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42>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IV)제1차 파저강 전투 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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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3 제 1차 파저강 전투
[전쟁준비와 전쟁포고문]
세종은 파저강 토벌에 필요한 사항을 일일이 챙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병사의 갑옷부터 챙겼다. 병조가 요구한 갑옷 등 병장잡물의 수량이 충분히 준비되었는지부터 물었다. 황희는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하경복은 갑옷이 좀 모자라므로 요구한 1525벌의 1/3을 줄이자고 했다. 세종은 마병과 보병의 숫자는 얼마가 좋겠냐고 물었다. 동지돈녕부사 조뇌는 마병 1천과 보병 2천을 말했으나, 하경복, 이순몽, 정흠지 등은 마병 보병 각 1천을 추천했다. 권진은 마병과 보병 합하여 3천으로 하되 구체적 숫자는 최고 장군이 그 시기에 정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군사를 모두 평안도에서 조달할 것인가 다른 도에서도 조달할 것인가를 물었다. 평안도에서만 3천을 조달하자는 안에 황희, 하경복, 이순몽, 조뇌가 동의했고 평안도 2천 5백, 황해도 5백안에는 정연, 황보인, 최해산 등이 찬성했다. 최사강과 정흠지는 황해도 차출병력은 각각 6백과 4백으로 하자고 했다. 가장 중요한 지휘 장군의 선발문제를 세종이 꺼냈다.
“중군 좌우위군의 장을 누구로 하는 것이 좋은가.
(中軍左右君主將 誰可者 : 세종 15년 2월 21일)”
모두 최윤덕을 주군으로 삼고, 좌군은 이순몽, 그리고 우군을 최해산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세종은 좋다고 했다. 그러나 도승지 안숭선이 말하기를 이순몽이 자기는 좌군보다는 중군 최윤덕 밑에서 정예병 5,6백으로 선봉장이 되어 싸우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좌군에는 최해산을 지명하고 강계절제사 이각과 호조참의 김효성을 우군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삼 의정을 조용히 불렀다. 권진은 이미 정한대로 하자고 했고 황희와 맹사성은 이순몽 요청대로 중군 상장에 최윤덕을 임명하고 이순몽을 부장으로 하며 좌군에 최해산 그리고 우군에 이각을 임명하자고 했다. 세종은 황희 맹사성의 의견을 좇았다.
그리고 최윤덕에게 보내는 임금의 특명을 좌군장군 최해산편에 보내었다.:
i) 파저강 도적들의 흉악한 범죄를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명
황제께 이미 주달하였으므로 기다리자고 하나 본국이 허물진 일이
없으며 혹, 힐난하더라도 사유와 정황을 갖추어 알리고 ‘쳐들어오면
공격하라.’는 예전 태종황제 성지를 따른 토벌이므로 윤허할 것이다.
토벌군은 3천이며 평안도에서 2천 5백 그리고 5백은 황해도에서 낸다.
ii) 강이 깊은 곳에 부교를 2-3개 만들되 떠들지 말고 은밀히 만들라.
iii) 군사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내왕하는 백성의 왕래를 엄격히 통제하라.
iv) 몰래 사람을 보내 마을의 크고 작음과 산천의 험한 여부를 정탐하고
토벌할 기한을 정하고 장병과 편비를 마련하라.
v) 보졸의 투구와 갑옷은 도내의 쓰던 것을 마련하라.
vi) 부교를 만들 때에는 동네 장정을 쓰지 말고 고을의 선군을 써라.
vii) 대군이 지난 뒤 혹은 몰래 나타나 길을 끊으면 곤란하므로 군사를
나누어 굳게 지켜서 변고에 대비케 하라.
[전략회의(세종 15년 2월 26일 - 4월 5일)]
세종 15년 1월 19일 토벌을 하기로 결정하고, 2월 15일에는 대신들의 전쟁에 대한 의견과 전략을 점검하고, 2월 21일에는 중군과 좌우군의 책임자를 결정한 세종은 닷새 뒤 2월 26일, 또 대신들을 불러 의논을 하였다.
<부교설치의 문제>
먼저 병사가 강을 건널 부교를 언제 건설하는 것이 좋은 지를 물었다. 미리 만들어 두자는 안과 건너기 직전에 임박하여 서둘러 만들자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미리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의견은 조만간 날이 따뜻해지면 얼음이 풀릴 것이므로 부교설치가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표.2-4] 부교 설치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조사
미리 설치 |
도강 직전 설치 |
정연 : 해빙 전 설치가 용이 신상 : 이미 지시했으므로 |
황보인 : 비밀유지 황희 : 비밀유지 권진 : 비밀유지 하경복 : 비밀유지 최사강 : 비밀유지 * 정흠지 : 사전 준비 후 직전 설치
|
(자료) <세종실록>, 세종 15년 2월 26일
그러나 대다수 대신들은 도강 직전에 임박하여 부교를 놓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부교를 놓는 것을 보면 토벌이 임박했다는 것을 뻔히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들은 세종은 미리 보낸 최산해 장군에게 급히 전갈을 보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부교를 만들라고 명을 이미 내렸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유도 없이
벌목을 하게 되면 인심이 요동하고 저쪽에서 반드시 알아차릴 것이니
크게 우려가 된다. 이제 경을 성책순심사로 삼을 것이니 목책을 새로
만들 기초를 택정하는 것으로 위장하여 강변을 순찰하면서 몰래 생각 하고 은밀히 고려하여 군사들이 도달하거든 신속히 건설하라.
(命造浮橋 今更思之 無名伐材 則人心浮動 彼必知之 是大可慮
今以卿爲 城柵巡審使 托以擇定新設木柵之基 巡審江邊 潛思密慮
以待軍士至之 急造浮橋 : 세종 15년 2월 26일)”
<다른 지역 방어문제>
대신들의 의견 중에 세종이 주목했던 부분은 토벌공격을 진행하는 동안 다른 지역 수비를 어떻게 강화할 것이냐는 문제였다. 세종이 걱정되어 물었다.
“권두와 동맹가첩목아가 같이 공모한 정실이 이미 잘 드러났다. 이번에
서쪽에서 공격하면 저쪽이 불리하므로 병사를 일으켜 도와주지 않
겠는가. 혹시 도와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쪽형세가 급박하면 서인들이
동쪽으로 와서는 허술한 곳을 틈타 침입할 것이므로 간사한 꾀를 예측
하기 어렵다. 아예 양 쪽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은 어떤가.
(權豆及童猛哥帖木兒 同謀情實其著 今加兵於西 則彼必自知其非
而擧兵來助 儻不來助 若勢迫於西 則西人歸東 乘虛入侵 詭謀難測
予欲東西幷擧 何如 : 세종 15년 2월 27일)”
황보인과 유맹문은 먼저 서쪽(평안도)을 토벌한 후에 형세를 봐서 천천히 동쪽을 치는 것이 옳다고 대답했다. 맹사성, 권진, 최사강 등도 먼저 파저강을 친 뒤에 동쪽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황희와 허조 등은 아예 동쪽을 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올량합을 토벌하는 것도 명백한 범죄 행각의 물증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심증을 갖고서 일으키는 것인데, 동맹가첩목아와 파저강 올량합의 연대관계 또한 심증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더 온당치 않다는 말이었다. 세종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특별히 경들의 생각을 시험해 볼 참이었다.
(予意亦然 特試卿等耳 : 세종 15년 2월 27일)”
[표.2-5] 동쪽과 서쪽 동시공격에 대한 대신들 의견
먼저 서쪽 후 동쪽
|
서 쪽 만
|
황보인 유맹문 맹사성 권 진 최사강 조 뇌 심도원 김익정 권 도 정 연 (10명) |
황 희 허 조 하경복 안 순 노 한 이순몽 조계생 정흠지 (8명) |
(자료) <세종실록>, 세종 15년 2월 27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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