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8 : 작은 아버지의 유업을 못지킨 남연의 모용초(I)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6월24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0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43) 모용수의 제남일대 장악

모용수는 남쪽 땅을 경략할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었다. AD386년 8월에는 태자 모용보에게 수도 중산을 맡기고 동생 모용덕과 모든 다른 아들을 대동하여 남쪽으로 진군했다. 조왕 모용린은 남쪽 방면, 고양왕 모용륭은 동쪽으로 보냈다. AD387년 정월 황하 주변을 시찰하던 모용수에게 고양왕 모용륭이 황하를 건너 공략할 것을 제안하자 모용수가 받아들였다.  

정월 21일 난한과 평유를 보내 확오(산동성 사평현) 부근에서 황하를 건너게 하고 모용륭은 전군을 모아 황하강둑 북변에 진을 치고 대기했다. 그쪽을 지키던 동진의 온상과 부하 수비대들이 혼비백산 도주하면서 모용수는 연주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아들 태원왕 모용해에게 연주자사를 주어 동아(산동성 양곡현 동북)지키게 하였다.  


(44) 부견의 환관 광조를 모용수가 등용(AD387)

전진의 부견에게는 광조라는 충직한 내시가 있었다. 모용수와 부견은 장안에 같이 있을 때 자주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부견에게 광조가 이렇게 물었다.

“ 폐하께서는 아직도 모용수를 많이 의심하시는지요?
  그는 아무래도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견은 그 말을 모용수에게 알려줬다. 광조라는 사람조차도 모용수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다는 호의로 모용수에게 전한 것이다. 한참 뒤 모용수가 독립하고 업을 포위하며 공격할 때 광조는 빠져나와 동진으로 갔고 광조는 동진 조정에서 하북지방 태수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하북지방이 모용수의 영토로 들어오게 되자 광조 또한 모용수에게 사로잡혔다. 모용수는 부견의 은혜가 생각나 눈물을 흘리며 광조 등을 용서해 주었다.
“ 그대들을 모두 용서한다. 
  전진왕(부견)이 나를 깊이 대해줬고
  나 또한 그를 마음깊이 섬겼으나
  두 공(부비와 부휘)가 질투하고 시기하여 내가 뛰쳐나온 것이다.
  전진왕을 생각할 때마다 한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모용수는 슬픔에 빠진 광조에게 금과 비단으로 후하게 선물을 내렸으나 광조는 받지 않았다. 모용수가 이렇게 물었다.

“경은 아직 나를 의심하는가?”

광조가 대답했다.

“ 신은 오로지 주군에게 충실해야 함만을 알고 살아왔습니다.
  폐하께서 지금까지도 부견황제를 마음속에 품고 계신 줄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신은 어찌 감히 죽음에서 도망칠 수가 있겠습니까.“ 

모용수가 이렇게 말했다.

“ 이것이야말로 경의 충성이요 진실로 내가 요구하는 것이다.
  앞서 의심하느냐고 물은 것은 농담이었다.“

모용수는 광조를 더욱 두터이 여겨 중상시라는 자리에 앉혔다. 


(45) 모용수가 청주, 연주, 서주를 장악(AD387)

제섭이라는 사람이 8천여 무리를 이끌고 신책(하북성 청하부근)이라는 곳을 장악하고서는 후연에 투항하자 모용수는 그를 위군태수(하북성 임장현)로 임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섭이 장원이라는 사람과 연합하여 후연에 등을 돌리고 배반했다. 장원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축아(산동성 우성현)에 주둔하면서 변방 이민족의 하나인 정령족 우두머리 적요를 불러서 서로 연대를 꾀했다. 고양왕 모용륭이 주군 모용수에게 말했다.

 “ 신책이라는 곳은 매우 험하여 갑자기 뽑아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오랫동안 포위한다면
   장원이 유랑민들을 규합하고
   적요 또한 정령무리들을 부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걱정거리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장원 무리를 공략해야 합니다.
   저들은 먼 길을 걸어왔고 또한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어서 
   우리가 먼저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않고 덤벼 들것입니다.  
   일단 장원무리들만 격파하면 
   제섭 일당들은 싸움거리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모용수는 모용륭의 전략을 전폭으로 지지하고 수용했다. 2월 모용덕, 모용소, 장숭에게 2만 기병을 주어 모용륭과 함께 장원을 치게 했다. 장원군대는 모용덕의 대 부대가 이동중 잠시 쉬고 있는 틈을 타서 습격해 들어왔는데 모용덕의군대가 놀라서 급히 퇴각했지만 모용륭은 이미 그것을 예견하고 있었으므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장원이 아들 장귀를 보냈지만 모용륭의 부장 왕말이 장귀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46) 모용덕의 뛰어난 조카 모용륭

모용륭의 부대가 장원의 습격을 훌륭히 방어하는 동안 피했던 모용덕의 대군이 다시 합류했다. 모용덕은 잠시 공격을 늦추자고 제안했지만 모용륭은 거부했다.

 “ 기대하지 못할 때에 습격을 하고도 장원이 이기지 못한 이유는 
   급박한 상황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각오가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들은 매우 낙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싸우자는 사람과 우리의 병력이 너무 강하므로 
   피하자는 생각들로 복잡할 것입니다.         
   이 때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조카지만 지략이 뛰어난 것에 놀란 모용덕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오직 경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할 뿐입니다.”

모용륭의 부대는 적 7천8백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장원은 도망가서 숨었다. 후연의 군사가 역성(산동성 제남)을 공략하자 주변의 모든 성이 투항하고 사람들이 복속해 들어왔다. 이로써 후연은 청주는 물론 서주, 연주지역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모용수는 모용소를 역성에 주둔하게 하고 군대를 돌려 신책의 제섭에게로 향했다. 장원을 제압한 후연의 대군이 신책으로 몰려들자 신책에 있던 동란이라는 사람이 제섭을 잡아 모용수에게 보내왔다. 모용수는 제섭 부자의 목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AD387년 2월) 
     

(47) 모용수의 적요 토벌(AD387)

장안과 제섭 무리를 토멸했지만 모용수는 가증스런 적요를 가만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여기저기를 붙어 다니면서 반란과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었다. 동진에게 붙었다가 후연에게 붙었다가 또 서연에게 붙었다 하면서 모용수를 괴롭혔던 사람이다. 마침 적창이라는 사람이 후연의 태수 서함원을 죽이고 적요에게로 투항하는 일이 발생했다. 모용수가 직접 나섰다. 태자 모용보와 장무왕 모용주에게 중산을 맡기고 모용해를 전군도독으로 삼아 자신이직접 전군을 동원하여 남쪽으로 쳐들어갔다. 적요 무리들은 과거 전연이나 후조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모용해가 선봉에 섰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했다.

“ 태원왕 모용해는 나의 부모님이나 마찬가지다.”     

모용해의 아버지 모용각은 전연의 명장이었고 또 명재상으로써 백성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적요의 무리들이 서로 서로 권면하며 모용해에게 귀부하자 적요가 두려워서 항복의 뜻을 보내왔다. 모용수는 적요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서주목의 직책을 내렸다. 모용수가 적요를 토벌하는 동안 가포라는 사람이 외부인을 끌어들여 중산을 공격해왔지만 장무왕 모용주와 모용보가 안팎으로 힘을 합하여 격파하고 공격해 온 무리들을 사로잡았다. 모용수는 다시 중산으로 돌아왔다.   


(48) 모용수의 유현 세력 토멸(AD387)

산서성 북단 끝자락 우옥현을 거점으로 한 유현의 세력은 동쪽으로는 탁발규와 대치하고 서쪽으로는 유위진과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영토가 넓고 비교적 비옥하여 강력한 군대를 가질 수가 있었다. 아버지 유고인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의 민심 또한 얻고 있었다. 그러나 유현과 동생 유가니 사이의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났다. 북위 장곤이 탁발규에게 후연과 연대하여 내분에 빠진 유현 세력을 토벌하자고 종용했다. 혼자서는 힘이 달렸던 탁발규는 장수 안동을 후연 모용수에게 보내 또 다시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탁발규가 반란을 피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AD387년 경 북중국의 패권은 사실상 후연의 모용수가 잡고 있었다. 요장의 후진은 건국한 지 3년 밖에 되지 않았고 북위 또한 지난해에 세워졌다. 강력했던 전진은 무너지고 있는 중이었고 장안 서쪽에는 우후죽순처럼 소국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후연의 경쟁상대는 되지 못했다. 유위진은 그런 모용수의 환심을 얻기 위해 말 몇 천 필을 보냈다. 그러나 도중에 유현이 그 말을 모두 약탈했다. 격노한 모용수가 모용해를 보내 유현을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유현은 남쪽 마읍, 즉 산서성 삭주 서쪽 산으로 도망갔다. 탁발규와 모용린이 그치지 않고 유현을 쫓아와 공격하자 유현은 마침내 후연과 사이가 좋지 않은 모용영의 서연으로 도망갔다. 모용린은 유현의 모든 군사와 가축을 거두었다. 빼앗은 가축이 천만 마리가 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로써 유현의 세력은 사실상 끝이 난 셈이다. 모용수는 유현이 다스리던 지역의 통치를 그의 동생 유가니에게 위탁했다. 


(49) 태자 모용보를 녹상서사 섭정-현업수업(AD388)

북중국 최강의 나라가 된 후연의 모용수는 이 때 나이가 62세를 넘고 있었다. 그리고 장자 모용보의 나이는 이미 서른세 살이나 되었다.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녹상서사로 임명하여 모든 정치의 실권을 사실상 넘겨주고서 자신은 국가대사만 간여하기로 했다. 두 달 뒤 5월 모용수는 모용보에게 영대선우(임시 대선우)라는 직책을 주어 선비족 최고위 직책인 대선우의 임무마저도 위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현재 부인 단씨를 황후로 책봉했다. 그리고 그의의 언니이자 전의 황후였던 태자 모용보의 어머니 죽은 단씨를 성소황후로 추가로 시호를 내렸다. 

(50) 모용수를 염탐하는 탁발규(AD388)

북위 창업자 탁발규가 몰래 후연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사촌 동생 탁발의를 중산으로 보내 후연의 상황을 염탐시켰다. 모용수가 그런 의도를 모를 리가 없다. 탁발의를 꾸짖었다.

“ 어째 위왕이 손수 오지 않았느냐?”

이 때 탁발규는 열일곱 살에 불과했으니 모용수로써는 손자뻘도 안 되는 셈이었다. 탁발의가 이렇게 대꾸했다.

  “ 돌아가신 선왕(탁발규의 할아버지 탁발십익건)과
    후연과 더불어 서진 조정을 섬기며 형제로 지내지 않았습니까?
    제가 사신으로 온 것이 큰 잘못은 아닌 듯 생각합니다.“

모용수가 말했다.

  “ 나는 이제 위엄이 사방에 미치고 있는데 
    어찌 옛날과 지금을 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느냐?“

탁발의가 대답했다.
 “후연이 덕과 예를 닦지 않고 오로지 무예만 가지고 
  강성하다고 예기하신다면
  이것은 장수나 할 말이지 군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북위로 돌아 온 탁발의는 탁발규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 후연 주군 모용수는 늙었습니다.
   태자는 어리석고 나약하며 
   범양왕 모용덕(모용수의 동생)은 스스로의 재주만 믿고 날뛰는 것을 보면
   조카 모용보의 신하는 아닐 것입니다.
   주군 모용수가 죽고나면 후연은 큰 회오리로 빠져 들것이니   그 때를 기다리시면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5b90dfd53d6173d1291bdb8d33d66860_1653788
     ​ 

0
  • 기사입력 2022년06월24일 16시50분
  • 검색어 태그 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