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38>국토를 제대로 지켜라.(IV) 제 1차 파저강 전투 ①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9월23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0

본문

IV.1 여진(女眞)

 

압록강 이북 만주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여진족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불렀다. 한 부류는 중국의 흑룡강성 지역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로서 이들을 ‘해서여진(海西女眞)’이라 불렀고, 압록강 유역의 북쪽에 살고 있는 여진을 ‘건주여진(建州女眞)’이라 불렀다. 그리고 만주 최북단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여진을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통칭하였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지역에 따른 개략적인 분류로서 이들 여진족 안에는 다양한 여진 부족들이 내포되어 있다. 조선조 세종 때 조선과 가장 밀접하게 접촉했던 여진족은 건주여진으로, 여기에는 압록강 중류 지역에 몰려있던 올량합(兀良哈 또는 오랑합(吾郞哈))과 두만강 하류유역의 알타리(斡朶里 혹은 오도리(吾都里)) 그리고 올적합(兀狄哈)의 세 종족이다. 

 

이들 건주여진족의 원거주지는 중국 목단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지역 일대, 지금의 의란(依蘭)현 부근이다. 이곳에는 할아족(올량합)과 알타리족과 탁온족의 세 여진족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들이 남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들 중 하나인 할아족의 이름은 화아아(火兒阿,Harha)라고 불렸던 목단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목단강은 호리개(胡里改)강이라고도 불렸으므로 할아족은 호리개족과 같다. 그리고 호리개라는 말이 올량합이라는 말의 근원이므로 할아족은 올량합이라는 설이 있다. 이 올량합은 압록강 중류 유역인 파저강 주위로 내려 왔고 알타리는 두만강지역으로 남하했다. 파저강은 지금의 훈강(또는 동가강)으로 평안도 초산 건너편에 있다.   

       

[알타리와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명나라가 건국하면서 압록강 이북 만주지역을 포함하는 요동지역을 총괄하기 위하여 주요 요충지에 위(衛)와 소(所)를 설립하고 그 지역 토착 여진인을 위나 소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위나 소는 명의 통제를 사실상 받지 않은 독립적 자치정부에 가까웠다. 이들 여진족 지방 세력들은 명나라는 물론 조선과도 서로 교역하면서 여진족끼리 서로 대립하고 화해하는 상황을 지속하였다.

 

<조선 북방의 여진족>

  o 압록강 유역  : 올량합(兀良哈 또는 오랑합(吾郞哈)) - 아합출,이만주

  o 두만강 유역  : 알타리(斡朶里·오도리(吾都里)) -동맹가첩목아,동창,범찰  

  o 만주산림지역 : 올적합(兀狄哈) 

 

이 중에서도 건주위의 최고책임자(도지휘사)로 임명받은 올량합 여진의 지도자 아합출(阿哈出 또는 어허출(於虛出))은 자기 딸이 명나라 영락제 제 3부인이 되는 배경을 바탕으로 그 일대를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있었다. 반면 동맹가첩목아가 주도하는 두만강 일대의 알타리 여진은 왜구 퇴치의 공이 있어 조선으로부터 알타리 만호부(萬戶府)라는 일종의 자치구역을 얻고 도만호(都萬戶)라는 관직까지 부여 받아 그 지역 일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명은 조선이 알타리족과 연대하여 만주 이북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우려하여 알타리족 추장 동맹가첩목아를 회유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명나라로 와서 입조하면 응분의 포상이 있을 것이라고 유혹했다. 동맹가첩목아에게 보내는 명나라 칙서의 내용이다.

 

   “네가 친히 내조하여 명분과 상을 받고 영을 내려 군사와 백성을

    편히 다스리도록 하며 사냥과 목축을 생활에 편리하도록 할 것이다.

    나머지 두목들 중에서 명분에 합당한 자가 있으면 같이 와도 좋다.     

    (爾可親自來朝 與爾名分賞賜 令爾撫安軍民 打圍放牧 從便生理 

    其餘頭目人等 合與名分者 可與同來 : 태종 5년 3월 11일)”

 

명은 동시에 태종에게도 칙서를 보내어 조선 사신이 명나라 사신을 동행하여 동맹가첩목아에게 가도록 부탁했다. 태종은 동맹가첩목아가 명나라 쪽에 붙으면 두만강 하류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태종은 동맹가첩목아에게 즉시 사람을 보냈다. 동맹가첩목아에게 명나라 사신의 말을 듣지 말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태종 5년 3월 14일). 약 20여일 뒤 4월 8일에 명나라 사신 왕교화적은 길주에 이르러 동맹가첩목아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동맹가첩목아는 조선을 섬긴지 이미 20년이므로 명과 교류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동맹가첩목아의 부하인 천호(千戶) 파아손, 착화, 아란 등도 함께 조선을 섬기기로 맹세했다.

 

   “원래의 마음을 변치 않고 조선을 섬기며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不變素志 仰事朝鮮無貳心 : 태종 5년 4월 20일)”    

 

그러던 동맹가첩목아 일당들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태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신 왕교화적의 회유에 넘어간 동맹가첩목아는 명나라가 보내는 칙서와 채단을 받은 것이다(태종 5년 5월 2일). 그리고 곧 명나라로 갈 것 같았다. 태종은 급히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공험진 이남 땅에 대한 조선의 영유권을 상기시켰다. 이 지방은 우리 땅임을 명에게 상기시킴으로서 우회적으로나마 명이 직접 여진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지 않기를 바랐다. 명은 태종의 이런 시도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명이 동맹가첩목아를 보자고 한 것은 명 황제와 친척(황후의 인척)이기 때문인데 왜 조선이 방해를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동맹가첩목아와 관련된 일을 해명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명은 “동맹가첩목아를 왜 안 보내느냐?”, “동맹가첩목아를 막는 이유가 뭐냐?”라고 다그치고 있다고 전해왔다(태종 5년 9월 18일 및 6년 1월 6일). 드디어 9월 3일 동맹가첩목아가 북경을 향해 떠났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태종은 급히 경차관 조흡을 동북면으로 보내 동맹가첩목아의 북경행을 돕도록 하였다. 명은 동맹가첩목아에게 건주위 도지휘사라는 직책을 내렸고 같이 간 김아합출(또는 金於虛出)의 아들 김시가노에게는 지휘사의 직을 주었다. 동맹가첩목아와 그 부하들은 조선에 선물을 보내었고 조선도 그들에게 선물을 보내어 양 측의 관계는 이후 약 4년 간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경인년의 변 : 태종 10년 2월-5월, 1410]

 

태종 10년(1410)에 동북방면의 평화가 깨어졌다. 아합출의 올량합과 동맹가첩목아의 알타리에 이어 제3의 여진부류인 올적합 집단들이 경원부에 침입하여 도둑질을 해 갔다는 첩보를 천호 파아손과 착화가 전해 주었다. 침략한 올적합 도적을 소탕하러 나선 경원부 병마사 한흥보가 올적합과 올량합의 함정과 협공에 말려들어 병마사 본인과 군사 1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2월 4일 터졌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태종은 북벌을 명령했고(태종 10년 2월 10일), 전장으로 나가는 군사를 위로하기 위해 중군, 호군, 전흥을 보내었다(3월 1일). 길주도 찰리사 조연은 2월 29일 군마 1150명을 이끌고 출발하여 3월 6일 회령에 도착했다. 그 지역 상황을 보니 올적합과 올량합이 서로 내통하여 국경을 노략질하고 있었으며 동맹가첩목아와 그 아래 수하들도 모두 겉으로는 조선을 돕는다고 하나 사실은 도적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조연은 3일 간의 군사작전을 통해 천호 파아손, 착화, 아고거 및 하을주 등 두목 네 명과 군사 160명을 죽이고 수십명의 포로를 잡아 들였다. 

 

태종은 이 승전보를 듣고 걱정이 앞섰다. 조연이 죽인 파아손과 아고거는 바로 황제가 직책을 내린 명나라 관원이기 때문에 명의 비위를 건드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태종은 즉시 명나라에 해명서를 보냈다. 그 사건은 적의 함정과 매복에 의한 침범에 대한 자위적 조치였다는 점을 적극 해명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짓을 항시 하는 족속들이니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려 주기를 요청했다(태종 10년 3월 25일). 

 

태종은 은밀히 동맹가첩목아를 어떻게 무마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번 사건으로 동맹가첩목아는 심복 아란의 두 손자가 죽어 복수를 공언하고 있었다. 화해전략도 소용없었다. 동맹가첩목아가 반격해 들어왔다. 동맹가첩목아의 동생 어허리와 알타리족 구로보야가 무리 150 여명과 함께 경원쪽으로 쳐들어왔고 이어 경성등지에도 수차례 침입하여 그 일대가 전화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4월 11일에는 아오지 쪽에서도 적군이 나타나 병마사 곽승우가 이를 응전하다가 매복에 걸려 본인도 부상하고 전사자 73명에 부상자 52명이 발생하는 큰 패전을 당하였다(태종 10년 4월 5일). 그리고 5월에는 올량합이 용성을 공략하여 봉졸 3명과 척후병 3명 그리고 남녀 24명이 살해되고 69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던 중에 동맹가첩목아가 화해를 청해왔다. 5월 1일 사람을 보내 변명하기를,

 

   (i) 찰리사 조연이 한흥보 피습의 첩보를 받고 올적합 김문내와 갈다개를

     공격하러 가다가 도중의 모련위를 공격해 모련위 사람들이 억울하게   

     많이 죽었고,

 

   (ii) 모련위 피해자 가족들이 나더러 조선을 복수하지 않으면 나는 조선과

      한 통속이 분명하다고 하고 있으며,

 

   (iii) 모련위 사람들이 아오지 쪽으로 피신하기에 그들을 따라 가다가

     우연히 곽승우의 군대를 만나 서로 화해시키려고 하던 중에 교전이

     일어나 우연하게 사상자가 많이 나게 되었다는 변명이었다.  

 

태종은 동맹가첩목아의 설명을 믿지 않았다. 급히 군사를 비밀리에 경원(경흥)으로 보내어 선조의 능실을 혹 침범하지 않았을까 확인토록 하였다. 무언가 확실한 응징을 하기 이전에는 화해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맹가첩목아는 곰 가죽과 사슴 가죽을 보내며 끈질기게 화해의 신호를 보내왔다. 태종은 대호군 박미를 보내 포로들과 잡아 간 말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박미는 돌아와서 그 지역 사람들이 곡식이 떨어져 거의 굶어 죽을 상태라고 전했다. 그리고 곡식을 보내 주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모두 도적이 될 것이라는 동맹가첩목아의 말도 전했다. 결국 쌀 150석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곧 이어 동맹가첩목아는 아오지와 경원 부근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요령성 남부지역인 개원으로 옮겨갔다(태종 11년 4월 26일). 

 <계속>

 

785bdc2d2067aaa49aa80327da61e014_1659771
785bdc2d2067aaa49aa80327da61e014_1659771
785bdc2d2067aaa49aa80327da61e014_1659771
785bdc2d2067aaa49aa80327da61e014_1659771

 

 

0
  • 기사입력 2022년09월23일 17시10분
  • 검색어 태그 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