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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시장(市場), 그리고 국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5년03월16일 18시54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3시05분

작성자

  • 김병준
  • 국민대 명예교수, 前 대통령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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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시장(市場), 그리고 국가

 

 오래 전의 일이다. 지방 국립대학 교수가 되어 처음 배정받은 과목 중에 국제행정이란 것이었다. 유엔 등 국제기구의 사무국 조직이 어떻고, 직원들 연봉이 어떻고 하는 따위를 가르치게 되어 있었다.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제기구와 관련된 일을 할 학생들도 아니고, 또 그렇다 해도 소개 책자 하나 읽으면 되는 내용이었다. 이걸 왜 한 학기 동안이나 강의해야 하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선배 교수 한 분이 말했다. 누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과목에다 소위 명문 대학 어디어디에도 다 개설되어 있는 과목이라고.

 

이제 막 교수가 된 신참이 어쩌겠나. 가르치라니 가르칠 밖에. 그러나 몇 주 뒤 결국 포기했다. 교수도 지겹고 학생들도 지겨웠다. 그래서 맥이 탁 풀린 학생들에게 말했다. ‘더 이상 못하겠다. 다른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해서 우리도 꼭 가르쳐야 하나?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하자. 일단 국제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 나라마다 다른 행정문화 이야기를 하자. 나중에 여행을 다니더라도 그게 도움이 될 거다.’ 이후 강의실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강의실은 교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동자들로 가득 찼다.

 

극단적인 예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의미도 재미도 없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 지금은 없을까? 장담할 수 없다. 구조상 그럴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다.

 

우선 대학에서는 소비자가 온전한 소비자 역할을 못한다. 입학을 할 때부터 휴대폰 하나 살 때의 입장과는 다르다. 휴대폰이야 이것저것 비교해 볼 수 있지만 대학의 학과나 전공은 그렇지가 못하다. 교육 내용이 어떤지 교수들의 교수능력이 어떤지를 알아볼 길이 없다. 각종의 평가가 있기는 하나 그 기준이 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크게 의존할 바가 못 된다는 말이다.

 

또 일단 입학하고 나면 오히려 평가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소비자의 권리를 행사하기가 힘이 든다. 또 있다. 전공이든 학과든 한번 엮이고 나면 그 전공 공동체나 학과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싫건 좋건 같은 편이 되어 같이 돌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다보니 결국 공급자 중심, 즉 교수 중심의 교육환경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시장이라면 벌써 퇴출되었어야 할 교수와 학과, 그리고 과목들이 자리를 지킨다. 의미 없는 과목을 필수로 지정하기도 하고, 학과나 전공 간의 이동을 막기도 한다. 학생을 일종의 볼모로 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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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학에 대해 시장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이 불만을 쏟아내는 것은 당연하다. 언젠가 만난 어느 경제단체장의 말이다. “차라리 아무 것도 가르치지 말고 그냥 데리고 있다 보내 주면 좋겠다. 잘못 배운 것이나 버릇 나빠진 것 바로 잡느라 돈이 더 든다.” 또 이런 말도 있다. “대학이 조폭 같다. 주는 것 없이 돈(등록금)만 빼앗아 가니 조폭 아니고 뭐냐. 그래도 조폭은 의리라도 있지. 대학은 그것도 없다. 졸업생이라 하여 뭘 챙겨주는 것도 없다.”

 

이런 불만을 바탕으로 일부 대학재단이 시장논리를 바탕으로 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적지 않은 대학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학생의 전공 선택권을 강화하여 시장성이 작은 학과나 전공의 폐지를 유도하기도 하고, 바로 인위적인 통폐합을 추진하기도 한다. 독어독문학과와 불어불문학과 등이 그 대표적인 희생자들이다.

 

이런 일로 지금 바로 이 순간, 중앙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이 시끄럽다. 시끄럽지 않은 대학도 잠재적인 갈등요인들을 안고 있다. 재단과 학교본부, 그리고 교수와 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어찌 보면 지금 시도되고 있는 개혁이나 개편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시장논리도 이해가 되고 학생 선택권의 확대도 이해가 된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의 공급자 중심구도와 그것이 말들어 놓은 비합리적 구조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움직임, 시장논리를 강조하는 개혁과 개편에 대해 작지 않은 걱정이 있다. ‘학문의 자유’니 어쩌니 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귀족 자제들에게 교양이나 학문 그 자체를 위한 공부를 하게 하던 유럽의 오래된 대학들까지 실용성을 더하는 상황이다. 그런 걸 앞세워 넘어가기에는 우리 대학과 우리 학생들의 현실이 너무 딱하다. 오죽하면 ‘조폭’ 소리까지 듣겠나.

 

이유는 따로 있다. 즉, 시장논리나 이를 바탕으로 한 학생 선택권 확대가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학생은 완벽한 소비자가 아니다. 미래 수요는 물론 현재 수요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널뛰기 장세에 쏠림현상이 심한 우리 사회의 특성을 봐도 그렇다. 이런저런 경향에 쏠려 다니다 결국 하지 말았어야 할 전공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 결과 학교와 국가에도 독이 될 수 있다.

 

여기에 교수의 이동이 비교적 잘 이루어지는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의 경우 교수들은 다른 학교로 쉽게 이동할 수 없다. 경력자 특채 제도를 운영하는 학교가 적지 않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기존의 교수들이 이를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옮기기 힘든 만큼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이 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칫 대학전체를 큰 소용돌이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 또 그러한 구조조정 속에 국가적으로, 또 미래에 필요한 전문가와 그의 전문성이 훼손될 수 있다. 즉 한 쪽 학교에서 잘린 유능한 교수가 다른 학교로 옮겨 연구를 계속하기가 힘든 구조이기 때문이다.

 

심란하다. 공급자 중심의 구도를 만든 교수 이기주의도 문제이고 이를 뒤집겠다는 시장논리도 문제이다. 문제가 있는 이 둘이 부딪치는 것은 더욱 문제이다.

 

대학이 대학답게 되기 위해서는 이 둘 외에 또 다른 논리와 시각이 필요하다. 국가와 공동체의 논리와 시각이다. 학문과 전공의 국가적 수요에 대한 국가나 공동체 차원의 판단과 계획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지나친 쏠림현상 등을 막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시장성이 약하지만 사회에 필요한 전공이라면 필요한 만큼 보호가 되어야 하고, 국가적으로 필요한 전문성을 가진 교수라면 이 또한 보호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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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대학특성화 지원을 통해 시장성이 약한 전공이라 할지라도 어디선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할 수도 있고, 여기서 퇴출되는 우수한 교수가 저기서 살아날 수 있도록 그 이동을 활성화시킬 수도 있다.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국가이고 정부이다. 그런데 이 국가와 정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기만 하는 모습이기도 하고, 시장논리를 앞세운 구조조정을 은근히 부추기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대학에서는 교수 이기주의와 시장주의만이 횡행하고 있다.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내기도 하고, 마땅히 일어나야 할 개혁이나 개편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묻고 싶다. 국가와 정부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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