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2 통합으로 건국한 사마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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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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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마의의 쿠테타(AD249년)와 실권 장악
AD249년 사마의는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를 데리고 쿠테타를 일으켜 실력자 대장군 조상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몇 년 전부터 조상은 죽은 황제 조예의 부인 곽태후를 영녕궁에 사실상 유폐시켜놓고는 상서 하안과 등양과 정밀 같은 측근을 조정 요직에 앉혀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다. 조상의 만행을 저지할 수가 없었던 태부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나 있었다.(AD247년5월) 사마의가 조정을 떠나 있자 조상의 횡포와 만행은 거칠 것이 없이 자행되었다. 동생 조희마저 만류했지만 조상의 국정농단이 그 무리들 전체가 관련된 것이지 어찌 조상 한 사람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었겠는가. AD248년 가을(9월) 형주자사로 부임하는 이승이 인사차 들렀을 때 사마의는 일부러 거의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는 비녀가 주는 숟가락을 일부러 떨어뜨리기도 하고 음식을 옷에 흘리기도 하면서 겨우 이어지는 숨소리로 이렇게 부탁했다.
“ 병주로 간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흉노가 가까이 있으니 잘 대비해야 겠소.
이제 다시 볼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어린 사마사와 사마소 형제를 잘 부탁하오.”
이승은 병주가 아니라 형주라고 재차 강조하였으나 사마의는 일부러 병주라고 들은 것처럼 연극을 해 보였다. 사마의를 만나고 나온 이승은 조상에게 이런 편지를 띄웠다.
“ 좀 전에 사마의를 만나 보았는데 시체처럼 마르고 기력 없는 몰골에
몸과 기운이 따로 놀고 있으니 크게 염려할 것 없겠습니다.“
사마의를 깊이 의식하던 조상이 그 패거리 이승을 사마의에게 보냈던 것이고 사마의는 그것을 꿰뚫고 기막힌 연극을 연출한 셈이다. 그 해 연말 사마의는 더 기다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두 아들 중호군 사마사와 산기상시 사마소와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
AD249년 정월 초하루 선황 조예의 묘(고평릉)에 배알하고자 황제와 대장군 조상과 그 동생 중령군 조희와 산기상시 조언 등의 무리들이 황궁을 나갔다. 태부 사마의는 곽태후의 명을 내세워 황궁의 문을 닫아걸고 사도 고유가 조상 대신 대장군직을 차지하며 황궁 내에 있던 황궁군사를 장악하고 태복 왕관은 중호령의 직책으로 조희의 군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사자를 조상에게 보내 관직만 면직시킬 뿐 생명은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성 밖에서 쿠테타 소식을 들은 조상 무리들은 난감했다. 때마침 환범이 성문을 열고 나와서 조상 형제에게 황제를 모시고 허창으로 피신하기를 권했다. 조상은 칼을 땅에 버리고 이렇게 외쳤다.
“ 허창으로 가느니 차라리 부잣집 영감 되는 것이 낫겠다.”
사마의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건지는 게 낫겠다는 말이다. 환범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 너희 아버지 조자단은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낳은 너희들은 돼지 새끼와 송아지 새끼일 뿐이구나.
어찌 너희들 전 가족이 멸족되는 잔꾀에 넘어 간단 말이냐.“
조상은 사마의의 약속을 황제에게 전달하고 모두 황궁으로 돌아왔고 사마의는 조상 형제의가택을 포위하고 연금시켰다. 어떤 사람이 조상 무리들이 몰래 반역을 꾸민다고 밀고했다. 사마의는 조상의 반역모의에 대한 수사를 조상 패거리 상서 하안에게 맡겼다. 하안은 이번 기회야말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 즉 조상과의 연대를 깨끗이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야말로 철저히 수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조상, 조희, 등양, 정밀, 필궤, 환범 및 이승의 7 가문을 대역죄로 탄핵하고 삼족을 이멸시켰다. 사마의가 탄핵보고서를 다 읽은 뒤 이렇게 말했다.
“ 부족한 것이 있소.”
하안이 놀라서 이렇게 물었다.
“ 부족하다니요.
설마 제가 관련이 있다는 말은 아니시겠지요?“
사마의가 말했다.
“ 내가 부족하다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요.”
하안은 즉시 체포되었고 다른 일곱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2년 뒤인 AD251년 왕릉이 조표를 옹립하려는 쿠테타를 일으켰으나 사마의에게 진압 당했고 그 해 8월 사마의가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2> 사마사의 정권 장악(AD252)
AD252년 사마의의 큰 아들 사마사가 군권을 장악하고 대장군이 되었다. AD254년 사마사는 무절제한 황제 조방을 폐위시키고 조모를 황제로 옹립했다. AD255년 관구검과 문흠이 사마사를 토벌하겠다고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눈을 다친 사마사는 후유증으로 곧 죽었다. 47세였다.
<3> 사마소의 정권장악(AD255)
사마사의 동생 사마소가 즉시 대장군 겸 녹상서사가 되어 군권을 이어받았다. 사마소에게는 최대의 난적이 정동대장군 제갈탄이었다. 제갈탄은 제갈량의 동생으로 평소 등양과 사이가 좋았는데 등양은 조상 숙청 때 같이 제거된 터라 자신도 사마소에게 의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스로 10만 대군을 길러 대비하는 한편 오에도 사신을 보내 연대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AD257년 사마소는 황제와 곽태후의 조서를 받들고 26만의 대군으로 제갈탄의 본거지 수춘을 포위했다. 오에서도 손침이 제갈탄에게 응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장기간 포위된 수춘성 내에서 제갈탄과 문흠의 의견대립으로 서로 죽이려는 음모 끝에 문흠이 살해되고 제갈탄은 부하에 의해 참수되면서 반란군은 무너지고 말았다.(AD258) 사마소는 최고직인 상국 및 진공으로 책봉되었다.
AD260년 18살이 된 위나라 황제 조모는 자신의 권위가 쇠퇴된 것에 격분하여 사마소를 토벌할 생각을 세웠다. 상서 왕경에게 그 뜻을 전하자 왕경이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 폐하께서 누구와 무슨 능력으로 하루아침에 이렇게 하신단 말씀입니까.
고질병을 고치시려다가 더 깊게 할 뿐입니다.
화란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마땅히 자세히 살피셔야 합니다.“
조모는 곽태후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외쳤다.
“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죽은 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황제가 직접 칼을 뽑아 들고 나섰다. 그 소리를 들은 시중 왕침과 산기상시 왕업은 사마소에게 달려가서 알렸다. 가충은 심복 성제를 불러 그동안 기른 은혜는 오늘 이날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성제는 그 즉시 달려가서 조모 황제를 시해했다. 사마소에게 조모의 결행을 알린 왕침과 왕업은 무사했으나 알리지 않은 왕경은 주살되었다. 왕경이 죽기 전날 어머니에게 죄송하다고 말하자 왕경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 마땅히 죽을 곳을 얻지 못할까 두려웠는데
이 옳은 일로 죽게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사마소는 피살된 조모를 폐서인시켜 장례를 치렀으며 그 후임으로 조환을 황제로 옹립했다. 위나라 마지막 황제 원제다.(AD260) AD263년 위는 촉한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그 다음해 일어난 종회의 반란도 사마소가 진압하였다.
<4> 세자책봉 : 사마염이냐 사마유냐
사마소의 아내 왕씨는 사마염과 사마유를 낳았다. 사마염이 열 살이나 위인 맏형이었으나 사마유는 재능이 뛰어났고 온화하며 명성이 자자했다. 따라서 사마소는 틈틈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천하는 경왕 사마유의 천하다.
나는 재상 자리를 차지할 뿐
백년 후의 대업(즉 건국)은 마땅히 사마유가 이룰 것이다.“
반면에 사마염은 매우 특이한 상을 지니고 있었다. 팔이 매우 길었고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고 했다. 사마유와는 달리 사마염에게는 배수와 양수와 산도라는 조정 중신들의 지원이 있었다. 사마소가 사마유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할 때마다 이들은 나서서 반대했다. 장자를 폐출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산도)이라고 했고 군주의 덕이 있는 사람은 사마염(가충)이라고 지지했다. 특히 하중과 배수는 총명하고 귀신같은 전략을 세우며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망이 높고 또 하늘에서 내란 특별한 인상을 지닌 것을 보면 누구의 신하가 될 상은 아니라고 치켜세웠다. 사마소가 드디어 사마염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했다.(AD264년10월20일)
<5> 사마염 황제즉위와 통합정치
AD265년 8월 사마소가 54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사마염이 진왕 겸 상국에 올랐다. 그리고 그 해 12월 위 황제 조환에게 양위를 받아 사마염이 진나라 황제로 즉위했다.
(1) 친왕책봉 : 종친의 굳건한 전국 지배체제 구축
사마염이 황제로써 맨 먼저 한 일은 종실을 친왕으로 크게 책봉한 일이다. 위나라는 한나라 종실의 친왕 책봉이 국가의 근본을 크게 위협한다고 해서 종실의 정사간여를 극도로 배제했었다. 그러나 사마염은 가까운 친척을 모두 10개의 친왕으로 책봉하여 봉지를 떼어 주었다. 종조부 사마부를 안평왕에 봉하고 숙부 사마간을 평원왕, 사마량을 부풍왕, 사마주를 동안왕, 사마준을 여음왕 등에 봉하였다. 특히 선왕의 총애를 받은 왕위 세습경쟁자는 대부분 직후 죽음을 당했으나 동생 사마유의 경우 제왕에 책봉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거의 20년 동안 사마염의 보호를 받았다.(사마유는 18년 뒤인 AD283년 조정의 배척을 받아 스트레스로 병사함.독살 가능성도 있었음.37세) 친왕들에게 스스로 관리 임명권을 내려 주었으며 위나라와 달리 종친들도 관리가 될 수 있도록 문호를 열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위나라 종친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어 금고령을 해제해 주었고 수도에 인질을 두어야 하는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2) 과감한 소통언로의 개통
사마염은 최초로 간관을 두어 황제에게 거리낌 없이 할 말을 하게 하였다. 최초로 간관이 된 사람은 산기상시 부현과 황보도였다. 간관 부현은 곧바로 사마염에게 직언을 올렸다.
“ 아직도 공허하고 비루한 인사를 물리치시지 않으시고
근신하지 않는 사람을 징계하시지 않으시니
신은 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AD265)“
사마염은 이런 직언을 매우 좋아했다. 비록 과거의 공이 있어서 가충이나 왕침과 같은 간사한 무리들을 물리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사마염은 훌륭한 신하의 직언을 청취하는 것에 인색함이 없었다.
사마염이 특히 싫어한 일은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상주문이었다. 이미 재가가 났던 사항에 대한 상주문이나 사실상 실천하기 불가능한 일에 대한 상주문이나 말만 번드르르한 상주문을 크게 배격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명령이 실천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와 대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상주문을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AD266)
산기상시 이희가 고위관료들의 부정행위를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현령 유우와 전 상서 산도와 중산왕 사마목 및 상서복야 무해가 관청의 논밭을 훔쳤다는 혐의였다. 사마염이 이렇게 조서를 내렸다.
“ 유우의 범죄는 샅샅이 조사하여 주살시켜 훗날의 모범이 되도록 징계하고
산도와 사마목은 과거 공적을 보아 흠을 물을 것은 없되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희는 고위직에게도 탄핵을 한 나라의 사직(司直)과도 같다.
이를 널리 알리니 모든 신하들은 처리하는 일을 신중하게 할 것이며
이와 같은 은전은 다시는 보기 힘들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사마광은 사마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첫째, 하급관리 유우만 죽이고 고관종친인 산도와 사마목을 면죄시킨 것이 불공평한 것이며 둘째, 이희의 요청을 다 듣지도 않았고 셋째, 그러면서도 이희를 칭찬한 것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국 초기의 상황에서 공신친족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해야 하는 사마염의 관점에서 본다면 관료들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을 요구하면서 과감하고도 파격적인 탄핵을 서슴지 않은 이희를 칭찬한 내심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사마광의 사마염에 대한 혹평은 아마도 사마염의 후기 정치가 난맥상을 보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AD272년 사마염은 우장군 황보도와 어떤 일을 놓고 한바탕 말다툼에 휩싸였다. 산기상시 정휘가 그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무례하기 그지없는 황보도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고 청했다. 사마염이 이렇게 말했다.
“ 충성스럽게 자기 소신을 말하는데
나는 오직 그런 충성스런 말을 못 들을까 걱정될 뿐이다.
정휘는 자기 직책을 뛰어넘어서 망령되게 상주문을 올렸으니
짐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아니냐?“
오히려 정휘를 면직시켰다.
천하를 통일한 사마염이 버젓하게 사예교위 유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를 한나라 황제와 비교하면 누구 같은가?”
유의가 대답했다.
“ 한나라를 망가뜨린 환제나 영제 같습니다?”
은근히 칭찬을 듣고 싶었던 사마염이 깜짝 놀랐다.
“ 어째서 그런가?”
유의의 대답이다.
“ 환제나 영제는 관직을 팔아서 국고에 넣었지만
폐하께서는 사사로이 개인 주머니에 쳐 넣으셨으니
환제나 영제보다 못하면 못했지 낫다고 말 할 수가 없습니다.“
한 참 생각하던 사마염이 이렇게 말했다.
“ 환제나 영제 때 그런 곧은 말을 황제에게 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소.
그런 것을 보면 그런 곧은 신하의 말을 들을 수가 있으니
내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지 않겠소?“(AD282)
(3) 반대 세력의 용인
사마염의 통합정치의 세 번째 특징은 반대 세력에 대한 용인이다. AD268 대사마 석포가 회남지역에서 반란을 준비하는 것 같다는 보고가 회북감군 왕침에게서 올라왔다. 평소 왕침은 석포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와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진나라 최고의 충신 양호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보장했지만 사마염은 석포를 파직시키고 조정으로 소환했다. 석포의 부하 손삭이 그 소문을 듣고 석포에게 달려가서 알렸다. 당장 석고대죄하고 방비를 강화한 것은 반란을 준비해서가 아니라 장차 오나라의 침공에 대비한 것이며 즉시 조정에 출두하겠다고 설명하라고 시켰다. 석포는 손삭이 시킨 대로 따라했다. 사마염은 석포에 대한 의심을 말끔히 풀었다.(AD268)
사마염이 오나라를 정벌할 계획은 오래 전에 세웠었다. 다만 나라 북방의 오랑캐 독발수기능의 침공우려가 있어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나라 황제 손호의 황음한 정치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주변에서 오 정벌을 독촉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병든 양호는 물론이고 익주자사 왕준이 특히 재촉했다. 결국 사마염이 전쟁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AD279) 그러나 내부의 반대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가충과 순욱과 풍담이 끝까지 반대했다. 가충이 말했다.
“ 오 나라 땅은 워낙 광대하므로 다 평정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여름이 되어서 습기가 많고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전쟁을 독촉하는 장화와 같은 무리는 허리를 베어도 사과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순욱과 두예도 같은 표문을 올렸지만 사마염은 이렇게 대답했다.
“ 오나라 정벌은 내 생각이요.
장화나 왕진은 내 생각에 동의했을 뿐이요.“
사마염이 조정 대신들과 갑론을박하는 도중에 오나라가 이미 항복했다는 전갈이 올라왔다. 가충과 전쟁 반대파들은 어쩔 줄을 몰라 궁궐에 엎드려 죄를 빌었으나 사마염은 그들을 모두 용서하였다.(AD279)
(4) 화합의 강조
사마염은 선양받은 조조의 위나라, 멸망한 촉한이나 오나라의 신하들은 대부분 그대로 중용했다. 죽림칠현으로 불리는 위나라 혜강과 완적과 산도를 기용했고 망한 촉한의 황제 유선과 명장 강유, 그리고 오나라 황제 손호마저도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물론 높은 작위까지 수여하여 여생을 편안히 살도록 배려했다.
사마염은 조정의 갈등을 매우 경계했다. 조정에서는 사공 가충과 시중 임개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였고 신료들도 가충파와 임개파로 크게 갈라졌다. 사마염이 나사서 이렇게 말했다.
“ 조정은 하나가 되어야 하오.
대신들도 마땅히 화합해야 하오.“
황제가 직접 나서며 중재하자 부끄럽고 황공한 가충과 임개가 서로 표면적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자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양편은 다른 한 편이 죄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가충이 계교를 생각해냈다. 임개를 인사권을 가진 이부상서로 추천한 것이다. 말하자면 비서실에서 장관으로 옮기게 함으로써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줄여버린 것이다. 이후 풍담과 순욱을 시켜 임개를 참소했고 임개는 곧 파면되었다.(AD272)
가충이 술자리에서 하남윤 유순과 언쟁이 붙었다. 세력을 등에 업은 가충이 유순에게 이렇게 빈정댔다.
“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하지 않으시니
경에게는 하늘도 땅도 없는 것이오?“
화가 치밀어 오른 유순은 가충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 고귀향공은 어디에 있소?”
고귀향공이란 사마소의 명령에 따라 가충이 죽인 위나라 황제 조모를 말한다.(위<3> 참조)
유순의 이 말은 가충 뿐만 아니라 사마염의 아버지 사마소에 대한 도발이기도 했으므로 듣기에 따라서는 역모에 준하는 발언이었다. 사마염은 일단 유순을 파면시킨 뒤 5공에게 유무죄 여부를 심의시켰다. 석포는 제명이 좋겠다고 유죄를 평결했다. 그러나 제왕 사마유는 유순이 말은 그렇게 했어도 예법이나 율법을 어긴 바는 없다고 옹호했다. 사마염은 동생 사마유의 말을 들어서 유순을 국자좨주로 재임용했다. (AD272)
AD273년 사마염이 이렇게 질문했다.
“ 왜 나는 제갈량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없는가?”
촉나라에서 온 번건이 이렇게 대답했다.
“ 등애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아시면서도
이를 바로잡을 수가 없으신데
제갈량을 얻은 신들
풍당의 말과 같이 안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풍당의 말(馮唐之言) 이란 한나라 문제가 염파나 이목과 같은 명장을 얻고 싶다고 하자 풍당이 ‘상은 적고 벌이 엄하면 그런 사람을 얻은 들 쓸 수가 없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사마염은 이 말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AD273)
양호는 가충 패거리들이 장악한 조정과 교류하지 않았다. 당연히 가충, 순욱, 팽담 등과 같은 조정 대신들과 갈등이 형성되었다. 양호는 AD272년 오나라 육항과의 서릉(의창)전투에서 사실상 패전한 후 강릉을 빼앗기고 양번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사마염은 변함없이 양호의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6년 뒤 양호가 늘고 병들어 낙양으로 돌아오자 사마염은 오나라 정벌의 계획을 그에게 물었다. 양호는 싸우지도 않고 이긴다고 장담했다. 오나라 황제 손호의 폭정으로 내부가 이미 붕괴하고 있음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양호는 사마염이 보낸 장화의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 그대가 내 뜻(오나라 정복)을 이룰 사람이오.”
마침내 진나라가 오나라를 정복했다는 전갈을 들은 사마염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 이는 모두 양태부(양호, 羊祜)의 공이다.”
오나라 정벌(AD280) 직후 익주자사 왕준과 안동장군 왕혼은 공로를 크게 다투었다. 원래의 계획은 익주에서 양자강을 따라 내려 온 왕준이 하류인 환성에서 왕혼과 만나서 함께 건업으로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왕준이 왕혼을 지나치고 혼자서 먼저 건업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건업을 함락시킨 것은 왕준의 익주군이었으나 왕혼은 왕준이 명령을 어기고 먼저 나간 것이 명령불복종이라는 것이었다. 괘씸하게 여긴 왕혼은 더 나아가 왕준이 건업의 궁궐의 보물을 훔쳤으며 왕준의 부하가 궁궐에 불을 놓았다고 무고했다. 왕준은 억울했다. 최고의 수훈을 세운 사람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엎는다고 항변했다. 사마염은 전공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유송에게 시켰다. 왕혼파인 유송은 왕혼의 전공이 1등급, 왕준의 전공은 3등급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하여 발표했다. 사마염은 진노했다. 법을 자르고 이치를 잃었다(折法失理)라고 질타했다. 유송을 좌천시키고 논공행상을 새로 실시했다. 왕혼에게는 공작과 8천호, 왕준에게는 후작과 보국대장군의 직위가 수여되었다. 이번 역시 왕준이 왕혼에게 밀린 것으로 나타났다. 왕준이 노골적으로 불평을 내뱉었다. 사마염은 그런 그를 너그럽게 용서했다. 범통이 왕준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 경이 세운 공로는 매우 아름다우나 한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그렇게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왜 끝까지 아름답게 행동하지 못했냐는 것입니다.
개선하는 날 전투 복 대신 평복을 입고 네모 건을 쓰고서
사저에 머물면서 한 마디도 오 정벌을 예기하지 않다가
누가 묻기라도 하면 ‘ 성스러운 분의 덕과 많은 장수들의 공이지
이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상여가 염파를 굴복시킨 힘이고 왕혼인들 부끄럽지 않았겠습니까?“
왕준이 이렇게 말했다.
“ 등애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두려워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인데
정말로 내 속이 좁아 부끄럽군요.“
AD280년 오나라가 멸망하자 황제 사마염이 설영과 오언에게 오나라 멸망의 원인을 물었다. 설영이 이렇게 대답했다.
“ 오나라 황제 손호가 소인을 가까이하고
형벌을 남용하며
대신이나 모든 장수들이 목숨을 보장받지 못하니
그것이 망한 이유입니다.“
오언은 이렇게 대답했다.
“ 오의 군주는 영명하고
재상으로 보필하는 사람들도 모두 현명했습니다.“
사마염이 의아해서 물었다.
“그런데 어찌 망한 것이오?”
오언의 대답이 이러했다.
“ 하늘이 내려 준 복록이 끝나고
세월이 다른 데에 속하게 되었으니
그러므로 폐하께서 잡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마염이 대답했다. “ 훌륭한 대답이군.”
(5) 사마염의 사망과 진나라 몰락
그렇게 영명하고 통합하며 조정의 갈등을 손수 중재하던 사마염도 집권 후반기에는 심각한 실수를 연거푸 범하게 된다. 검소하던 생활양식에서 사치와 향락으로 빠져 들고 양씨 자매를 황후로 선택하면서 치명적인 외척세력의 늪에 함몰되고 만다. 태자 사마충의 책봉과 세자빈 가남풍을 잘못 간택했고 간신 가충과 손욱 등의 간계에 휘말려 그렇게 아끼던 동생 사마유도 제거하게 된다. 사마염이 AD290년 죽고 나자 여러 친왕 세력과 양황후 세력, 그리고 가충-가남풍 세력 간의 암투는 8왕의 난을 거쳐 빠르게 진나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사마염의 전국통일(AD280)은 그의 죽음으로 십년 만에 사실 상 막을 내린 셈이다.
의에게 물음
뒷일을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 제왕 사마유의 문제
장화-순욱
풍담
사마유의 배척
설영에 관한 육회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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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81 죽엽 염즙
285 왕혼 아들 왕제가 아버지 구속
=> 왕우의 비판
289 사마충 교체 문제와 손자 사마휼
289 유송의 상소:
290 사마염의 죽음과 양준 실권장악
267 사마충 황태자
사예교위 이희 유우 산도 사마목 탄핵 상주
사마염의 사면
사마광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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