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의 시대정신(zeitgeist) <3> 넷플릭스와 킴스비디오 :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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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는 원래 DVD 대여업체였다. 한 달에 19.9달러만 내면 빨간 봉투에 DVD를 담아 우편으로 배달해줬다. 반납은 같은 봉투에 담아 우편함에 넣으면 됐다. 반송해야만 다음 DVD를 보내주니 연체료 없이도 잘 굴러갔다. 사업을 시작한 1998년부터 약 52억 개의 DVD가 빨간 봉투를 타고 날아다니며 같은 숫자의 ‘무비나이트(영화의 밤)’를 밝혔다.
2007년 아이폰의 탄생과 함께 넷플릭스는 진화했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고 OTT 시대를 열었다. 이는 곧 DVD 시장의 몰락을 의미했다. 지난달 29일, 넷플릭스는 자신의 뿌리와 같은 DVD 우편 대여 서비스를 마감했다. 서비스의 종료를 알리며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DVD 증정 행사를 열었다. 마지막 우편은 ‘반송할 필요가 없는 대여’였다. 넷플릭스의 상징이었던 ‘빨간 봉투’는 이렇게 스스로가 만든 시대의 물결에 밀려 사라졌다.
넷플릭스의 공동 창업자인 마크 랜돌프는 말했다. “처음부터 우리는 DVD가 사라질 거란 걸, 일시적인 단계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DVD 서비스는 그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넷플릭스를 궤도에 진입시키고 25년 후 지구에 떨어진 이름 없는 부스터 로켓처럼 말이죠.”
넷플릭스가 이제는 쓸모없어진 부스터 로켓을 정리하는 동안, 지구 한구석에선 흩어진 로켓 부품들을 정성껏 주어 모으는 사람들이 있었다. 9월 27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킴스비디오’ 이야기다.
킴스비디오는 한국인 이민자 김용만씨가 1986년 뉴욕, 자신의 세탁소 한 구석에 연 비디오 대여점 이름이다. 군산에서 살던 어린 시절,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로 시작된 그의 영화 사랑은 팍팍한 이민 생활 속에 비디오테이프 수집으로 이어졌다. 거장들의 초기작, 영화제에서나 볼 수 있던 미개봉 신작, 언더그라운드 감독과 학생들이 만든 필름까지, 그는 전투하듯 비디오테이프를 모았다. 뤼미에르 형제보다 앞서는 에디슨의 1893년 영화도 갖고 있다.
55,000편의 희귀 컬렉션이 입소문을 타면서 킴스비디오는 시네필의 성지가 된다. 마틴 스코세이지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드나들고 코엔 형제가 600달러를 연체하던 영화인의 보물창고였다. ‘조커’의 토드 필립스와 ‘와호장룡’의 이안 감독도 이곳에서 꿈을 키웠다. 전성기에는 11개 지점, 300명의 직원을 두고 25만 명의 회원을 보유할 만큼 번성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거센 파도를 견뎌내지 못했다. 2008년 폐업을 결정했다.
그 많던 비디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영화는 이곳의 단골이던 데이빗 레드몬과 애슐리 사빈, 두 감독이 그 행방을 쫓는 여정을 담았다. 사라진 비디오들의 도착지는 뜻밖에도 시칠리아의 소도시 살레미다. 2009년 살레미는 모든 비디오테이프의 디지털 변환과 공공 개방을 약속하고 ‘킴’의 컬렉션을 기증받았다. 하지만 두 감독이 마주한 건 곰팡이 핀 창고에 방치된 채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비디오들이다.
이제 킴스비디오가 키운 영화광들의 비디오 해방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이들이 앨프리드 히치콕, 장 뤽 고다르 등의 가면을 쓰고 비디오를 구출하는(훔치는) 장면은 기이하면서도 아름답다. 한때 우리가 열렬히 사랑했던 무언가(꼭 영화가 아니어도 좋다)에 대한 절절한 추억을 소환하고 열정에 불을 지핀다. 좌충우돌 소동의 끝은 다행히 해피엔딩이다. 돌아온 킴스비디오는 지난해 뉴욕 알라모 드래프트 하우스 극장에 다시 문을 열었다. 시칠리아 살레미도 ‘영화를 통한 도시 부흥’이라는 원래 취지를 되찾았다. 지난해부터 매년 여름 ‘시네킴 영화제’를 개최한다. 예전 것을 밀어내는 시대의 위력만 드센 줄 알았는데 그를 소환하고 지켜내는 사람의 힘도 만만치 않다.
1980년대는 버글스의 노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로 시작했다. TV와 뮤직비디오 등 영상매체 때문에 구세대의 유물로 사장되어가는 라디오를 향한 송사였다. 영화 ‘킴스비디오’는 21세기 디지털에 밀려 사라지고 잊혀지는 아날로그에 대한 헌사다.
10월 초 울산대는 도서관 장서의 절반에 가까운 45만 권 폐기를 추진 중이라고 했다. 전자책 시대에 맞춰 미래 교육에 투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폐기 대상에는 19세기 찰스 매케이와 존 러스킨 저서의 초판본, 1900년대 초 해외잡지와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출판된 잡지의 영인본 등 희귀 목록이 포함됐다. 울산대만의 일이 아니다. 전국 대학도서관이 폐기한 책은 지난해에만 206만 권에 이른다.
40년 전 만들어진 영화 ‘블레이드 러너’ 속 미래 지구는 행성 간 비행체가 오가고 인간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가 돌아다니지만, 추적추적 비 오는 날 포장마차 우동도 공존한다. 오래전 이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첨단 미래 도시에 있는 포장마차가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감독의 혜안에 감탄한다. 리들리 스콧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라는 게 단순히 선형적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전자책을 읽는 사람과 버려진 비디오테이프를 끌어모으고 지직거리는 레코드 소리를 즐기며 대학도서관의 폐기 도서 목록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이 양립 가능하다는 걸. 매번 버려야지 하면서 버리지 못한 전자사전과 MP3와 피처폰이 서랍에 있다. 서랍에 담긴 건 물건이 아니라 지나온 내 삶의 이야기다. 서랍 정리는 또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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