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11:바람처럼 사라진 혁련발발 하나라(I)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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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46) 하의 선비 저작랑 조일(AD427)

           

하나라 저작랑 조일이 하의 군주 혁련창을 지나치게 칭찬하였다. 황당하다고 생각한 탁발도가 이렇게 물었다

 

  “ 어떤 녀석이 이런 무도한 표현을 썼는가?  

    당장 찾아보라.“

  

최호가 나서서 말했다.

 

   “ 문사의 포폄이란 원래가 과장된 것이라

     실체가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아마 부득이해서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니 죄를 주기에는 부족합니다.“

  

탁발도도 이해했는지 아까 내린 명령을 마침내 중지하고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는 하나라 세조 혁련발발의 딸을 귀인으로 받아들였다..

 

 

(47) 북위 해근과 하 혁련정의 장안 대치(AD427-AD428)

 

통만 함락 소식을 듣고 혁련창은 상규(감숙성 천수)로 도주했다. 탁발도는 군사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고 조서를 내려 전군 회군 명령을 내렸다. 해근이 나서서 말렸다.

 

  “ 혁련창이 상규로 도주했으나 군사나 백성들의 호응을 

    잘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계속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탁발도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해근이 다시 강청하자 1만 군사 주어 마침내 허락했다.

평북장군 울권은 상규(감숙성 천수)의혁련창을 공격했다. 혁련창은 물러나 평량(감숙성 화정)으로 옮겨 주둔했다. 북쪽 통만에서 내려오던 해근은 안정(감숙성 진원)으로 나아가 포진했다. 

 

 

(48) 소극적인 해근과 안힐의 혁련창 포획(AD428)

 

해근은 그러나 전투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일단 해근의 말이 역병으로 모두 죽었고 식량도 다 떨어졌다. 전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해근의 상황을 타고 혁련창이 해근을 공격하여 크게 이기게 되자 해근도 수비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전세가 뒤바뀐 셈이다. 하나라가 공세, 북위가 수비로 뒤집힌 것이다. 안힐이 소리치며 대들었다.

 

  “ 도적에게 죽지 않은 들 나중에 법대로 처단될 것 아닙니까.

    나아가나 물러서나 살아날 방도가 없습니다.

    어찌 참호 속에 숨어서 방도를 세우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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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근은 경사의 지원군이 올 때 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안힐은 반박했다.

 

  “ 일단 결전하지 않으면 

    죽는 것은 조석 간에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언제까지 구원병만 기다리고만 있을 셈입니까?

    어차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싸우다가 죽읍시다.“

 

그러나 해근은 한사코 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안힐이 애원하며 말했다.

 

   “ 긁어모으면 한 200여필은 될 것입니다. 

     제가 200명 결사대를 구성하여 예봉을 꺾겠습니다.

     혁련창은 겁도 많고 용렬하여 꾀도 없으면서

     경솔하게 허세부리는 것 좋아함.    

     매복작전을 쓰면 순식간에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안도 해근은 반대했다. 안힐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울권과 몰래 모의하여 결사기병대를 조직하고 대기시켰다. 혁련창이 성 밑을 공격하는 순간 안힐이 기병대를 이끌고 치고 나갔다. 때 마침 거센 돌풍이 일어 나 먼지를 일으키는 바람에 하 주군이 놀라 후퇴하려는 순간 안힐이 달려 나가 말에서 떨어진 혁련창을 사로잡았다. 하나라 대장군 혁련정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평량(감숙성 화정)돌아가 형 대신 황제에 즉위했다.(AD428)

 

 

(49) 무능한 장수 북위 해근와 하나라의 장안 탈환(AD428)

 

탁발도는 혁련창을 평성(산서성 대동) 서궁에 안치했다.(3월13일) 그리고 자신의 누이동생 시평공주를 처로 삼게 했다. 탁발도는 행차할 때마다 혁련창을 거느리고 다녔다. 사냥도 같이 가려하자 제장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탁발도는 이렇게 대꾸했다.

 

  “ 천명이 나와 함께하는데 무엇이 두렵겠느냐?” 

 

원수 해근은 부하 안힐의 기습작전을 반대하다 수치를 겪은 것을 속으로 깊이 부끄러워했다. 그런 수치를 만회하기 위해 이제 해근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섰다.  3일간의 식량만 지니고 경기병으로 평량의 혁련정을 추격한 것이다. 

 

해근의 부하는 물을 따라가자고 권했으나 해근은 듣지 않고 혁련정이 간 길을 따라 북향했다. 아마 그 방법이 더 빨리 혁련정을 사로잡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던 중 해근의 군사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병사 하나가 하나라로 도주해서 군대위치와 식량상황이 나쁜 것 알려 주었다. 하의 주군은 해근을 앞뒤로 협공하여 해근과 측근 부하가 모두 생포되었다. 

안정(감숙 진원)을 지키던 북위 구퇴도 혁련정의군대가 승세를 타고 진격해 오자 지키던 평량을 버리고 장안으로 퇴각한 뒤 포판(산서성 영제)으로 물러났다. 하나라가 다시 장안을 수복하였다.(AD428)

 

 

(50) 하나라의 북위 반격 계획 (AD430)

 

하나라 주군 혁련정이 동생 혁련이위대를 보내 북위의 부성(섬서성 낙천현)을 공격했다.(AD430년 8월) 북위의 시평공 탁발외귀가 반격하여 하나라 병사 1만여 명을 살해했다. 혁련위이대가 패배하자 혁련정이 직접 수만 명으로 대응했다. 한 편으로 동생 혁련사간과 혁련난고에게 수도 평량을 지키게 하고 다른 한 편으로 사절을 유송에게 보내 힘을 합쳐 북위 멸망시킨 뒤 영토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항산 이동은 유송이 갖고 이서는 하가 가지기로 제안한 것이다.

 

북위가 이 말을 듣고 하 정벌계획 세웠다. 군신들이 또 말리고 나섰다.

 

  “ 유송의 군대가 남쪽에 있는 상황에서 

    서쪽을 치면 도적을 이긴다는 보장도 없는데다가 

    동쪽을 유송의 유의륭에게 잃는 것입니다.“

 

최호가 강력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 유의륭과 혁련정은 서로 먼저 공격해주기를 바라니 

     마치 닭 두 마리 묶어두면 못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유의륭은 애초 황하 건너 올 생각이 없습니다.

      먼저 혁련정을 치고 난 뒤 유송의 동관으로 나아가면 

      자리를 말 듯 장강과 회수이북에는 풀조차 자라지 못할 것입니다.“

 

옳다고 생각한 탁발도가 통만으로 가서 평량을 습격하게 했다. 그리고 왕근에게 포판에 주둔하게 했다.(AD430년11월)                

 

 

(51) 하나라 서쪽 패주(AD431)와 멸망(AD432)

 

 

탁발도 대군이 하나라 수도 평량에 접근했다. 혁련사간이 평량성을 지키고 있었다. 탁발도는  데리고 있던 혁련창을 시켜 항복을 권유하게 했다. 성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탁발도는 안서장군 고필을 시켜 안정으로 나아가게 했다. 혁련정은 부성(섬서성 낙천현)에서 안정(섬서성 진원)으로 돌아와 2만 군사로 평량을 구원할 계획이었다. 가는 길에 북위의 고필부대를 만났다. 고필은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했다. 그런 줄 모르는 혁련정은 추격을 계속하다가 탁발도의 습격을 받고 크게 패했다. 혁련정은 순고원(감숙성 영대현)으로 도망가 방진을 치고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탁발도는 혁련정을 포위했다. 하나라 군마의 물과 마초가 고갈되었다. 혁련정은 몰래 순고원을 빠져나왔지만 북위군대가 곧바로 추격해왔다. 하의 군사 만여 명은 피살되었고 혁련정도 부상을 입고 도주하여 상규로 들어갔다.  

 

안정을 지키고 있던 혁련을두도 성을 버리고 장안으로 갔다가 다시 상규로 도망왔다. 북위 탁발도는 평량을 다시 포위하는 한편 주변 주민들에게 조세부역을 감면해 주었다. AD431년 12월15일 마침내 하의 혁련사간과 혁련도락고가 평량성을 버리고 항복해 왔다. 그리고 북위장수 두대전이 포로로 잡혀있던 북위 장수 해근과 아청 등 구출해냈다.

 

탁발도가 하의 황후를 두대전에게 하사하면서 해근에게 무릎을 꿇리고 두장군에게 술잔을 올리게 하며 말했다.

 

  “ 너의 목숨을 온전하게 한 사람이 이 분이다.”   

 

북위 수도 평성으로 돌아 간 다음 탁발도는 해근을 술 음식 시중드는 직책으로 강등시켰다.하나라 장안 인근 지역 장수들이 모두 도망가거나 북위에게 투항해 왔다. 마침내 관중지역이 완전히 북위에게 떨어진 것이다. 

 

서쪽으로 몰리던 혁련정은 서진의 요헌을 공격하여 이겼다. 그리고 1만 군사로 남안(감숙성 농서)을 포위하며 공격했다. 성안의 부하들은 모두 서진을 배반하고 하나라로 쪽으로 도망왔다. 서진왕 걸복모말도 수레에 관을 싣고 혁련정에게 투항했다. 혁련정은 투항한 저거흥국과 걸복모말을 상규로 압송했다. 혁련정은 걸복모말 등 종족 500여 명을 죽였고 이로써 서진(AD385-AD431)이 건국 46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혁련정은 서진 백성 10만여 명 압송하여 치성(임하)에서 황하를 건넜다. 이주민을 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중에 강력하게 세력을 키워오던 토욕혼 모용모귀에게 습격을 받고 혁련정이 사로잡혔다.(AD432) 토욕혼 모용모귀는 혁련정을 북위 평성으로 압송했다. 혁련정은 평성에서 살해되었다. 이로써 AD407년 세웠던 혁련발발이 세웠던 하나라는 25년 만에 멸망한 셈이다.

 

  

(52) 하나라 건국과 멸망의 근본원인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흉노족이 세운 하나라(AD407-AD431) 그 뿌리가 한나라까지 올라가는 짧지 않은 나라다. 오래 머무르지 않는 몽고족의 특성 상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닌 국가라서 수도 없는 흥망을 거듭해 온 바람과 같은 제국이다. 혁련(유)발발이 세운 하나라도 흉노족이 십 수 세기 동안 세운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 흉노족의 문화는 매우 거칠고 과격하며 극단적인 데가 많다. 장인은 물론 형제나 부모를 죽이는 것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며 자신의 이익을 좇아 배반하는 것을 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부모자식에 대한 효의나 혹은 군신간의 도리와 같은 전통 유교적 윤리는 그들과 전혀 맞지 않는 격식일 따름이다.     

 

이런 흉노족이 광대한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중원이 혼란했기 때문이다. 혁련발발이 하나라를 건국할 무렵인 AD407년은 북중국을 잠시나마 통일했던 전진이 비수대전(AD383)에서 패하면서 전국이 갈기갈기 찢겼던 시절이다. 이 때 세워진 나라들이 후연(AD384),서연(AD385),서진(AD385), 북위(AD386), 후량(AD389),북량(AD397),남량(AD397),서량(AD398),남연(AD398) 및 서촉(AD405) 등이다. 따라서 비록 유위진이 근거지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혁련발발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위의 여러 나라처럼 당시 중앙권력이 붕괴된 그 공백에 자연스럽게 솟아난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혁련발발의 재능을 폄하할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필요에 따라서 장인 몰혁간을 죽일 만큼 잔인하기도 했고, 연연의 욱구려사륜이 북위 탁발도에게 보내는 말 8천 필을 빼앗을 만큼 대담하기도 했다.(AD407) 흔들리는 후진 요흥을 공략하여 남쪽으로 여토를 확장하기도 했고 유유와 우호관계를 맺은 뒤 장안을 탈취하기고 했다. 도읍을 평량이나 장안으로 서둘러 옮기라고 독촉할 때마다 혁련발발은 시간을 기다리라며 조급해 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한 때나마 당대 강대국 후진과 북위와 동진을 위협하기에 충분한 강대국을 세웠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혁련발발의 대하제국은 전진이나 북위나 동진에 버금가는 대국이었고 후진이나 후연만큼 강한 나라였음에 틀림없다.

 

이런 하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첫째는 인재부족이다. 나라를 건국하고 영토를 급격하게 팽창시켜 가던 AD407년 경 대하 조정 내부에는 전진의 왕맹이나 동진의 사안-사현과 같은 훌륭하고 탁월한 인재가 없었다. 거의 모든 군주들이 훌륭한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생각을 접는 경우가 많았지만 혁련발발의 경우 그런 사례를 찾아 볼 수가 없다. 혁련발발이 인재부족의 단점을 보완하려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나 위조사를 포용하여 활용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죽여 버린 것을 보면 혁련발발의 성격상 전혀 측근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둘째 특징은 후계자 옹립의 실패다. 혁련발발은 중국 전통에 따라 장자 혁련괴를 태자로 세웠다가 나중에 어린 혁련륜으로 바꿀 생각을 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혁련괴가 먼저 혁련륜을 공격하여 죽였고 그런 혁련괴를 혁련륜의 형 혁련창이 다시 공격하여 죽였다. 혁련발발은 그런 혁련창을 태자로 세웠는데 그는 겁이 많고 용렬한 군주일 뿐이었다. 물론 혁련괴나 혁련륜이 황위를 이어받았다고 해서 초강대국 북위 탁발사의 공격을 이겨냈을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나중에 탁발사에게 포로가 되어 풍요로운 삶을 이어가면서 동생 혁련정에게 북위에 항복하라고 종용했던 행적으로 보면 혁련창이 대하제국의 황제로써의 면모를 전혀 지니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셋째, 혁련발발이 AD425년 44세로 사망하면서 대하제국은 모래처럼 무너졌다는 점이다. 주변에 북위나 후연이나 동진처럼 강대국이 너무 많기는 했지만 북위를 제외하면 그렇게 침략적이거나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아마 혁련발발이 살아있었다면 건국이후 그래왔던 것처럼 충분히 북위나 후연의 공격을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자 모든 것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조정 내부에 현신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요흥이나 요장처럼 훌륭한 후계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혁련발발이 44세에 자연사 한 것으로 보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그렇다고 시해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결국, 교만하고 잔인하지만 영리한 리더십을 갖추었던 혁련발발이 혼란한 시대를 만나 한 나라를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훌륭한 측근과 후계자도 없이 홀연히 세상을 떠나게 되자 하나라와 통만성은 사막의 신기루나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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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06 17: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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