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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들아 들어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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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02월14일 22시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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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정치의 계절이 찾아 왔다.  많은 이들이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알리는 문자메시지와 이메일을 보내고 있다.  권력자로부터 진실한 사람으로 평가받은 자부터 행정부나 사법부 관료직을 퇴임하고 돈벌던 자까지 다양하다.  이들 모두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선거자금이겠지만 모두에게 이를 보내줄 여력이 없으니 최근 읽은 책 소개로 대신하려 한다.  이미 NYT의 David Brooks가 op-ed에서 극찬을 하였고 WSJ나 Guardian 등에서 좋은 평을 받은 Michael Ignatieff의 Fire and Ashes라는 책이다.  부제는 success and failure in politics이며 표지에는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경비행기가 그려져 있다.

 Michael Ignatieff는 우크라이나의 귀족인 조부모가 제정러시아에서 외무대신까지 하다가 혁명이후 캐나다로 이주한 집안 출신으로 미국 Kennedy School 교수이다.  60년대 말 Toronto 대학을 마치고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한 후 학교에 정착하여 살면서 방송과 책, 소설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2004년 겨울 캐나다 Liberal Party의 권유로 2005년 겨울부터 2011년 봄까지 5년여 동안 캐나다 “정치판”에서 야당 당수까지 올라갔다가 총선에 떨어지면서 학교로 돌아갔다.  2013년 출판된 Fire and Ashes는 정치에 관심있는 자에게 필요한 많은 조언을 간직하고 있다.  모든 정치는 지역적이라는 단서와 함께. 

 

왜 정치가 필요한가?

 그는 모든 이들이 경멸하는 정치는 Max Weber가 일찍이 설파하였듯이 두꺼운 나무판에 구멍을 뚫는 작업과 같다고 한다.  열정과 계획이 필요한 일이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무수히 무너질 희망을 끝까지 지탱할 강심장을 가진 지도자이자 영웅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힘들고 역겨운 작업이지만 누군가 지금 하여야 할 일이며 세상이 어리석고 저속하게 보일지라도 자신의 천직으로 알고 하여야 한다. 천직이란 통상 성직자와 같이 고고한 직업에만 사용되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정치가야말로 정치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는 2006년 당대표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2011년 총선에서의 승리를 위하여 캐나다 전국을 돌아다녔다. 각자 다른 인생경로를 걸어온 사람들로서 나이, 성별, 직업, 재산, 학력 등 모든 면에서 다르지만 지역구에서의 모임에 나와서 자신의 바람을 전하고 또한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이유는 정치를 통하여 다양한 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모두의 힘을 통한 변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정치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공동체와 연결시키는 중요한 메카니즘이라는 이야기다.

 

왜 정치는 경멸되는가?

 정치는 스포츠에 비유된다.  모두 승리가 목표다.  그러나 스포츠는 승리를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 반면 정치는 규칙이 없다.  규칙은 일단 정치에서 이긴 자만이 사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스포츠는 미리 훈련을 하고 체력을 단련하여 준비가 가능하지만 정치는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 빨리 적응하는 것만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전에 훈련이 불가능하며 시행착오를 통하여 계속 익숙하여 지는 수밖에 없다.  스포츠와 비교하여 좋은 점은 스포츠는 나이가  들면 힘과 기술이 떨어지니 젊은이에게  밀려서 할수없이 은퇴하여야 하지만, 정치는 나이가 들으면 들을수록 경험이 많아져서 늘 젊은이보다 유리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보통 사람이라면 정치라는 야비한 스포츠아닌 스포츠를 좋아하기는 힘들 것이다.

 정치는 상대방이 없고 적만이 있다. 상대방은 일단 그 존재를 전제로 싸워야 하지만 적은 무조건 죽여야만 한다.  적은 재판으로 말하면 당사자적격이 없다.  따라서,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나의 현재 권력에 도전하는 모든 자는 적이므로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의견을 말할 자격부터 박탈시켜야 한다.  모든 공격에 대하여 대꾸하면 공격이 대꾸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우려는 쓸데없는 것이고 모든 공격에 대하여 이를 철저히 반박하여야 한다.  Obama가 자신이 다니던 Chicago남부 흑인교회의 급진적 목사 발언이 문제되었을 때 흑인정치인으로서 미국정치에서 흑백갈등문제를 제기할 자격이 있음을 명백히 하여 자신의 당사자 적격을 성공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이 상당기간 캐나다 밖에서 생활하였으므로 캐나다 정치를 논한 자격이 없다는 보수당의 정치적 선전을 성공적으로 반박하지 못하여 결국 실패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는 외국 유학시 얻은 자식의 국적을 이유로 공직자의 자격을 문제삼는 대한민국 정치수준을 상기시킨다.  빨갱이자식은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대한만국의 과거사와 유사하다.  정치는 규칙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윤리도 없으니 보통사람이라면 좋아하기가 힘들 것이다.

 

어떻게 정치에서 성공하는가?

 정치는 철저한 가식이다.  모든 이들이 알고 있지만 이는 철칙이다.  그는 지방상공인과의 모임에서 왜 정치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의 집안이 외무부 관료로서 근무하였던 내력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정치를 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다고 발언하였다가 모든 참석자들이 싸늘하게 조용하여 졌던 실수를 고백하면서 유권자들은 정치가 개인의 야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정답은 아마도 George Stephanopoulos가 자신의 회고록 All Too Human: A Political Education에서 인용한 Aristotle의 공공선의 실현이 아닐까 싶다.

 정치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모든 유권자 개개인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신을 유권자와 연결시킬 수 있는 이야기의 개발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아무런 원칙없이 회교도 모스크에서는 회교도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유대교 시나고그에서는 유대교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정치가는 성공할 수 없다.  하나의 커다란 원칙 하에서 최대한의 유권자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자신의 narrative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는 진실하여야 하며 거짓은 청중에게 영감과 꿈을 일으킬 수 없다.

 캐나다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정당에 기초한 의회민주주의 체제이다.  따라서, 정치인은 정당의 추천을 받아서 지역구 선거에 출마하며 정당의 결정에 따라서 국회에서의 의안에 대하여 표결한다.  자신의 개별적 의견보다 당론이 언제나 우선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Liberal Party에서 대도시출신 정치인들 중심으로 총기에 대한 보다 엄격한 규제를 제안하면 캐나다 서부출신 의원들도 다음 선거에서 자신의 의석을 잃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에 찬성하여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정당이 수시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으며 지역주의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정요인이고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기 있기 때문에 언제나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정치는 타협이다.  정당의 강령이 중요하지만 결국 유권자의 마음을 잡아야만 다음 선거에 승리할 수 있으므로 언제나 타협할 줄 알아야 한다.  미국의 Great Recession이 세계경제를 불안하게 만들어 놓은 직후인 2009년 보수당은 국가재정의 확대를 반영한 타협적 예산안을 내 놓았다.  보수당은 미국의 공화당과 유사한 정치철학을 가진 정당으로 시장의 완전성과 최소한의 국가간섭을 강령으로 하지만, 당장 캐나다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예산작성의 원칙을 수정하였고 Liberty Party는 커다란 다툼없이 이를 받아들인 사례가 있다.  대한민국의 소위 보수정당은 소위 진보정당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경제 전반의 계획과 심지어는 국가개조까지 주장하는 면에서 경제에 관한 한 별로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늘 다투면서 전혀 입법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마무리하면서 – 서평

 학교에 5년 있으면서 책을 몇 권 써 보았다.  학술지나 신문에 실리는 서평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는 자로부터 거절당하는 수모까지 당한 후에 간신히 대학친구를 찾아서 서평을 받았다.  전문지에 보냈더니 사전 협의도 없이 대폭 편집하여 내용을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대한민국에도 좋은 서평을 게재할 수 있는 신문이나 잡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인터넷과 SNS시대에 무슨 책과 서평이 필요하냐고 반문하면 할 말이 많지는 않지만 아직도 Economist, LRB, LARB나 American Scholar같은 잡지에서 조금은 쌀쌀맞지만 읽으면 즐거운 서평이 나오고 있다.  서평을 쓰는 것이나 읽는 것 모두 피곤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은 서평을 쓸 수 있는 자도, 이를 읽으면서 즐길 수 있는 자도, 대한민국에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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