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15) 2017년의 대선정국, YS를 보면 길이 보인다 (중)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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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치는 2017년 대선정국
새해 벽두부터 언론은 일제히 대선에 대한 다양한 여론조사결과를 쏟아냈다. 10곳 가운데 9곳은 ‘문재인 대세론’과 함께 문재인에 맞서는 경쟁자로 ‘반기문’을 ‘유일한(?) 희망’으로 보도했다. 몇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결과들도 보인다. 한 언론(KBS-연합)은 새해여론조사결과 “자신의 이념성향에 대해 응답자의 41.2%가 중도라고 답했고, 진보 27.2%, 보수 23.6%로 오차범위에서 엇비슷하게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다른 언론(동아)은 “대선에서 절대 투표하지 않을 후보로 반기문 25.4%, 문재인 22.4%”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또 다른 한 언론(중앙)은 “‘지지 정당이 없거나 모른다’는 부동층이 응답자의 29.3%이며...부동층 지지율은 반기문 31.5%, 이재명10.2%, 문재인 9.5%, 안철수 4.9% 순”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조사결과들은 종합해보면 결국 진보세력을 기반으로 한 더불어 문재인의 중도와 보수 세력에 대한 정치적 확장 가능성과 중도와 보수의 희망이 된 반기문의 진보세력에 대한 확장가능성이 앞으로의 대선정국에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난 1월 12일 귀국과 함께 대선행보를 시작한 반기문을 포함한 안철수, 손학규, 새로운 변수로 떠오른 더불어 비문의 김종인, 그리고 유승민, 남경필 등 개혁신당이 개헌을 매개로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도를 아우르는 ‘중도 대연합/통합’을 성사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대선의 향방이 요동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정치권 일각에서는 ‘뉴3당 합당’이니 ‘뉴DJP연합’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대선전이 본격화 되면 1990년 YS의 3당 합당과 1997년 신한국당의 분열, DJ의 진보와 보수의 DJP연합 등이 다시 한 번 정치권의 관심을 받게 될 것 같다.
1987년 대분열이후 위기에 처한 YS
30년 전인 1987년 12월, YS와 DJ 분열이 가져온 대선패배로 ‘군부독재통치 종식의 꿈’이 좌절되면서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거패배의 책임을 둘러싼 YS와 DJ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영호남 갈등은 극에 달했으며 야권분열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길이 되었다. 대선패배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88년 4월 26일로 예정된 제13대 총선 (‘4.26총선’)이 다가왔다. 총선을 앞두고 YS 상도동계를 제외한 민주인사들이 탈당하면서 YS와 통일민주당은 민주세력들로부터 고립되었다. YS의 DJ와 민주세력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은 컸다.
1987년 새 헌법에 따라 1961년 박정희 쿠데타로 사라졌다 17년 만에 도입된 소선거구제로 처음 치러진 4.26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참패했고, DJ의 평민당은 서울에서 ‘황색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JP의 공화당도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제3당으로 정국의 캐스팅보트를 쥐었다. YS는 이인제, 노무현등 젊은 피를 수혈하며 세 확장에 노력했지만 결과는 제2야당으로 전락이었다. 4.26총선은 이념적 성향으로 보면 JP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2보수(민정, 공화) 2진보(통일, 평민)’의 4당 체제를 만들었다. 2017년 지금의 4당 체제(새누리와 개혁보수신당, 더불어와 국민)와 매우 흡사하다.
4.26총선은 그러나 DJ의 주술 같은 ‘4자필승론’대로 철저하게 지역 패권적 싹쓸이에 의한 지역분할이란 새로운 정치지형을 만들었다. YS는 PK를, DJ는 호남을 싹 쓸었고, JP는 역시 충청을, 노통은 TK를 휩쓸었다. 대한민국은 DJ의 ‘4자 필승론의 덫’에 빠졌고 4당은 모두가 전국당이 아닌 지역당이 되었으며 지역패권주의가 확고하게 고착화되었다. 4자 필승론은 충청지역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JP의 정치적 부활을 도왔으며 YS와 DJ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게 했다. 어쩌면 더불어의 문재인에게는 현재와 같은 4당체제가 자신의 대권의 꿈을 실현하는 데는 가장 최상의 정치지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DJ가 그랬던 것처럼 문재인도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4당체제는 문재인에게만 최상일뿐 다른 경쟁자들에게는 최악의 정치지형이기 때문이다.
민주화투쟁의 중심에서 하루아침에 제2야당으로 전락한 YS와 통일민주당은 진보적 민주화 세력들로부터 밀려나면서 PK당으로 고립되었다. YS와 통일민주당은 중도적 보수(개혁적 보수)라는 이념적 성향 때문에 수구적(극우적) 보수와 급진적(좌파적) 진보 사에 끼게 되면서 당시로서는 정치적 정체성이 불투명해 보였고 정치적 위상도 떨어졌다. YS에게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YS에게는 무엇보다도 DJ에게 밀려 제2당이 되고 야권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치현실이었다. “YS는 다른 사람한테 다 지더라도 DJ에게 지는 것은 못 참았다. 단순히 라이벌 의식이 아니라 거짓말쟁이에 진다는 것을 싫어했다”고 박관용은 두 사람 관계를 그렇게 회고했다.
YS의 정치생명을 건 승부수, 1990년 3당 합당
1987년의 대선과 뒤이은 4.26총선이 만들어 놓은 ‘1노 3김’이란 여소야대의 4당 체제에서 야 3당은 정책 공조를 통해 시대적 과제인 ‘5공 청산’을 위한 ‘5공 청문회’를 여는 등 국정을 주도하면서 타협과 협치의 정치 민주화 가능성을 보이며 역동적인 정치 환경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2017년의 야당이 공조하여 탄핵정국을 만들고 ‘청와대게이트 청문회’를 개최하고 특검을 진행하는 것도 당시와 유사하다.
DJ는 제1야당으로서 국정주도권을 잡고 민주세력의 세 확장을 통해 지지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그러나 군사독재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익숙한 노통과 집권여당에게는 국정주도권 회복은 급선무였다. YS와 JP는 DJ가 주도하는 야권공조에 마냥 들러리만 서며 끌려 다닐 수는 없었다. 특히 JP는 야권공조에 참여하면서 한편으로 DJ에 편승한 급진적 진보세력의 통일운동과 그들의 정치세력화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JP가 야권 공조에서 발을 빼면서 자신의 수구 보수적 입장을 보이면서 정치지형은 “2여(보수적 노통과 JP) 2야 (진보적 DJ와 중도적, 개혁적 YS)”로 재편되었다.
1990년 1월 22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 YS, JP와 3당 합당 선언
YS는 DJ에게 밀렸다는 개인적 패배감을 넘어 고착화한 4자 필패의 패권적 지역구도에서 DJ와 대권경쟁을 벌리는 한 시대정신인 군부독재통치 종식도, 민주세력에 의한 정권교체도, 자신의 대권을 향한 꿈도 영원히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YS에게도 DJ가 주도하는 지역 패권적 4당 체제를 깨고 정치지형을 바꾸는 것과 같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한 때에 변화의 물꼬를 튼 것은 JP였다. 당시의 노동운동이 활성화 되고, 재야 학생, 시민사회운동 등 진보세력을 중심으로 통일논의가 활성화 되는 정국상황과 관련 JP는 1988년 6월 “앞으로 보수와 혁신이 갈라져 양립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혁신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 보일 때 보수연합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JP는 DJ를 중심으로 세를 키워가고 있는 진보세력에 대응할 ‘보수대연합’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월 1일 미국 방문 중 JP는 보수대연합을 위한 매개로 ‘내각제 개헌론’ 카드를 꺼내 들었다. 1989년 3월 JP와 노통은 물밑교섭을 통해 합당에 합의하면서 야3당 공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여권은 국정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방안으로 4당 체제 해체와 3당 합당작업을 본격화했다. 당시 3당 합당을 설계하고 추진한 박철언은 당초에는 DJ까지 포함한 보수대연합을 추진했다고 한다. 평민당내 진보세력 배제를 전제로 DJ에게 접촉했으나 DJ는 제1야당으로서 확실하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3당 합당은 불필요 했을 뿐 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우호적 지지기반인 진보세력의 배제를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고립되어있는 YS는 3당 합당 제안을 받고 군부독재세력이란 호랑이를 잡고 자신의 대권을 꿈을 이루기 위한 일석이조의 전략적, 전술적 판단으로 제안을 수용했다. YS는 자신에게 쏟아질 민주세력을 비롯한 정치적 동지와 지지자, 국민으로부터 받게 될 ‘배신자’라는 비난과 수모를 감당하며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 ‘사즉생 (死卽生)의 승부수’를 던졌다. YS와 JP, 노통은 ‘동상이몽의 3당 합당’에 전격적으로 합의했다. 1990년 1월 22일 결과를 발표하고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YS의 통일민주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YS의 지상과제, ‘호랑이 토멸’
3당 합당으로 정국은 일순간에 218석의 거대여당과 70석의 DJ당으로 개편되었고, TK와 PK, 충청의 지역연합을 가져오면서 정치지형을 ‘호남 대 비호남’이란 새로운 구도로 바꾸어 버렸다. 3당 합당은 그동안 4자필승론이 초래한 지역패권주의에 기대어 자신의 정치지형을 확장하고 있는 DJ에게 정치적 고립이라는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DJ와 호남, 그리고 이념적으로 급진적 진보세력의 정치적 고립이 현실화 되면서 DJ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4자 필승의 덫에 빠지고 말았다.
DJ와 진보적 민주세력들은 YS 3당 합당을 군부독재정부의 손을 잡아 그 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독재 권력과의 ‘밀실야합’이고 민주화세력에 대한 ‘정치적 배신’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DJ는 자신과 호남고사를 위한 반DJ, 반호남 연합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DJ도 결국 1997년 대선에서 JP와 손을 잡고 ‘DJP연합’이라는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야합’을 연출하게 될 줄을 당시로서는 자신도 몰랐다. 통일민주당의 이기택, 김상현, 김광일, 노무현, 김정길 등은 명분 없는 정치적 야합이라며 YS에 반기를 들고 신당 행을 거부하며 소위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YS는 자신의 선택을 ‘구국의 결단’이라며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 간다”는 말로 변호했다. YS의 ‘호랑이토멸론’은 변명으로 치부되었지만 YS는 자신의 말대로 대통령취임 후 즉각 호랑이 토멸에 나섰고 호랑이는 물론 호랑이 굴까지 초토화 시켰다.
그러나 당시의 YS에게는 당장 자신에게 쏟아지는 배신자라는 사회적 질타를 감내하며 호랑이들에게 잡혀 먹히지 않고 살아남는 일이 급선무였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 YS에게는 어디에도 대권을 향한 꽃가마도 비단 길도 없었다. YS는 당권과 대권 장악을 위한 ‘사느냐 죽느냐’의 한 판 싸움을 벌려야 했다. YS는 명목상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지만 당은 민정계가 장악하고 있었다. YS는 민자당 내 ‘노태우 대통령의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은 물론 박태준, 박준규, 이종찬 등 민정계 중진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YS는 3당 합당 시 합의한 ‘내각제 개헌’에 관한 비밀문서가 언론에 유출되어 공개된 사건을 기회로 이를 무효화하고 ‘대선후보 조기가시화’를 주장하며 관철되지 않으면 탈당도 불사하겠다고 당무를 거부하며 노통과 민정계를 압박했다. 계파 갈등 속에 3당 합당이후 처음 치른 1992년 제14대 총산(‘3.24총선’)에서 민자당은 과반수도 확보하지 못하고 대패했다. YS는 민자당의 대선패배를 계기로 후보조기가시화로 갈등을 빚어온 민정계에게 대통령후보 경선을 타협안으로 제시했다. 노통은 YS제의를 거부할 수 없었다. YS는 ‘YS 대세론’을 앞세워 이종찬과의 경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민자당 대선후보가 되었다. 민자당으로서는 1992년 12월 대선에서 DJ를 상대할 수 있는 대선주자로는 YS 이외 대안이 없다는 ‘대안 부재론’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YS는 1992년 12월 19일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DJ는 정계은퇴선언을 해야만 했다.
2017년의 새로운 대선지형, ‘문재인 대세론’ VS. ‘반기문 희망론’
2017년 대선은 헌재의 탄핵시계가 빨라지면서 모두의 예상처럼 3월 초순경 탄핵결정이 나면 2개월 후인 5월 초순경 실시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새해를 맞아 언론사가 발표한 대선후보 지지도에 대한 여론조사들은 일제히 ‘문재인 대세론’를 보도했다. 친문에서는 반색을 하였고 문재인도 마치 대통령이 된 것 같은 정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문재인에 도전하는 이재명, 박원순, 안희정 등도 문재인 대세론을 꺽기에는 역부족이고 결국은 대선경선 흥행을 위한 바람잡이 역할로 그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당도 문재인의 대선후보를 기정사실로 한 정치일정을 잡고 대선후보조기확정을 위한 정치일정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더불어 일각에서는 1997년과 2002년의 ‘이회창 대세론’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을 경계삼아야 한다며 대세론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귀담아 듣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또 언론들은 이제 막 국내 정치에 뛰어든 반기문이 문재인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경쟁상대자라고 보도했다. 반기문이 친박과 친문을 제외한 중도와 보수를 아우르는 제3지대인 비문진영의 ‘유일한 희망’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반기문 희망론’이 현실이 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현실정치의 기반이 없는 반기문으로서는 제3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안철수, 손학규, 친문패권을 경계하는 김종인과 김부겸, 그리고 개혁보수신당의 유승민, 김무성 등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 등 제3지대의 모든 정파들과 손을 잡아야만하고 더 나아가 ‘반문연대’ 또는 ‘중도 대연합(통합)’을 만들어내야 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촛불정치를 겪으면서 2030세대들의 정치의식 강화와 정치참여로 강화되고 있는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진보화 추세에 비추어 2030세대들의 지지기반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반기문은 2017년의 시대정신인 제왕적 대통령제와 권위적 통치체제의 청산과 민주주의 성숙을 위한 개헌논의를 활성화하고 ‘선개헌 후대선’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추진을 위해 안철수, 손학규, 김종인, 김부겸, 유승민, 등 제3지대 정치지도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와 소통을 하고 이들과 ‘개헌연대’를 발족시키는데 발 벗고 나서야 한다. 그리고 국가혁신을 위한 정부와 국회 등 정치개혁과 재벌중심 경제개혁, 그리고 세계적인 ‘힘 우위와 국익우선 정치’의 부활, 북핵 위협 등 통일안보외교 등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국가혁신 아젠다’에 대한 정책플렛폼을 제시하면서 합리적 진보/개혁적 보수의 지도자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야 한다. 이 경우 결정적 변수는 반기문이 1990년 3당 합당당시 자신을 던지고 호랑이 굴에 뛰어든 YS와 같은 강한 ‘권력의지’와 결단력, 국가개조를 위한 개혁의지, 그리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2030세대에서 5060세대까지, 그리고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정직과 화합, 통합과 소통의 리더십’을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뉴 3당 합당/뉴 DJP연합’ 또는 개혁적, 진보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모두 아우르는 중도 대연합(통합) 또는 대연정을 만들어 통합과 화합을 실천하고 소통하는 정치인의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반기문을 비롯한 제3지대의 모든 대권후보들이 참여하는 경선과정을 거쳐야하고 거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대권후보가 되어야만 문재인과 1:1 대선 구도가 만들어 질수 있고 그래야만 1992년 대선과 같은 YS와 DJ가 경쟁했던 것과 같은 예측 불허의 ‘빅 매치’가 성사될 것이다.
지난 해 말인 12월 28일 광주를 방문한 안희정이 ‘광주선언’을 통해 “오늘 일부 호남 정치인과 국민의당 분들이 얘기하는 제3지대 정계 개편을 반대한다. 그것은 문재인이 밉다고 1990년 3당 야합 같은 또 다른 친노 고립 구도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은 바로 ‘뉴 3당합당’이나 ‘뉴 DJP연합’ 즉 ‘중도 대연합(통합)’을 의식한 발언이다. 더불어는 반기문과 안철수, 손학규, 김종인, 개혁신당 등이 제3지대에서 결집한다면 대선이 ‘반문연대와 문재인’의 대결이 되면서 문재인에게는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으로 보고 ‘국민의당이 개혁신당과 연대하는 것은 호남에 대한 배신’이라고 국민의당을 압박하는 한편, ‘빅 텐트론’이라는 친노와 친문을 제외한 ‘제3지대 연대’를 주장하는 손학규에게는 ‘정계를 은퇴하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더불어의 친문은 DJ의 4자필승론처럼 다자구도가 현 상황에서는 ‘문재인 대세론’에 유리하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일각에서는 친노-친문패권의 급진 좌파적 패거리 이미지 탈색을 위해 1997년 DJ가 좌파 이미지 세탁을 위해 보수인 JP를 끌어들인 소위 ‘DJP연합’과 같은 ‘신DJP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며, 야권의 전형적인 방식인 ‘야권연대론’ (또는 ‘야권후보단일화론’)을 다시 주장하고 있으나 실현가능성은 그렇게 커보이지는 않는다. 그동안 문재인과 친문세력이 보여준 ‘분열과 배신의 패권정치’가 당 안팎에 남긴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대선이 가까워지면 실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현재로서는 예측불허다. ‘정치는 생물’이란 말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실감나는 지금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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