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가뜨리는 힘, 내관(#3) : 진(晉)을 멸망시킨 잔학한 가황후와 동맹(董猛)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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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가 망하는 이유가 어찌 단순하겠는가마는 그 중에서도 황제의 최측근에 붙어서 정치와 재정과 인사와 군사권을 마음대로 주무른 내관, 즉 환관만큼 국가존망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따로 없음을 중국역사는 환한 거울처럼 보여 준다. 수천 년 중국 역사를 통해 나쁜 이름을 남긴 수많은 내관들의 면면을 깊이 살펴보면 나라를 망가뜨리는 그들의 행동양식을 관통하는 몇 가지 중요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첫째로,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위엄과 복록이다. 그들에게서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든가 효도라든가 우애와 같은 전통가치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내관이 대개 극빈층 출신이라서 축재에 매우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나라에 대한 충성이나 백성에 대한 어짐(仁)이나 혹은 부모형제에 대한 효제와 같은 고상한 유가적 가치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별로 없거나 알아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도 않았다.

 

둘째로, 내관들이 모색하는 최고의 절실함은 오로지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눈에 들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식에서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총애가 그들 권력의 원천적 뿌리였기 때문이다. 황제가 즐기는 오락이라든지 황제가 즐겨 찾는 여자를 찾아서 공급함으로써 끊임없이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이 그들의 지상과제가 된다. 어떤 황제는 특히 오래 살고 싶어서 장생술 혹은 방생술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탁월한 도술을 가졌다는 사람을 찾아 소개하는 일이 내관의 주된 일이 되기도 했고 또 내관 스스로가 중독성이 큰 독약을 황제에게 불로장생약이라고 속여 먹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머리나 입에서 황제의 뜻과 다른 생각과 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셋째, 황제의 눈과 귀와 성총(聖聰)을 가림으로써 의도적으로 황제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렇게 황제의 판단을 흐리게 해야만 황제가 내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권력이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었다.

 

 넷째, 권력을 오로지하기 위해서는 쓴 소리를 마다않는 충신들이나 황제와 가까운 종친 혹은 인척 등 경쟁자를 지방으로 내치고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정적이라면 황제의 친인척은 물론 사대부세력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 제거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황제마저도 제거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다섯째, 내관들은 무리를 이루어 세력을 이루었지 절대로 홀로 따로 놀지 않았다. 배경이나 실력이나 모든 면에서 황제의 친인척 혹은 사대부에 비해 떨어졌으므로 그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지속하기 위해서는 내관들끼리 똘똘 뭉칠 필요가 있었다. 전한 원제 시절의 석현 3인방이나 후한 환제 쿠테타의 주역 오후(五候)나 영제시절의 10상시가 모두 내관의 집단세력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여섯째, 내관들은 권력영역을 무한정 넓혀 나갔다. 처음에는 황제의 옷과 치장, 목욕, 음식제공 및 심부름 등과 같은 허드렛일이 그들의 주된 업무였으나 점차 조정의 재정 인사와 같은 국내정치는 물론 외교군사 방면으로 권력영역을 넓혀 나갔다.  황궁수비의 군사권은 전통적으로 내관들이 장악하고 통제했으며 뿐 만 아니라 지방의 군사권(예를 들면 당나라 시대의 절도사)을 통제하기 위해 내관에게 감군(監軍)이라는 직책을 부여하여 모든 절도사의 군권을 일일이 통제지휘감독하게 하였다.

 

일곱 번째, 내관들의 세력을 대대로 유지하기 위해 양자를 입양하여 권력을 세습하기도 하였다. 정상적인 가정의 자녀를 내관의 양아들로 입양하여 권력을 세습하기도 했다. 조조의 친아버지 조숭은 후한 환제 때 내관 실력자였던 조등에게 입양된 대표적인 예였다.

위와 같은 내관들의 몇 가지 기본 행동원칙으로 인하여 중국 역사에 나타난 여러 나라들이 어떻게 망해갔는지 자치통감에서 몇 가지 예를 찾아 옮겨본다. ​


  

(1) 진무제 사마염(司馬炎)의 사망과 진혜제 사마충(司馬衷) 등극(AD290년 4월)

 

삼국을 사실상 통일한 것은 위나라의 조조를 무너뜨린 진(晉)나라 무제 사마염이다.(AD265) 사마염에게는 서로 사촌 지간인 양염과 양지의 두 양(揚)씨 부인이 가장 총애를 받았는데 양지의 아버지 양준은 사실상 무제에 버금가는 조정 실세였다. AD290년 사마염이 병환으로 혼미한 상태에 빠지자 홀로 간병하던 장인 양준은 무제가 곧 죽을 것으로 판단하고 궁정 요직을 모두 심복으로 바꾸어 놓았다. 혼수상태에서 잠깐 깨어난 사마염은 황실의 인물들이 모두 교체된 것을 보고 놀라서 양준에게 꾸짖듯 물었다.“어찌 마음대로 사람을 바꿀 수가 있소?” 불안한 사마염은 삼촌인 사마량에게 양준과 함께 국정을 다스리도록 몰래 지시를 내렸다. 양준은 심어둔 심복을 통해서 사마염의 비밀지령을 빼앗아 버렸다. 사마염이 다시 혼미한 상태에 빠져 들려고 하자 다급한 양황후가 곁에서 사마염에게 독촉하듯 물었다.“양준에게 국정을 보정하게 하셔도 되겠습니까?” 사마염이 약간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급히 양황후가 화익과 중서령 하소를 불러 구두조서를 작성하게 했다. “양준을 태위(국정최고책임자), 태자태부(태자대스승), 도독중외군사(군통수권), 시중 및 녹상서사에 임명한다.” 양황후와 양준은 권력행사에 장애물인 여남왕 사마량을 임지인 하남성 허창으로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면서 잠시 깨어난 사마염이 “여남왕은 왔는가?” 라고 물었다. 주변에서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맥이 풀린 사마염은 죽고 말았고(55세) 태자 사마충이 황제에 올랐다.(AD290년 4월) 제대로 정권교체의 문제를 사전에 고명으로 정리해 두지 않은 채 사마염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마염은 태자 충이 재주가 없고 아둔하여 폐위시킬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자기가 사마충에게 내려 준 궁녀에게서 나은 유일한 적손 사마휼이 매우 영특한 것을 보고는 아들 충을 폐위시키지 않았다. 약 8년 전(AD282년)궁궐에 화재가 났는데 다섯 살이던 적손 사마휼이 “불에 황제의 얼굴이 비치면 안 됩니다.”라고 하며 할아버지인 자기의 소매를 끌어 당겨 피신시키는 것을 보고 매우 기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마염은 그런 사마휼에게 최고의 유학자 유식을 스승으로 붙여주어 교육을 시켰다. 한번은 화교라는 사람이 사마염에게 이렇게 걱정을 했다. “황태자 사마충은 순수하고 고풍스런 기풍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말세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짓으로 행동하니 폐하의 집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사마염도 묵묵히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후 사마염이 순욱에게 이렇게 말했다. “ 태자가 근래에 입조하는 것을 보니 좀 나아진 것 같은데 그대가 세상물정을 잘 가르치도록 하시오.” 순욱이 이렇게 대답했다. “ 태자는 명석하고 우아한 기풍이 있습니다. 진실로 황상이 보신 것과 같습니다.” 곧바로 화교가 들어가서는 “황태자의 성품은 예전과 다른 것이 없이 똑 같습니다.” 무제는 기쁘지 않았다. 사마충은 정말 무능했다. 저녁에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는 주위에게 이렇게 물었다. “개구리가 저렇게 우는 것은 관부에서 시켜서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제 스스로 우는 것인가요?” 또 한 번은 “밥을 굶는 사람들은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요?“ 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2) 양준의 혼정으로 민심이 떠남.

 

사마염이 죽고 조정의 인사, 재정, 군사 및 궁내 모든 권한은 양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양준의 직함, 즉 태위(국정최고책임자), 태자태부(태자대스승), 도독중외군사(군통수권), 시중 및 녹상서사도 그것을 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보다 더 높은 양태후 자리에 자신의 딸 양지가 있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만 양준의 권위에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사마염의 삼촌 사마량이 있었지만 상황이 불리함을 알아채고 재빨리 임지인 허창으로 도망쳐 피했으므로 조정에서 양준을 대적하거나 견제할 자는 없었다.   

 

전권을 장악한 양준의 정치는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민심과 평판을 돌리려고 모든 관원의 품계를 올려주고 훈작을 더해 주었다. 좌군장군 부지가 황제의 상례 중에는 그렇게 봉작을 올려 준 사례가 없다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직급과 훈작을 올려주고 또 백성들의 조세도 면제해 주었다. 사마충이 황제(혜제)가 된 후 양준의 주도로 베푼 훈작이 사마의의 혁명 초기나 오나라 평정(AD280)보다 더했으니 이렇게 가다가는 국가재정이 파탄날 것이었지만 그런 지적도 소용없었다. 부함은 황제의 나이가 어리지 않으므로(당시 32세) 조만간 황제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들을 리가 없었다. 양준은 조정의 모든 핵심부서에 자신의 심복을 깔아놓았고 모든 황제의 조서는 반드시 먼저 양준 자신이 살펴 본 뒤에 양태후를 거쳐 내려 보냈으므로 자신의 권력은 절대적으로 공고하다고 믿었다. 자치통감은 양준의 정치가 ‘엄격하면서 동시에 자잘하고 집요하면서도 괴팍하여 중외가 매우 싫어했다(严碎专愎中外多恶之, 자치통감 권 82, AD290년 4월)’고 했다. 그러나 양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진지 오래 되었고 양준 정권 붕괴의 방아쇠는 의외로 황실 내부, 즉 가황후와의 갈등에 의해 당겨졌다.

 

 

(3) 가비(賈妃)의 간택(AD271)과 가황후(AD290) 

 

여덟 살이던 AD267년 태자로 책봉된 사마충의 부인 가비(이름 가남풍)는 가충(賈充)의 딸이다. 가충은 사마염의 아버지 사마소집권 시절부터 총애를 받아오던 권신으로써 교활하고 아첨을 잘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순의, 순욱 및 풍담과 한 패거리가 되어 조정을 농단했으므로 당시 조정의 대신들이 다들 꺼려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사마염이 동생 제왕 사마유를 제치고 태자로 책봉될 당시 크게 공헌을 했으므로 사마염에게서도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조정의 대다수 대신들은 흉노출몰이 빈번한 진주와 양주(감숙성지역)도독으로 가충을 몰아내려고 했었다(都督秦凉二州諸軍事). 다급해진 가충이 순욱에게 대책을 물었다. 순욱은 태자와 혼인으로 결합하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요청했다. 가충은 이미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딸을 사마유(사마염의 경쟁자)에게 시집보낸 일이 있었다. 사마염은 태자 사마충의 부인으로 당시 조정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위관의 딸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마염은 이렇게 말했다. “위씨는 다섯 가지 장점(賢, 多子, 美, 良, 白)이 있고 가씨는 네 가지 흠(妬忌, 無子, 醜, 短, 黑)이 있소.” 가충의 처 곽외는 많은 황금과 뇌물로 양황후를 꾀었고 순욱 등의 무리를 동원하여 집요하게 사마염을 설득한 결과 태자보다 세 살이나 많았고 추한 가씨를 태자비로 만드는데 성공했다.(AD271년) 자치통감에는 태자가 두려워했다고 할 정도로 가비는 무서운 여자였다. 

 

그런 가비가 사마염이 죽게 되자 황후가 된 것이다. 가비는 태자비일 때 이미 몇 사람을 죽인 일도 있고 임신한 남편의 시첩에게 창을 던져 낙태시킨 적도 있어서 황제인 사마염에게 유폐당하고 폐위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 가충의 지위가 높고 또 순욱 삼인방(순욱, 순의, 풍담)의 도움은 물론 양태후의 간절한 탄원으로 간신히 폐출을 면했었다. 그러나 가황후는 그런 양태후에 대해 고마움은커녕 원한을 키워왔는데 그것은 자신보다 양준과 양황후의 권세가 더 높은 것에 대한 앙심도 있었지만 가황후 스스로 정치에 대한 야욕이 누구보다 더 강했는데 그것을 양준이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가황후 스스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손과 팔과 같은 심복이 필요했다. 이 때 등장하는 인물이 동맹(董猛)이다.  

 

 

(4) 가황후와 환관 동맹(董猛)의 양준 축출(AD291년 3월 8일) 

 

동맹은 사마충이 태자일 적에 동궁에서 잡역을 담당하던 환관이었다. 자기가 모시던 사마충이 황제가 되자 동맹은 궁궐 내 모든 환관을 총괄하는 사인감이 되었다. 가황후도 십 수 년이란 긴 세월동안 동궁에서 같이 생활해 온 환관 동맹을 누구보다도 더 신뢰했다. 가황후는 동맹과 그의 일당인 맹관과 이조를 불러 양준을 타도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양준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마량에게 이조를 보내 군사적 지원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사마량은 협조를 거부했다. 동맹과 가황후는 다시 이조를 형주도독이자 황제의 이복동생인  사마위에게 보냈더니 사마위는 흔쾌히 찬동했다. 사마위는 일단 양준에게 황제를 알현하겠다고 요청했다. 전혀 낌새를 채지 못한 양준이 사마위와 양주도독 사마윤(이 또한 황제 사마충의 이복동생)의 입조를 허락했다.(AD291년 2월 20일) 약 보름 뒤(3월 8일) 사마위와 사마윤이 입조하는 것을 계기로 동맹, 맹관 및 이조는 안팎에 계엄조치를 내려 양준을 무고죄로 얽어매고 가택 연금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동안공 사마요와 400군사를 양준의 집으로 보내 양준의 일족은 물론 장소, 이빈, 단광 무무 등 수 천 명의 양준 무리를 족멸시켰다. 양준이 차지하던 국정 최고자리 태재는 사마염의 삼촌인 사마량이 낚아챘다. 양준축출 쿠테타의 겉면에는 사마량과 사마위가 있었지만 그 깊은 배후는 가황후와 동맹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조종한 것이다. 동맹은 그 공로로 본인이 무안후가 된 것은 물론 세 형이 모두 훈작을 수여 받았다.     

 

 

(5) 가황후와 동맹의 사마량 제거(AD291년 6월12일) :  진나라 8왕자의 난의 서막

 

사마량이 집권하자 그의 정치는 과거 양준의 정치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민심을 얻기 위해 1000명이 넘는 사람에게 공훈을 수여하여 국고를 바닥냈고 특히 양씨 대신 가씨의 친척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가황후의 오빠 가모, 외삼촌 곽창, 남동생 아들 가밀 등이 정치실세가 되었다. 이번 거사에 큰 공을 세운 황족 초왕 사마위나 동안왕 사마요도 만만치 않은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문제는 가황후의 포악함이었다. 가황후는 제일 먼저 눈엣가시와 같은 양태후를 유폐시킨 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서인시켰다. 가황후의 포악함이 날로 더해가자 동안왕 겸 상서좌복야 사마요가 가황후 폐위를 비밀 모의하였으나 당연히 가씨 실세들은 반대했다. 

 

쿠테타 실력자 중의 하나인 초왕 사마위는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여 가황후 만큼이나 주변의 원성을 높이 사고 있었다. 태재 사마량과 태보 위관이 초왕 사마위의 병권을 빼앗아 배외에게 주려고 사마위를 봉지로 내쫓으려고 시도했다. 크게 반발한 사마위는 참모 공손굉과 기성을 통해 가황후를 움직여 봉지로 가지 않도록 조치했다. 나아가 가황후를 설득하여 이 기회에 사마량과 위관을 몰아내도록 계략을 꾸몄다. 즉, 사마량과 위관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사마량이 그 자리를 차지할 역모를 꾸몄다고 참소했다. 가황후는 황제를 움직여 조서를 내려 “사마량과 위관을 파면하라.” 명령을 내렸다. 사마량을 집으로 보낸 뒤 군사를 보내 사마량의 가택을 포위했다. 사마량의 참모 유준이 ”싸워 볼만 하다.“고 했지만 사마량은 ”나의 붉은 마음을 쪼개어 보여주고 싶다.“고 하며 무력저항을 포기했다. 결국 사마량의 전 가족은 이조의 손에 죽었다.(AD291년 6월 12일) 이 사건이 20년에 걸친 진나라 ‘8왕자의 난(AD290-AD310)’의 첫 서막이다.

          

 

(6) 가황후와 동참의 사마위 제거(AD291년 6월13일)

 

이제 군권은 사마량에게서 사마위로 옮겨왔다. 사마위를 잡으려다가 오히려 사마량이 잡힌 꼴이 되고 만 셈이다. 그 이면에 가황후와 동맹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마위의 참모 기성은 사마위에게 가씨의 실세인 가밀과 곽창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위는 망설였다. 사마위와 가씨 세력이 갈등을 내보일 즈음에 태자(사마휼) 소부(스승)인 장화가 내관 동맹을 불렀다. “가서 가황후에게 말하시오. 초왕 사마위가 두 대신(사마량과 위관)을 죽였으니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천하의 권위가 그에게 쏠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제와 황후는 어찌 편안하시겠소? 그를 서둘러 다스려야 합니다.” 가황후도 같은 생각이었다. 장화와 가황후와 동맹이 나서서 아둔한 황제를 설득하였다. 황제가 마침내 조서를 내렸다. “초왕 사마위가 조서를 위조했으니 그의 말을 듣지 마라.” 이 조서 한 마디에 초왕 사마위의 모든 병사들이 칼을 놓고 도망쳤다. 군사들이 초왕을 사로잡고는 목을 베었다.(AD291년 6월 13일) 사마위의 참모 공손굉과 기성의 삼족도 이멸되었다. 이것이 진나라 8왕자의 난의 제2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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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가황후 독재정권의 무능함과 곳곳의 반란과 재난(AD292-AD297) 

 

이제 가황후와 동맹의 독재를 막는 가로막는 세력은 모두 제거되었다. 황제는 아둔하기 짝이 없었고 훈구공신들은 이미 진무제 사마염이 죽기 전에 다 죽었으며 사마염의 형제나 종친들 중에 세력을 형성할 만한 자들은 거의 소탕되었다. 이제 가씨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가모가 산기상시 및 시중이 되었고 배외는 시중을 맡았으며 배해는 중서령이 되었고 왕융은 우복야가 되었다. 자치통감의 사마광은 장화의 노력으로 안팎의 정치가 잘 다스려져 큰 문제가 없이 나라가 굴러가는 듯하다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가황후와 동맹 등의 내관들이 전횡이 숨겨져 있었으며 소리 없이 진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유폐된 양황후는 가후의 박대에 못 이겨 곡기를 끊고 버티다가 죽었다.(AD292년 2월1일) 가황후는 양태후의 원혼이 하늘로 올라가 사마염에게 원망할 것이 두려워 시체를 엎어 장례를 치렀다. 우박이 내려 패인 땅의 깊이가 3척이나 된다고 했고(AD293년) 무고에 큰 불이 나서 모든 무기가 불타기도 했다.(AD295) 저족, 강족, 호족의 반란이 끊임없이 변경에서 일어났고(AD296) 관군은 반란군에게 연전연패했다.(이들 반군은 모두 자립하여 5호16국의 뿌리가 된다.) 무능한 왕융과 같은 사람을 국정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는 바람에 정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사도가 되어서 시대의 병폐를 고치기보다는 가무와 유람을 즐기고 탐욕과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며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두장사를 하면서 종자를 가지고 나무를 기를까 걱정이 되어 자두의 씨를 파내고서 팔기도 했다. 사람을 뽑을 때의 질문은 “도교와 유교에 차이가 있는 거요?”라고 물었고 “다르지 않을까요?(將無同)“ 라고 대답하면 합격시켰다고 해서 뽑힌 사람을 ‘세 마디 관리(三語椽)’ 라고 빈정댈 정도였다.(AD297)

 

 

(8) 제1차 가황후 폐출 모의(AD299년 6월)

 

자치통감은 가황후가 음란포학하였다고 했다. 태의령 정거와 사통했고 길 가는 사내를 납치하여 궁궐로 들이기도 했으며 들킬까 봐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고 했다. 이런 가황후에 대해 가씨 종친들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실세였던 가모, 배외, 장화가 가황후 폐출을 모의 했다. 그리고 그 후임에 황태자 사마휼의 생모인 사(謝)씨를 세울 계획이었다. 다만 황제 사마충이 반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걱정이었다. 배외가 대답했다.“그렇긴 한데 가후의 악행이 점점 더 심해지니 그렇다고 마냥 서서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소?” 장화가 배외(가후의 이종사촌)와 가모(사촌오빠)에게 이렇게 제안을 했다. “그대는 그래도 가황후의 가까운 인척이시니 조신하시도록 설득해 보시지요.” 배외와 가모는 가황후의 어머니 곽성군을 찾아가 훈계의 말씀을 드려 달라고 부탁했다. 가후는 어머니 곽성군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사촌오빠 가모를 배척하며 멀리했다. 가모는 화병으로 죽었다.(AD299년 6월) 황제는 배외를 가모의 후임으로 상서복야에 임명했다. 배외는 외척에 대한 지나치게 기울어진 인사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사양했지만 소용없었다. 다들 임명을 거부했으므로 별로 시킬 사람도 없었지만 꼭 믿는 외척 외에는 시킬 생각도 없었다. 가황후의 가씨와 곽씨(가후의 외가)의 전횡으로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부패는 극치에 달했다. 

 

 

(9) 황태자와 가황후의 갈등(AD299년)과 황태자 타살(AD300년 3월)   

 

무능한 황제 사마충의 유일한 아들 황태자 사마휼(AD278년생)이 스무 살이 넘어 태자비를 맞을 때가 되었다. 가황후의 어머니 곽성군은 또 다른 딸 가오와 한수 사이에서 낳은 외손녀를 태자비로 원했지만 놀랍게도 생모인 가오와 가황후는 그것을 반대했다. 속으로 황태자를 폐위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가밀이 태자 폐위를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했다. 황태자가 즉위하면 그들의 세상도 순식간에 끝나는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똑똑한 황태자 사마휼이  가황후와 가씨 및 곽씨 일족의 폭정을 매우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황후는 스스로 임신했다고 떠들면서 한수의 아들 한위조를 궁으로 데려와 키우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이 가황후의 속내를 깨닫기 시작했다. 황태자 사마휼을 폐위시키고 한위조를 황태자로 세워서 차기 정권을 장악한다는 계산임이 분명했다. 태자 측근들은 태자를 졸라서 가황후를 서둘러 폐위시키도록 주청을 올리라고 재촉했다. 그동안 진나라 정권을 받들고 왔던 대신 장화의 생각이 중요했다. 황태자 측 유변이 장화에게 가후폐위모의를 들었냐고 물었다. 장화가 모른 척했다. 유변이 장화에게 나를 여기까지 등용시켜 놓고도 나를 못 믿는 거냐고 물었다. 그제야 장화가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유변이 대답했다. ”동궁에는 인재가 많습니다. 공께서 명령만 하시면 가황후 폐위는 황문(=환관) 두어 명의 일거리 일 뿐입니다.“ 이 두 사람의 밀담을 누군가 엿듣고 밀고했다. 유변은 음독자살했지만 장화는 죄를 받지 않았다. 장화가 밀고했다는 설이 나오는 이유이다. 

 

태자의 음모를 알아차린 가황후는 태자 사마휼의 아들 사마반이 병중에 있어 경황이 없는 틈을 타서 황제가 몸이 불편하니 와서 문병하라고 부른 뒤 별실에 태자를 가두고는 술을 강제로 마시도록 했다. 태자는 독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거절했다. 옥리가 불효자라고 꾸짖자 태자가 할 수없이 마셨다. 그리고 취중에 가후가 불러 주는 대로 썼다. ” 황제폐하는 스스로 끝내십시오. 아니면 제가 들어가 제 손으로 끊겠습니다.“ 가황후가 이 편지를 황제에게 전했고 황제는 모든 대신들에게 보여 주었다. 조서가 내려졌다.”사마휼에게 죽음을 내리노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조서의 진위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사형집행 반대 논의가 길어졌다. 가황후와 동맹은 조정의 의논상황이 불안해 지자 일단 태자를 폐서인하자고 하면서 금용성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황문을 시켜 태자와 반역을 공모했다고 거짓으로 얽어매어 위증하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황후의 잔인함에 분노하면서 가황후를 처단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 중심에는 조왕 사마륜이 있었다. 사마륜은 1차 8왕자의 난 때 죽은 사마량과 동복으로 사마염 동생이다. 그러나 사마륜의 간교한 심복 손수는 먼저 가황후를 폐위시킬 것이 아니라 가황후가 먼저 황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을 기다린 뒤 가황후를 폐위시키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함으로써 두 강적, 즉 황태자와 가황후를 동시에 제거할 수 있게 때문이다. 결국 사마륜은 가황후의 액션을 기다렸다. 그리고 황태자 폐위 소문을 은근히 퍼뜨려 가황후 측으로 하여금 초조하게 만들었다. 가후는 내연남 태의령에게 독약으로 독살하려고 했으나 태자가 먹지 않자 음식 넣기를 끊어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궁녀들이 몰래 음식을 넣어주어 실패하자 결국 화장실에 들어 간 황태자 사마휼을 타살시켜 버렸다.(AD300년 3월)

     

 

(10) 사마륜의 쿠테타와 가황후, 동맹의 처형(AD300년 4월)

 

가황후가 황태자를 죽이자 기다리던 사마륜 일당이 일어났다. 먼저 깊은 새벽에 거짓 조서를 만들어 이렇게 명령했다. “ 중궁(가황후)과 가밀이 모의하여 나의 태자를 죽였으므로 중궁을 폐위시키며 이 명령을 따르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나 만일 따르지 않으면 삼족을 멸할 것이다.” 가밀을 불러서 처형했고 가후를 체포하기 위해 가황후의 시동생 사마경을 보냈다. 가후가 놀랐다. “아니 조서란 나를 통하여 나가는 것인데 이건 거짓 조서가 아니냐!” 그러면서 누가 일을 일으켰는지 물었다. 사마경이 대답했다. “조왕 사마륜과 양왕 사마융입니다.“ 가황후가 통탄하며 말했다.”개를 묶으려면 목을 묶었어야지 꼬리를 묶어 두었구나.“ 가황후는 유폐되었다가 곧바로 위조된 조서에 의해 독살되었다.(AD300년 4월 9일) 동맹은 그보다 며칠 앞선 4월 5일 가황후가 폐서인되어 금용성에 갇히는 날 유진, 손려 정거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11) 진나라 멸망(AD316년)과 가황후와 동맹의 역할

 

AD263 촉나라, AD265년 조조의 위나라 그리고 AD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다시 통일시킨 진나라 무제 사마염은 진시황제나 유방에 버금가는 공적을 세운 사람이다. 그런 그의 혁혁한 공은 그가 죽은 직후(AD290) 바로 붕괴되기 시작하는 데 그것은 바로 가황후와 환관 동맹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 때문이었다. 즉, 무능한 황제(혜제 사마충)을 등에 업고서 정적인 양준과 사마량과 사마위와 황태자 사마휼을 차례차례 제거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학정과 폭정을 거듭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끊임없는 황실 내 살륙의 드라마, 즉 8왕자의 난(AD290년-AD311년)의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이다. 사마량과 사마위를 죽인 가황후와 동맹 또한 사마륜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 이후 사마륜은 사마경에게 죽고, 사마경은 사마예에게 죽었으며 사마예는 사마영에게 피살되었고 사마영은 사마옹에게 당하였고 사마옹은 사마월에게 죽었다. 사마월은 노환으로 죽었지만(AD311년 3월) 그 20여년 사이 중국을 재통일했던 사마염 진나라의 강력한 힘은 빈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변방에서는 강력한 저족, 강족, 선비족, 흉노족들이 발호하며 유연, 석륵, 장식,이웅 등과 같은 호걸들이 발호하며 5호 16국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동안 진나라 황실 내부에서는 핵심 지도층들이 권력다툼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을 이어갔으니 진무제 사마염의 찬란한 왕업의 기반이 간악한 가황후와 동맹에 의해 맥없이 허물어졌다고 한들 무엇이 크게 잘못되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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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0-19 17:45:15 최종수정 2016-11-04 10: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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