 의정부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의논한 결과 일곱 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i) 백관에게 가뭄의 원인과 대책을 말하게 할 것,
(ii) 변경의 중대사와 변경의 시급 긴박한 일 외 모든 공사는 풍년이
들 때까지 정지할 것,
(iii) 강상(綱常,국가기강)에 관한 문제와 도둑질한 관리의 일 외에는 환
수한 모든 고신(告身,신분자격증)을 생사에 관계없이 돌려 줄 것,
(iv) 강상에 관계되거나 강도절도의 범죄 외에는 모든 옥중 죄인을
풀어 줄 것,
(v) 모든 관사의 연로한 하급관리(이전,吏典)는 과거 예에 따라
퇴직시킬 것,
(vi) 자기가 감독하면서 스스로 훔치는 일(감림자도,監臨自盜)외 모든
마모 손상되거나 기록의 착오로 모자라는 물건은 추징하지 말 것,
(vii) 관사 노비가 마모, 손상했거나 잃어버린 물건을 추징하지 말 것.
등이었다. 세종은 이 중에서 (i)과 (vii)의 두 가지만 채택했다. 즉 백관에게 가뭄의 원인과 대책을 묻는 것과 노비의 훼손을 탕감하자는 것 외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두 번째 건의안 (ii)는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많은 의정대신들이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의견이 아름답기는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사를 하면서 법으로는 공사를 중단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첫째로 국민을 속이는 것이며, 둘째로 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갓 입법만 한 것이지 아무 쓸모없는 법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이때 세종은 몸이 몹시 불편했다. 연초에는 온양까지 다녀왔었다. 세종이 기거하고 있는 궁이 너무 낡고 불편하여 새로운 궁을 짓고 있었는데 공사를 끝내지 않고 이런 영을 내려 공사를 중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면서 의정대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사정을 이렇게 말했다.
“이번 후궁을 짓는 것은 유람을 하기 위함도, 미를 과시하기 위함도
아니다. 내 거소는 한 칸 초가라도 오히려 편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병자이므로 살 곳은 부득이 반드시 지어야 할 것이므로 이번에 공사를
중지하라는 법을 세우더라도 오래 실행하지 못할 텐데 법을 만들고도
폐단(부득이 법을 어기고 집을 짓는)을 없앨 방법은 무엇인가.
(今予之營後宮 非爲觀遊 亦非誇美 予之所居 雖一間茅屋 尙以爲便
然予病人 所居之處 終必不得已營造矣 然則今雖立停罷之法 勢難久行
其法立無弊之術如何 : 세종 25년 7월 9일)”
I.3 하늘제사(제천,祭天)를 드릴 것인가 ?
고려 시대에는 원단제라고 해서 종종 하늘에 제사를 지냈었다. 그러나 태종이 이것은 참담한 제도라고 해서 없앴다. 일부 신하들 중에서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믿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변계량이었다. 웬만하면 선왕이 없앤 제도를 다시 들여올 생각을 할 세종이 아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가뭄과 태풍과 황충 피해와 같은 기상이변이 심해졌고 또 자신의 병도 점점 악화되자 생각이 많이 흔들렸다. 세종이 신하에게 물었다.
“이번 하늘제사는 만약 가능하다고 한다면 즉시 결행할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제사가 없다가 갑자기 재변을 만났다고 제사를 드린다면 안
되는 것은 아닐까. 제사를 드린다면 제물을 성대하게 준비하고 반드시
내가 직접가야 할 것이며 신하로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할 수는 없다. 직
접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하늘이 어찌 기쁘게 흠향하겠느냐. 부득이 내
가 직접 제사를 드릴 것이니 제사절차를 상세히 정하라. (今祭天 若以
爲可 則予決意行之 然平昔不祭天 以遇災祭之 無內不可乎 祭之則必須親
行 以備儀物之盛 不可遣臣祭之也 若不親祭 則上天豈肯享之乎 不得已則
予當親祭 其詳定儀註 : 세종25년 7월 10일)”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직접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었다. 자신의 심각한 병도 그렇고 끊이지 않는 가뭄피해도 그렇고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변방의 야인침범도 그렇고 어느 것 하나 하늘에다 하소연하고 싶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하들도 세종의 그런 아픈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승지들이 맨 먼저 나섰다. ‘사람이 궁하면 반드시 하늘을 부른다(人窮則必呼天)’고 했고 또 신마다 제사 지내지 않는 신이 없으며 폐지했던 제사도 다시 지내기도 하므로 제사를 올리는 것이 옳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세종은 한편으로는 안심하면서도 이것은 국가의 중대사이므로 반드시 의정부대신들과 함께 의논하여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정대신들에게 제천의 타당성을 물어 본 결과는 의외였다. 세종은 직접 제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직접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옳다는 대신은 한 사람도 없었다. 황희와 김종서 등 네 명의 대신은 신하들이 대신하여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나머지 세 명의 대신들은 하늘제사(제천,祭天)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중국에서도 제천을 한 적이 없고 또 재변을 만나서 하는 제사라면 의미도 없고 예(禮)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종은 제천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말이 맞는 말이라고 일단 치켜세웠다. 사람의 일이 다 순리대로 되는 것이며 사람의 일만 제대로 한다면 어찌 하늘이라고 재변을 내리겠으며 사람의 일을 제대로 못한다면 어찌 제사를 드린다고 하늘이 복을 내리겠느냐고 물었다. 다만 하도 절박한 마음이라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
“인사가 백성에게 순하면 어찌 하늘제사가 없다고 재변을 내릴 것이며
인사가 백성에게 불순하다면 제사를 지낸다고 어찌 복을 내릴까.
다만 하도 상황이 절박하여 제사로 인해 행여 비를 내리지 않을까
싶어 말해 본 것이다. (人事順於下 則雖不祭之天豈降災 人事不順於下
則雖祭之 天豈降福乎 然以迫切之情 幸祭以得雨 故云耳
: 세종 25년 7월 10일)”
얼마나 절박했으면 도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하늘제사라도 올려 가뭄을 피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대신의 의사를 중요시 했으면 거의 빌다시피 하늘제사를 올리기를 신하들에게 간청했을까.
<ifsPOS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