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N)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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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66) 모용평의 실패(AD368)
태부 모용평은 모용황의 동생이고 모용준과 모용각의 숙부였으며 지금 황제 모용위에게는 작은 할아버지였다. 태재 모용각이 중병에 들었을 때 한 가지 걱정이 시기심 많은 삼촌 모용평이 인재를 잘못 골라 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 모용위의 서형 모용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 지금 형국이 남으로는 동진이,
서로는 전진이 틈을 보면서 국력을 쌓아 가고 있구나.
무릇 국가 흥망과 성쇠는 오로지 재상의 능력에 달려있는데
특히 대사마(모용각이 쥐고 있던) 자리는
6군을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자리이므로
적당하지 않은 인물을 절대로 그 자리에 앉혀서는 안 될 것이다.
내사 죽는다면 친소로 볼 때
그대 모용장 아니면 모용충(冲)일 텐데
비록 재주와식견이 있다고 한 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왕이 천부적으로 자질이 뛰어나고 지략도 세상을 뛰어넘을 것이므로
그대들이 대사마 자리를 뒤로 미루었다가(사양하라는 의미)
오왕에게 줄 수만 있다면 그가 반드시 사해를 하나로 만들 것이다.“
이런 뜻을 삼촌 모용평에게도 여러 차례 당부하였다. 그러나 모용각이 죽자 모용씨의 대 원로 모용평은 모용각의 말을 듣지 않고 거기장군 모용충을 대사마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오왕 모용수에게는 시중, 거기장군의 자리를 주었다. 이제 확실히 권력의 중추는 모용각-모용수에서 모용평-모용위 형제에게로 바뀐 셈이다.
(67) 부씨의 내란과 모용덕(AD368)
AD364년에 전진의 부생의 친동생 여남공 부등(騰)이 다른 네 명의 동생들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죽은 적이 있었다. 왕맹은 예전부터 부생의 자식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주군 부견은 주모자 부등만 처리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그 때 살아남은 정북장군 회남공 부유는 AD365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습격했는데 이위가 잘 방어하여 부유를 체포하고 죽였다.(AD365년 10월) 이 때 부건의 아끼는 아들 정동대장군 진공 부류(부생의 동생)와 부견의 친형 정서대장군 조공 부쌍도 반란에 가담을 했지만 부견은 부유만 처단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부견이 두 번이나 목숨을 살려 주었던 부류가 AD367년 부생의 다른 동생 진동장군 위공 부수와 안서장군 연공 부무와 함께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 진동장군부 주부 요조가 주군 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공께서는 주공과 소공처럼 주군(부견)과 친한 사이인데
국가가 어려울 때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어찌 스스로 난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부수는 요조의 말을 듣지 않고 반란 군사를 일으켰다. 부견이 그 소식을 듣고 즉각 난을 일으킨 부류 형제를 장안으로 긴급 소환했다. 부류 형제들은 소환령을 거부하고 군사를 몰아
남쪽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부견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군대를 물리고 소환에 응하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신표로 배를 깨물어 보이는 「설리의 신표(齧梨爲信,설리위신)」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부견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다음해 정월 부견은 양성세와 모숭을 보내 진주(秦州) 방향 반란군 부무를 토벌하게 하고 왕맹과 등강은 옹주 포판(산서성 영제)의 부류를 공격하였으며 양안과 장자를 보내 섬성(삼문협)의 부수를 토멸시켰다.
섬성을 지키던 부수는 두려운 나머지 전연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전연의황제는 용렬한 모용위였고 훌륭하게 정치를 이끌어가던 모용위의 삼촌 모용각은 지난해(AD367) 사망한 직후였다. 모용각은 죽기 직전 조카 황제 모용위에게 친동생인 오왕 모용수를 등용하여 모든 정사를 자문할 것을 신신당부했었지만 모용위는 듣지 않았다. 모용위는 모용수 대신 시기심이 많고 편벽한 작은 할아버지 모용평을 태부로 등용시켰다. 사실 전연 조정에서는 부견의 전진이 부씨 형제간 내전으로 혼란한 지금이야말로 전진을 토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범양왕 모용덕이 이렇게 말했다.
“ 선황(모용준)께서 하늘의 뜻에 호응하고 천명을 받아서
뜻을 높여 6합(동서남북천지=천하)을 평정하시려 했습니다.
페하께서 그 대통을 이으셨으니
마땅히 그 뜻 또한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부씨들이 골육전쟁으로 흩어져 나라가 다섯으로 나뉘고
정성을 다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전진을 우리에게 던져 준 것입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천하재앙을 내릴 것이니
오월의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황보진에게 명령하시어 병주, 기주 무리를 데리고 포판으로 가게 하시고
오왕은 허창과 낙양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부수를 구해 주십시오.
태부(모용평)은 금위군을 인솔하여 뒤따르게 하시며
격문을 천하에 띄워 포상금으로 전국의 군대가 호응하도록 하시면
천하 통일의 기회가 바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부 모용평은 옹졸하고 그릇이 형편없이 작았다.
“ 전진은 대국이라 쉽게 도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닫아걸고 국경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진을 평정하는 것이 어찌 나의 소관이란 말이냐!“
이런 전연 조정의 내막 형편을 알게 된 부수는 오왕 모용수에게 서신을 보내 상의했다.
“ 지금 이 기회를 타서 빼앗지 않으면
과거 오의 부차가 월왕 구천을 죽이지 않음에 따라
나중에 월왕 구천의 공격을 받아 용동에서 방축되어 자살하게 만든
용동의 한(甬東之恨)이 될까 걱정됩니다.“
모용수가 측근 황보진에게 이렇게 걱정했다.
“ 주군(모용위)이 어리고
태부 모용평은 용렬하기만 하니
어떻게 부견과 왕맹을 당해 내겠소?“
황보진이 이렇게 대꾸했다.
“ 우리가 그것(이 기회에 부견을 공격하자는 것)을 말한 들
듣지 않을 것이니
말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전연의 모용위와 모용평 조정은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이로부터 2년 뒤인 AD370년 전연은 부견의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하게 된다.
(68) 전연 귀족들의 부패와 충신 열관의 죽음(AD368)
전연의 왕공 귀족들은 직접 백성들을 음호, 즉 국가가 아니 왕공귀족 개인의 소유 가호로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나라 전체의 호구 수가 개인 가호보다 적었고 국가의 세수가 왕공귀족의 세수보다 적었다. 국가의 창고는 텅텅 비어가는 동안 왕공귀족의 재산은 폭발적으로 팽창되어갔다. 상서좌복야 열관이 나서서 맹렬히 상황을 비판하고 나섰다.
“ 지금 세 방면(동진, 전진, 전연)이 서로 솥처럼 각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가의 정치가 바로 서지 않고
호족과 귀족들이 방자하게 전횡하여 민호가 다 없어질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국가 세수가 없고 관리들 줄 봉록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투 병사들이 먹을 식량도 떨어지고
관리들이 먹을 음식과 옷을 스스로 장만할 지경입니다.
이웃하는 적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다가 아니니
늦기 전에 개인 소유의 민호를 서둘러 국가로 환입하십시오.“
전연의 주군 모용위가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열관에게 처리를 맡겼다. 열관이 간사하게 숨긴 것을 모두 들추어 국가민호가 20만호나 늘어나자 온 조정의 귀족계층들은 열관을 원망하고 화를 냈다. 열관에게는 지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직분에 충실하여 가호의 호적을 낱낱이 대조하다가 병이 도져서 그해 겨울에 죽었다.
(69) 동진의 전연 북벌(AD369)
동진 대사마 환온은 오래 전부터 북벌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북벌의 대상은 전진과전연이다. AD368년 3월 환온은 서여주자사 치음과 강주자사 환충과 예주자사 원진과 함께 전연을 토벌하게 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다. 치음은 원래부터 전쟁 따위에 참여하는 것이싫어서 자신의 휘하 부대를 모두 환온에게 맡기면서 다른 자리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환온은 즐거운 마음으로 요청을 수락하고 치음을 회계내사로 내보내고 자신이 서연주 이주 자사가 되었다.
환온은 보,기병 5만을 물길을 타고 이끌고 고숙(안휘성 당도, 장강의 마안산 남쪽)을 출발하여 연주, 즉 지금의 산동성 제녕 부근에서 북벌을 시작했다. 치초가 강물의 수위가 낮아서 조운이 원활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환온은 걱정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온군이 진격하고 나서 가뭄이 점차 심해지면서 강물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환온은 모호생을 시켜서 거야(산동성 거야)로부터 300 리 운하를 파서 말라빠진 변수에 물을 대도록 했다. 치초가 무리한 북진전략을 비판했다.
“ 수로의 배후가 적에 의해 막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라리 군대를 이끌고 수로가 아닌 육로로
전연 수도 업으로 바로 진격하면
그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 저절로 붕괴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나와서 싸운다 하더라도 전세는 금방 결단날 것입니다.
다만 공께서 이런 전략이 경솔한 것이어서
승산이 엷다고 생각하신다면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군사를 황하와 제수 사이에 머물게 하신다음
물자를 충분히 축적하고 나서
여름쯤에 병력을 발동하시면
비록 늦은 것 같아도 필시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계략을 버리고 계속하여 진군하신다면
속도도 빠르지 않을뿐더러 물러날 수도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도적들이 이런 형국을 이용하여 전투를 계속 지연시키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북쪽 지역은 곧바로 가을과 겨울이 와서
물길이 얼고 곡식이 다하며
가죽옷을 입어도 추위가 뼛속을 스며들 것이 두렵습니다.“
환온의 군대를 맞아 산동성 호륙(어태현)에서 녕동장군 모용충(忠)이 분전했으나 패하여 사로잡혔다. 모용위가 하비왕 모용려를 대도독으로 삼고 보기 5만 명을 보냈으나 황허(하남성 개봉 부근)에서 대파 당하였다. 고평태수 서번이 동진에게 항복했고 전연 장수 부안도 동진의 등하와 주서에게 연파 당하였다. 다급해진 전연 황제 모용위는 낙안왕 모용장에게 전군을 통괄하게 하고 환온에 대항했으나 그마저 격파 당하자 이제 남은 유일한 방법이 전진의 부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었다.
AD369년 7월 환온이 무양(산동성 신현) 주둔하자 주변의 인사들이 속속 동진 환온에게 투항해왔다.
(70) 도망갈 생각 밖에 없는 모용위와 모용평(AD369)
순식간에 황하 이남 회하 이북 영토가 무너지자 전연 황제 모용위와 최고 군사지도자 모용평은 두려운 마음에 화룡(용성, 즉 전연의 옛 수도, 지금의 조양)으로 달아날 생각부터 했다. 사실 황하가 뚫리면 수도 업(하북성 형태)까지는 지척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왕 모용수가 나아와 말했다.
“ 신이 청컨대 이들을 치게 해 주십시오.
만약 그리하고도 이기지 못한다면
그 때 달아나셔도 늦지 않으실 것입니다.“
황제 모용위가 낙안왕 몽요장 대신 모용수에게 사지절, 남토대도독의 직책을 주고 범양왕 모용덕의 5만 군사와 함께 환온을 막았다. 동시에 산기시랑 악숭을 전진에 보내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성공하면 호뢰관(하남성 형양 부근 사수진) 이서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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