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300일 정치 공백, 무엇을 남겼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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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하원은 지난 10월 29일 라호이(Mariano Rajoy) 총리후보자의 신임투표를 가결(전체 350석 중 찬성 170표, 반대 111표, 기권 68표)하였다. 이로서 스페인은 정부구성 시한을 이틀 남긴 상태에서 300일간의 무정부상태를 끝내고 극적으로 국민당(PP)의 라호이 총리가 1기(2011~15년)에 이어 2기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번 하원의 총리지명자 신임투표 가결은 10월 31일까지 총리 선출에 실패하는 경우, 하원을 해산하고 제3차 총선을 통해서 구성된 의회에서 총리를 선출해야하는 파행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라호이 총리는 국민당이 하원의 과반수를 넘기지 못한 상태에서, 제1야당인 사회노동당(PSOE)이 신임투표에서 기권함으로서 탄생한 비(非)다수파 정권으로, 스페인 민주화 40년 만에 가장 약체의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4당 체제가 굳어진 스페인 정국에서 긴축재정 등 정책분야별로 야당의 협조가 정국운영에 필수적이다. 300여일의 정치공백을 극복하고, 라호이 정부가 야당의 협조를 얻어가며 어떻게 정국을 운영하느냐가 앞으로의 스페인 정치안정의 관건이 될 것이다. 또 이러한 스페인의 경험은 우리의 정국운영에도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전통적인 양당체제 붕괴, 정치 공백으로 이어져
그동안 스페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스페인은 지난 2015년 12월 총선과 2016년 6월 재선거 이후 어느 정당도 정부 출범에 필요한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정부구성에 실패한 채 정치공백을 이어왔다(아래 <표 1> 참조). 스페인 하원은 지난 8월 31일 당시 국민당의 라호이 총리를 총리후보로 하는 신임투표가 진행되었으나 사전에 예상한대로 정부 출범에 필요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다.
스페인의 경우 헌법규정에 따라 정부 출범은 국왕이 지명한 총리후보가 의회의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첫 투표에서는 하원 총의석 350석의 절대 과반수(176석) 찬성이 필요하고, 최초 투표에서 2일 후에 열리는 2번째 이후의 투표에서는 총투표수의 단순과반수(결석자 및 투표 기권자를 제외한 의석수)의 신임찬성이 필요하다.
최초의 신임 투표에서 2개월 이내(이번 경우 10월 31일)에 정권이 출범할 수 없을 경우, 54~60일 후 11일(12월 25일 또는 2017년 1월 1일)에 재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총리신임이 어려운 것은 과거 양당체제와 달리 4당 체제가 굳어진 상황에서 절대다수당이 출현하지 못하였고 또한 현실적으로 정당간 제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6월 2차 총선거 이후의 여론조사에서 3차 총선이 실시될 경우에도 국민당의 승리와 사회노동당, 뽀데모스연합(Unido Podemos), 우파 시민당(시우다다노스, C's 또는 Ciudadanos)의 4당이 하원의석을 나누게 되어 역시 정부구성이 난항을 겪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와 같은 4당 체제 속에서 스페인은 2015년 12월 선거이후 지속적으로 제1야당인 사회노동당이 국민당 정부 출범을 반대함에 따라 정국이 더욱 어려운 국면을 이어 왔다. 사회노동당이 국민당 정권 탄생에 반대 입장을 고수하였던 이유는 ①역사적인 라이벌 관계에 있는 국민당 정권의 탄생에 협력하는데 대한 당내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②협력할 경우 지지층을 뽀데모스연합에 빼앗길 우려와, ③잇단 선거 패배로 산체스 (당시) 당수의 리더십에 불만이 커진 가운데, 국민당 정부출범에 협력하면 당수 사임압력이 더욱 높아질 것 등을 고려한 결과였다.
사회노동당이 국민당 정권의 출범에 계속 반대하는 쪽으로 가서 정부구성의 시한인 10월 31일을 넘겼다면, 스페인은 단기적으로 3차 총선에 따라 혼란이 가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정부구성에 반대를 거듭한 사회노동당에 더욱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불안한 출발로 갈 길 험난한 非다수파 정부
이번 라호이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의 국민당(137석) 2기정부의 구성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당(32석)과 카나리아주의 우파계 지역정당인 카나리아인민당(1석)이 가세하여 170명의 의원이 신임찬성투표를 행사한 결과이다. 여기에 제1야당인 사회노동당의원 68명이 기권하여 찬성 170표, 반대 111표로 非다수파 정부가 구성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라호이 2기정부의 앞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는 라호이 1기 정부가 2011년 11월 총선에서 유럽 재정위기 이후 경기침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2004년 이후 집권해 오던 사회노동당을 제치고 국민당이 과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여 안정적으로 출범하였던 경우와 다르기 때문이다.
라호이 1기 정부는 다수파 집권으로 2015년 말까지 4년간 안정적인 정국운영이 가능하여 스페인의 경제위기를 지켜보는 EU 회원국 및 시장에 안도감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라호이 2기 정부는 집권 여당 국민당의 재정 스캔들로 인하여 2015년 연말에 치러진 총선과 2016년 6월 재선거에서 제1당의 자리를 지켰지만, 과반을 넘기지 못하여 국민당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非다수파 정부로 출범하였다. 라호이 2기 정부의 구성으로 3차 총선거를 피함으로써 단기적으로 정치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계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장기적으로 스페인 정국이 안정될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향후 스페인 정국을 더욱 우려스럽게 보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1야당인 사회노동당의 향후 행보가 집권 여당에 우호적이지만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라호이 2기 정부는 국민당이 과반수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사회노동당의 신임투표 기권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사회노동당도 국민당에 우호적이어서 기권한 것이 아니라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 가운데 장기적인 국정운영의 마비가 국가적으로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제1야당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회노동당은 기권을 완강히 반대하던 페드로 산체스 당수를 사임시키면서까지 국민당이 비(非)다수파 정부를 구성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당 이미지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제1야당으로서 집권 국민당과 더욱 대립각을 세울 개연성이 높다.
둘째, 시민당의 협력 지속 여부도 불투명하다. 라호이 2기 정부의 출범과정에서 시민당의 협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시민당이 신임투표에서 협력하는 조건으로 선거제도 개혁과 국민당의 부패의혹에 대한 조사 등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라호이 정부가 향후 이 조건들을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해 가느냐가 관건이다. 또한 시민당은 당분간 연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어서, 정책 사안에 따라서는 앞으로 집권 국민당을 압박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정책 분야별로 야당의 협조를 받아야하는 非다수파 정권으로서 어려운 정책운영을 재촉 당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 무엇보다 라호이 2기 정부는 국민당의 부패 등으로 정부에 대한 정통성이 약화되어서 앞으로 정치 불안을 피하기가 더욱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긍정적인 측면에서 라호이 2기 정부의 출범은 지난 4년간 EU의 정책방향에 맞춰 국정을 운영해 온 국민당의 재집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앞으로도 스페인경제의 정상화를 위한 일관성 있는 정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EU내에서와 외국인 투자가들에게도 신뢰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라호이 정부는 정책 수립과정에서 굳어진 4당 체제아래에서 항상 야당과의 협력을 통하여 균형 있는 정책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부담감도 갖게 될 것이다. 라호이 정부는 앞으로 4년간 풀어가야 할 대내외적 정책과제가 산더미 같이 쌓여있다. 대외적으로 영국의 브렉시트, 트럼프의 미국 대선 승리 등으로 야기된 보호주의 확산우려 등 세계정치·경제사회의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대내적으로는 경제의 지속적 성장과 EU와 약속한 재정적자 감축목표(GDP대비 2016년 4.6%, 2017년 3.1%) 달성을 위한 긴축정책 추진과 카탈루냐의 독립요구나 급진 진보의 약진 등과 같은 정치·사회적 변화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EU체제가 경제안정 지키는 울타리 역할
스페인은 300여일의 기간 동안 정부를 구성하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세를 지속하였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이후의 유럽재정위기로 국가부도 위기직전까지 몰렸던 경제가 라호이 집권 1기 동안 안정을 되찾아 왔다. IMF가 2016년 10월 발표한 WEO(World Economic Outlook)에 의하면, 스페인 경제성장률은 2015년 3.2%로 유로존 평균 2.0%를 크게 상회하였으며, 2016년에도 관광업 호황과 수출 활성화 등에 힘입어 3.1%의 견조한 성장세를 지속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스페인 소비자들의 소비심리도 상당 부분 개선되었고, 특히 유가 하락과 마이너스 금리 등에 따른 소비여력확대로 2016년 1~9월 중 소매판매지수가 전년 동기대비 2.0% 상승하였다. 아직 스페인 경제가 경제위기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 등 북부유럽국가에서의 테러위협으로 스페인의 관광산업이 크게 붐을 이루어 경제 성장세를 견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지난 2015년 연말이후 정치공백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경제가 안정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가? 이를 제도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스페인의 정치에서 중재자로서 국왕의 역할을 지적할 수 있다. 국왕은 국가대표권을 가진 국가원수로서 불가침한 존재이며 책임을 묻지 못한다. 국왕은 법률의 폐지 및 공포권, 국회소집 및 해산권(총리는 각료회의의 심의를 거친 후 그 책임 하에 양원 또는 각원 해산을 국왕에 건의), 총리 및 각료 임명권, 군통수권, 선전포고 및 강화권, 외교사절 파견 및 접수권 등을 행사한다. 이번 정부구성 실패에 따른 정부공백상태에서도 펠리페 6세 국왕이 나서서 주요 정당의 당수들과 정부 출범을 위한 협의를 하는 동시에, 제1당인 국민당의 라호이 총리에게 정부 출범을 요청하는 등 중요한 중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둘째, 역설적이지만 반(反)긴축, 반(反)EU정서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경제사회 안정에서 EU체제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스페인은 1986년 민주정치 회복 이후 그간의 정치적 고립을 탈피하고 경제발전에 필수불가결한 EU(당시 EC)에 가입하였다. 스페인은 EU와의 통합 강화가 지역정세 안정 및 경제번영을 가져 온다는 기본적인 인식아래, 생겐(Schengen)조약, 니스(Nice)조약, 유로지역(Euro Area)가입으로 단일화폐인 유로화 도입, EU헌법 승인 등 EU의 통합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2001년 니스조약을 통해 스페인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과 함께 다수의 투표권을 보유한 EU역내에서 주도국가로 부상하였다. 이번의 정부 공백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EU의 규범에 따라 자칫 방만할 수도 있었던 재정적자폭 억제와 정부 공백에서 비롯된 불확실성에 의한 환율의 급격한 변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영국이 브렉시트 결정으로 파운드화 가치가 31년만의 가장 낮은 수준으로 하락하는 등 경제의 불확실성이 증대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스페인은 정부공백기간 동안 EU체제가 경제안정을 지켜주는 울타리역할을 하였다.
스페인의 교훈: 정치공백은 국가적 재앙, 정치안정으로 경제의 불확실성 없애야
스페인은 300여일의 정치적 공백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으로 경제의 성장세가 지속되어 안정을 누려 왔다. 이는 EU의 울타리 안에서 스페인이 2016년 글로벌 유가하락과 유로존의 마이너스 금리 및 유로화 약세에 힘입고, 이어 스페인 관광 붐 등 주력산업의 회복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불확실성에 따른 투자의 정체와 정부가 EU와 약속한 2017년도 재정적자 감축 목표의 달성을 위한 추가 긴축재정정책의 추진 등을 감안한다면, 앞으로의 스페인 경제를 낙관하기가 쉽지 않다. 산적한 정책과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서 라호이 2기 정부는 야당들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정책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재정긴축, 지역간 격차, 높은 실업 등 그동안 대책 없이 누적되어 온 경제현안과 카탈루냐주의 독립추진 등 산적한 과제들을 라호이 정부가 앞으로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스페인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완만한 변화의 시대를 벗어나 빠르고 거대한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브라운 대학 공공정책센터장인 다렐 웨스트(Darrell M. West) 교수가 말하는 "메가 체인지(Megachange)"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느슨한 사고와 점진적인 변화에 맞추어진 거버넌스 체제에서 벗어나 메가 체인지가 점차 뉴노멀이 되어가는 시대에 맞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새롭고 신속한 대응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예컨대 세계화에 대한 반발, 보호주의적 성향 대두, 소득불평등에 따른 역동성의 제약, 산업사회에서 디지털경제사회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장기적 긴장 등을 극복할 신속한 대응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이를 지속적으로 이끌고 다양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균형감각을 지닌 미래지향적인 지도자들의 역할이 절실히 요구된다.
메가 체인지에 의해 증폭되는 분노와 격정에 대한 해결방안을 기존의 정치권이 협력하여 내놓지 못한다면, 더 무섭고 더 파괴적인 미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경우 스페인의 잃어버린 300일에 대한 더욱 무거운 책임감의 필요성을 거울삼아 정치적 격변,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는 대변화 시대를 헤쳐 나갈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스페인의 경우와 같이 최악의 정치적 혼란을 막아줄 장치도, EU체제와 같이 경제를 지켜줄 울타리도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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