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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8 : 작은 아버지의 유업을 못지킨 남연의 모용초(H)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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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6월17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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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37) 모용수의 업 장악(AD385)

 

포위를 풀어도 부비가 도망가지 않고 업성을 지키자 모용수는 다시 업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해를 넘겨 AD385년이 되어도 업성이 떨어지지 않자 모용수는 업을 수도로 삼을 생각을 접고 북쪽으로 갈 생각을 굳혔다. 모용수에게 호응하던 군사들도 모용수의 능력을 의심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모용농과 모용온이 흔들리는 이민족을 잘 설득하고 규합하여 모용수의 군대가 분열되는 것을 잘 막았다. AD385년 4월에는 동진 유뢰지의 지원군이 업성 부근에 당도했다. 업성을 두고 모용수의 포위군과 동진 유뢰지의 지원군과 전진 조정 부견이 보낸 지원군 간에 치열한 공방이 지루하게 지속되었다. 

유뢰지의 공격을 받고 패한 모용수는 일단 포위를 풀고 퇴각하여 신성(하북성 비향) 주둔했다. 유뢰지는 도망가는 모용수를 끝까지 따라갔다. 부비도 유뢰지의 뒤를 쫓아왔다. 모용수가 말했다.

 

 “ 동진과 전진은 깨진 기와 같아서 절대로 같은 마음이 아니다.

   저들이 합치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 “

 

급하게 달려오던 유뢰지의 군대를 역습하자 유뢰지 군대가 크게 깨어졌다. 유뢰지는 단기로 도망가다가 전진의 부비군대를 만나고 나서야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유뢰지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서 건강으로 소환되었다.  

 

업성 안의 기근은 더욱 심해졌다. 부비는 곡식을 채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업성을 나와 주변을 경략하고 다시 들어왔다. 기근이 심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부비는 마침내 업성을 버릴 결단을 내렸다. 애초에는 장안으로 가려고 했으나 8월 호관(산서성 장치북쪽)에 와있던 전진의 유주자사 왕영이 초청하자 부비는 업의 주민 6만 명을 이끌고 성을 나와 서쪽으로 향해 태원쪽으로 나아갔다. 연왕 모용수는 그제야 모용화를 보내 업에 진수하게 하였다.(AD385년 8월) 

 

 

(38) 모용수의 천도(AD385)

 

AD385년 경 후연의 세력은 북쪽으로 용성(요녕성 조양)으로부터 서쪽으로는 태원 그리고 남쪽으로는 산동성의 제남과 임청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으로 펼쳐져 있었다. 북경과 업을 오가던 모용수는 북경이 너무 북으로 치우쳐있고 또 과거 전연의 영토가 회하까지 뻗어져 있었으므로 수도를 북경 남쪽으로 옮기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청하(산동성 임청)에 주둔하던 모용수의 넷째 아들 모용린이 박릉(하북 안평)을 지키고 있던 전진의 평주자사 왕연을 공격해 왕연과 부장 부감을 체포했다. 양식이 다 떨어진 성 안에서 왕연의 부하 장의가 무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는 바람에 손쉽게 박릉을 장악한 것이다. 박릉은 중산에서 남동쪽으로 60여 KM 떨어진 곳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중산은 낙랑왕 모용온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모용준의 넷째 아들로 모용수에게는 조카인 셈이다. 모용수가 그에게 중산을 맡기자 그는 선한 정치를 펴서 많은 사람들이 귀속하여 들어왔고 창고는 넘치고 군사는 강해졌다. 중산지역 방위를 위협하는 왕연 세력을 무너뜨리고 모용수는 새 도읍으로 중산(하북성 정주)을 택했다. 다음 해인 AD386년 정월에 모용수는 중산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대사면을 내림과 아울러 연호를 건흥으로 고쳤고 종묘사직을 수리하였다.

 

 

(39) 서연의 내분(AD386)

 

장안을 장악하게 된 서연의 모용충(冲)은 장안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좀 부서지기는 했지만 모든 시설도 제대로 잘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동쪽의 모용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약 17년 전 AD370년경 부견에 의해 장안으로 옮겨진 많은 선비족 사람들은 모두들 동쪽 고향(주로 요동지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이런 불만을 잘 알고 있던 좌장군 한연이란 사람이 모용충을 시해하고 단수라는 사람을 세워서 왕으로 삼고 연호를 창평으로 고쳤다. 쿠테타인 셈이다. 이 때 모용충은 27세였다. 서연 복야 모용항과 상서 모용영은 즉각 단수를 습격하여 죽이고 모용충의 사촌동생(모용환의 아들) 모용의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40여만 명 선비족 인구를 이끌고 장안을 떠나 동쪽으로 이동해 나갔다. 

 

실권을 잡은 모용항의 동생 모용도는 형의 이런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몰래 모용의를 불러내 길에서 죽이고는 무리를 다시 장안으로 돌리려 했다. 형 모용항은 동생 모용도를 크게 꾸짖고 내쫓아버렸다. 모용항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모용영이 모용도를 습격하자 모용도가 패하여 형님 모용항의 군영으로 도망갔다. 모용항은 시해된 모용충의 어린 아들 모용요를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선비족 무리들은 모두 모용항-모용요를 버리고 모용영에게로 달아났다. 모용영은 모용요를 잡아 죽이고 대신 모용홍의 아들 모용충(忠)을 새 황제로 옹립했다. 모용충은 모용영을 국정 최고책임자 태위 및 수상서령으로 삼고 하동공의 자귀를 내렸다. 모용영은 법을 관대하고 공정하게 시행하여 민심을 크게 얻었다. 무리들이 산서성 문희에 이르렀을 때 모용수가 황제 다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 부근에 성을 쌓고 머무르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조운이라는 자가 모용충을 살해하고 대신 모용영을 추대하여 대도독중외제군사로 삼고서는 후연에 번속하겠다고 약속해 들어왔다.

 


(40) 후연 모용수의 황실인사 난맥상 (AD386)

 

후연 주군 모용수는 죽은 생모 난씨를 추존하여 문소황후로 올리고 적실인 문명황후 단씨를 빼내고 대신 문소황후를 아버지 태조의 묘실에 배향하고자 했다. 모용수의 생모 문소황후 난씨는 아버지 모용황의 정부인이 아니라 측실이었지만 자신이 새로이 황제가 되었으므로 문소황후를 빼고 문명황후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백관에게 그 여부를 묻자 당연히 중론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박사 유상과 동밀이 반대하고 나섰다.

 

 “ 요 어머니는 제곡의 부인이 되어서 

   지위가 셋째였을 뿐입니다만 귀함을 가지고 강원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도를 밝히는 것은 

   지극히 공정한 것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니(明圣之道,以至公为先) 

   문소황후는 별도의 사당을 세우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용수는 격분하여 유상과 동밀을 꾸짖었다. 놀란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 황상께서 하시려는 일을 신에게 묻지 마십시오.

   신들은 경전을 살펴 의례를 행하는 방돌르 말씀드린 것일 뿐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용수는 다시는 대신들에게 묻지 않고 생각대로 행동했다. 단씨를 문소황후로 추존하고 평소 자신을 홀대하고 핍박했던 아버지의 정실 가족혼태후를 폐위하고 아버지의측실 또다를 단씨를 경덕황후로 세우고 열조에 배향하였다.   

 

황위에 오른 모용수는 아들 모용농을 요서왕, 모용린을 조왕, 모용륭을 고양왕으로 책봉한 뒤 동생 범양왕 모용덕을 상서령, 조카 태원왕 모용해(모용각의 아들)를 좌복야, 그리고 조카 낙랑왕 모용온(모용준의 아들)을 사예교위로 임명했다.

 

  

(41) 서연 모용영과 부비의 죽음(AD386)

 

서연 무리들이 장안을 비우자 형양태수였던 조곡이라는 사람이 흉노 학노와 4천 여호를 불러들여 장안으로 들어왔다. 장안이 다시 붐비게 되자 위수 이북의 많은 주변 무리들이 조곡에 호응하였다. AD386년 4월 요장이 들어와 장안을 접수하였다. 요장은 즉시 황제로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는 건초, 국호는 대진으로 이름하였다.   

 

AD386년 6월 전진황제 부비는 도독중외제군사 왕영을 통해 전국에 격문을 뿌렸다. 모용수의 후연과 후진의 요장을 토벌하는 대군을 일으켜 맹동(섬서성 대현)에 결집하자는 선동이었다. 부비의 토벌격문을 보고 곳곳의 토후들이 수백 혹은 수천의 군사를 모아 호응해왔다. 전진 주군 부비는 멀리 남안(감숙성 농서)에 웅거하고 있는 사촌동생 부등과 연락하면서 연대를 모색했다. 산서성 문희에 머물고 있던 서연의 모용영은 이미 후연 모용수에게 복속하기로 약속했으므로 전진의 부비에게 동쪽으로 가는 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부비가 거절했다. 모용영이 가고자 하는 곳은 모용수의 땅이었다. 만약 서연의 모용영을 보내 준다면 모용수의 세력은 더 강해질 뿐이다. 부비는 열어 줄 수가 없었다. 모용영의 군대와 전진 부비의 군대는 양릉(산서성 임분)에서 결전을 벌였다. 불행하게도 전진이 대패했다. 전진 좌승상 왕연과 위장군 구석자가 전사했다. 부비는 수 천 기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갔으나 얼마 못가 섬(하남성 삼문협)에서 동진의 양위장군 풍해에게 패하고 전사했다. 부비의 아들 태자 부녕과 장락왕 부수는 체포되어 건강으로 압송하려 하였으나 건강 조정은 조서를 내려 부씨 유족들을 동진 강주(강서성 구강)에 망명와 있던 부굉과 합류시켰다. 모용영은 부비를 물리친 다음 장자(산서성 장치)를 점거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사로잡힌 부비의 처 양씨를 상부인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양씨 부인은 강하게 거부하면서 모용영을 패도로 찔렀다. 모용영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양씨를 죽였다.(AD386)  

 

 

(42) 서연에 있던 모용수 자손들의 후연 귀속(AD386)

 

AD386년 서연 황실 내부에서 모용충(충)등이 피살되면서 이어지는 혼란을 가라앉히며 모용영이 장자(산서성 장자)에서 황제로 등극하는 동안 모용수의 아들 모용유, 태자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 그리고 그의 동생 모용회는 모두 장자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장안에 있다가 모용영이 동쪽으로 옮겨 오면서 장자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모용성이 삼촌 모용유와 동생 모용회에게 말했다.

 

 “ 주상(모용수를 말함)이 이미 유주와 기주를 중흥시켰으나

   동쪽(후연)과 서쪽(서연)이 아직 통합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서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일 뿐이니

   어리석든 현명하든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틈을 타서 동쪽으로 돌아가서 어육이 되는 것을 피합시다.“

 

이들은 모두 모용수에게는 아들이거나(모용유) 손자(모용성과 모용회)였지만 모용영에게는 8촌 동생(모용유) 혹은 9촌 조카일 뿐이었다. 모용영의 할아버지 모용운이 전연 창업자 모용외와 친형제였다. 마침내 장자를 빠져나와 성공적으로 후연으로 돌아왔다. 모용영은 1년 뒤 자신의 휘하에 있던 전연 주군 모용준과 모용수의 자손을 모두 죽여버렸다.  다음해 초 이들이 중산에 도달하자 모용수는 크게 기뻐하며 모용유는 양평왕, 모용성은 장락공, 모용회를 청하공으로 책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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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6월17일 1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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