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39>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IV) 제 1차 파저강 전투 ②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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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가첩목아의 회귀]
약 10년 전 무리를 이끌고 개원방면으로 이동했던 동맹가첩목아는 세종대에 와서는 많은 무리를 끌고 돌아와 곡식을 청구하면서 알목하(또는 아목하, 회령진)으로 다시 들어오고자 하였다. 먼저 동맹가첩목아와 그의 어머니 형제와 핵심 부하 양목답올이 알목하로 들어왔다(세종 5년 6월 27일-7월 11일). 이 때 양목답올은 황제의 허락을 받고 왔다고 거짓 들먹이며 관리들을 기망했다. 세종은 즉시 명나라에 그 사실을 보고하고 대책을 물었다. 명은 바로 양목답올에게 보내는 칙서를 내렸다. 순순히 원래 지역으로 돌아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짓 황명을 들먹인 죄를 엄중히 응징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세종 6년 1월 17일). 명은 지휘 김성과 관군 150명을 동맹가첩목아에게 보내 양목답올을 응징하도록 하였다. 김성의 군대가 동맹가첩목아의 거처에 도달했을 때 양목답올을 찾을 수가 없었다(세종 6년 8월 16일). 일 년 이상을 그 지역에 머물렀으나 종내 양목답올은 귀순하지 않았다(세종 7년 윤7월 1일).
세종 8년 7월 21일에 양목답올의 아우 양만피가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사람을 보내 요구했다. 양목답올이 데리고 온 사람 50여명이 다 조선으로 도망갔으니 돌려보내라는 것이다(세종 8년 6월 17일). 그러나 그 사람들은 원래가 포로로 잡혀 있었던 사람들이라 장차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도망 나온 것이므로 양목답올에게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한참동안 조선 조정은 양목답홀을 제외한 동맹가첩목아 일당들과 큰 탈 없이 우호관계를 유지해 갔다. 동맹가첩목아는 조선 조정에 세종을 알현하고자 했고(세종 11년 9월 24일), 양 쪽에서 서로 물자교류를 하였다. 그러던 중에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피살되었다(세종 15년 10월). 명나라 지휘 배준이 양목답올에게 포로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8월 알목하에 도착하여 작전을 수행하던 중 양목답올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아 작전을 도와주던 동맹가첩목아와 아들 등 모든 남자가 살육당한 것이다. 이 때 동맹가첩목아의 동생 범찰은 첩과 딸을 빼앗겼지만 본인은 부상만 당하고 살아남았다.
[올량합(兀良哈 또는 오랑합(吾郞哈))의 습격]
올량합은 태조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과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알타리와 함께 와서 왕이 된 것을 축하하였고 꾸준히 토산품을 보내고 또 답례품을 받아갔었다. 물론 크고 작은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종 2년 5월에 경원 만호 이청이 올량합에 의해 살해되었고 태종 2년 11월에도 공격을 받아 은주지사 이천우가 크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올량합과의 가장 큰 충돌은 태종 10년에 일어났다. 경인년의 변이었다. 그리고 태종은 반격을 명하였고 조연의 성과와 곽승우의 패전결과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다. 태종은 공격의 정당성을 구하기 위해 먼저 명나라에 소상히 상황 설명을 하였다(태종 10년 4월 28일). 명은 진헌사로 간 한상경을 통하여 요동군과 조선군이 협력하여 올량합을 토멸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태종 10년 9월 3일). 동맹가첩목아가 두만강 유역에서 올량합의 원거주지 봉주(奉州,지금의 開元)으로 이주해 갔고 예전과 같이 올량합은 토산물과 사람을 보내오고 조선은 옷과 가죽신 또는 이불과 베개 등을 줘 보냈다. 한 동안 조선과 올량합의 관계는 잠잠해졌다.
세종 때에 들어와서도 올량합과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토산물을 보내오고 또 답례품을 보내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일이었다. 세종 4년 10월 올량합 200여기가 경원부를 침략해 들어왔다. 즉각 퇴치는 하였으나 세종은 의정대신 전부와 육조 판서 및 참판 이상의 대신 전부를 소집했다. 야인을 막을 계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모두 다들 말했다. 별것 아니므로 각 도의 군사로 충분할 것이며 특별히 군사를 동원할 것 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전쟁의 승부는 한 사람의 용맹, 비겁에 달려있다.
(戰之勝負 係一人勇怯 : 세종 4년 10월 8일)”
라고 말하며 상호군 김효성을 함길도 조전첨절제사로 임명하였다.
“너는 그 도의 병마 2백기를 이끌고 가서 대기하고 있으라. 만약 적도
들이 숨어서 나오지 않으면 너는 돌아와도 좋으나 지휘군관은 그 도에
머물러 휴양하게 하여서 내년 봄 방위임무에 대기하도록 하라.
(汝率其道兵馬二百以去 以待事變 若賊遠遁不來 則汝可還京
留率領軍官傳掌於本道休養 以待來春赴防 : 세종 4년 10월 8일)”
그리고는 다른 한편으로 올량합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너희들이 예로부터 성심껏 귀순하여 국가의 대우가 극히 후했는데
이번에 은덕을 배반하고 은혜를 저버려 변경을 침범함은 무엇이냐.
변장이 무휼의 뜻을 저버리고 대우를 박하게 했다면 너희가 즉시 알려
제대로 처치할 도리가 있었거늘 어찌 변경을 범하느냐. 만약 개전을 하
지 않으면 장차 장군에게 명하여 토벌할 것이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라.
(汝等自古誠心歸順 故國家待之極厚 今背德辜恩 再犯邊境何也
如有邊將不遵撫恤之意 待之薄者 汝等隨卽申聞 自有處置 何至犯邊乎
如其不悛 將命將征討 宜審思之 : 세종 4년 10월 8일)”
[올량합 이만주의 재 침범]
얼마 되지 않아 올량합 4백여 명이 또 침입했다. 이번에는 평안도 압록강변의 여연 쪽이었다. 세종은 세 의정을 불러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성벽을 닫고 굳게 지키는 쪽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를 뽑아 강계도호부에 배속시켜 돌아가며 방어케 하고 평안도 도절제사는 멀리 있기 때문에 신속한 대응을 위해서는 강계절제사에게 모든 권한을 맡게 하자는 것이다. 세종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만주 동북쪽에 웅거하던 달단(韃靼)군이 여진족 본거지 봉주(奉州)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자(세종 4-5년, 1422-23년), 이곳에 거주하던 올량합여진은 명나라의 허가를 받아 이만주 지휘아래 대거 남쪽 파저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다(세종 5년, 1423). 이들 올량합여진 집단은 쌀, 장, 소금 등 양식이 모자란다는 이유를 들어 변경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이때부터 올량합 여진의 정보를 염탐하는 영리한 사람 3-4명을 풀어 내보냈고 아울러 강변의 각 마을에 수비방어를 철저히 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올량합 접촉원칙을 정했다(세종 6년 4월 27일).
(i) 만약 올량합 등이 강을 건너고자 하면 추장만 허락하라.
(ii) 양식 등을 청하면 창고가 없어 줄 수 없고, 다만 군사 양식을 조금씩
떼어 길가는 데 보태주도록 하라.
(iii) 매매하기를 원하거든 이곳은 방어하는 곳이므로 물자가 없다고 하라.
(iv) 서울에 가 임금을 만나 뵙고자 하거든 너희는 중국백성이므로 황제의
성지가 없으면 개인적으로 뵙기 어렵다고 하라.
그 이후 올량합 무리들은 간간히 국경에 나타나 구걸하기도 하고 또 절제사를 만나겠다거나 혹은 잃어버린 노예를 찾겠다고 요구하기도하며 변경에 출몰했다. 특히 올량합여진 최고 추장인 이만주는 잃어버린 자기 노비 10명이조선의 예빈시 사환으로 있다고 들었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면서 분함을 나타내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세종 10년 2월 25일). 이것은 언젠가는 이만주 일당의 내침을 암시하는 정보였다. 올량합의 동태가 수상한 이 때 또 다른 불리한 정보가 입수되었다. 태종 때 멀리 봉주로 갔던 동맹가첩목아 무리들이 세종대에 다시 두만강 아목하(회령)지역으로 돌아왔는데 들리는 말로는 16년 전 경인년(1410)에 뺏긴 노비들과 재물들을 다시 돌려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두만강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맹가첩목아의 알타리여진과 이만주의 압록강 올량합여진이 모두 조선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내고있는 게 분명했다. 세종은 허조 등을 불러 물었다.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이 급보를 올려왔다. “올량합 3백 여기가 도망간
사람과 빼앗긴 소와 말을 찾고자 혐진 올적합과 함께 쳐들어와 접전을 벌였다. 아군방어진은 군졸 수도 적어 의당 증원하여 불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咸吉道都節制使河敬復馳啓報:兀良哈三百餘騎 爲尋逃人及被奪牛馬
與嫌眞兀狄哈 接戰 我國防禦之地 戌卒數少 宜加軍卒 以備不虞
其將何以 : 세종 13년 10월 14일)”
의정부 찬성 허조의 생각은 조정에서는 현장의 일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으니 일단 조관을 보내어 알아보고 또 현장의 장수들은 임기응변하여 대응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영의정 황희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보정을 함길도로 보내는 세종의 생각은 훨씬 치밀했다.
“먼 곳 요새에 갑자기 조관을 보내면 자칫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지 않을까 두렵다. 연회를 위해 사신이 간다고 칭하고 다른 아무도
모르게 하라.
(遐方邊塞 遽遣朝官 恐或駭人耳目 其稱爲宴 使臣以去
毋令外人之知 : 세종 13년 10월 14일)”
지금 변방의 여진무리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은 확실하다. 무언가 행동으로 옮기기를 그들은 계획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도 이쪽 상황을 호시탐탐 노리며 엿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움직임을 그들이 모르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신하들은 ‘사람을 보내어 현장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현장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르게 하는 것’이라고 세종은 생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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