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 읽기] <46> 야만족이 물밀듯이 침입하다 (서기 378~476)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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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 않았다.” 로마가 흥왕하는 모습을 표현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로마가 쇠망하는 과정은 어떨까? 역시 “로마는 하루아침에 멸망하지 않았다”. 로마의 멸망 또한 점진적이고도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로마의 방위선은 야만족을 경계하기 위해 세워졌다. 서쪽의 라인 강과 도나우 강 방위벽은 북방 게르만족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구축했다. 브리타니아의 하드리아누스 성벽도 야만족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동방의 방위선도 마찬가지다. 로마의 힘이 강할 때는 야만족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 상황이 변하거나 약해진 모습을 보이면 방위벽을 넘어 침범하는 입질을 벌이다가 다시 퇴각하는 행태를 반복했다. 

 

로마제국 멸망의 조짐은 로마군 내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로마군은 카라칼라 황제가 모든 속주민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한 후, 당장 로마군의 충원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야만족을 로마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야만족은 로마군의 일원이 되어 로마군의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로마의 강점을 서서히 흡수해나갔다. 야만족을 용병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로마군의 힘은 점점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훈족이 동방에서 쳐들어오면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과거에 감히 넘보지 못해 입질 정도에 그쳤던 야만족들은 사납기 그지없고 포악한 약탈자로 소문난 훈족에 밀리면서 대규모로 이동을 시작했다. 사생결단의 자세로 싸우지 않으면 생존의 근거를 잃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야만족의 행태는 4세기와 5세기는 다르다. 4세기의 야만족은 쳐들어와서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 후 떠나는 도적떼였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후에는 쳐들어와서 강탈한 후 그 자리에 거리낌 없이 눌러앉아버렸다. 

 

이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동로마 황제 발렌스가 고트족을 응징하기 위해 싸운 전투에서 그만 전사한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 그날을 이렇게 적고 있다. “8월 9일은 로마의 달력에서 가장 불운한 날로 표시할 만한 날이었다.” 로마제국은 자신의 영토로 야만족이 밀어닥치는 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서기 376년, 약 200만 명의 게르만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이 제국의 흑해 서쪽 국경을 넘어왔다. 이들은 로마 당국에서 받은 처우에 불만을 품고 도발한 것이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발렌스는 이들과 맞서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행진했다. 서로마제국 황제 그라티아누스가 지원군을 보낸다는 말을 믿고 침공을 강행한 것이다. 그라티아누스는 지원병이 도착하기 전에는 단독으로 공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군대 경험이 부족한 발렌스는 적을 얕잡아 보고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공격을 감행하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했다. 

서기 378년 8월 9일 벌어진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로마군의 완패로 끝났다. 이 격렬한 전투에서 로마군의 3분의 2가 괴멸했다.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로마군이 참패하고 황제가 전사하면서 야만족은 로마제국의 실상을 파악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이 쇠퇴를 시작하는 분수령이 된 것이다. 이후 다양한 민족들이 국경을 넘어와 로마와 조약을 맺었다. 이런 방식으로 야만족들은 로마제국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 제국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서로마제국의 말기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엄청난 군 병력을 감당할 재원이 부족해서 제국 초기에 최소 20~30만 명을 유지하던 로마군 숫자가 불과 1~2만 명 정도로 대폭 줄어들었다.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자비한 살육을 하며 내려오는 아시아계 훈족의 맹공에 견디지 못하고 살길을 찾아 남하하는 난민, 즉 여러 게르만 부족의 공격을 받은 로마제국은 야만족들을 일시적으로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서로마제국은 서고트 왕국과 반달족 그리고 동고트족, 훈족 등 북방 야만족들에게 수도 로마마저 약탈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야만족들이 서로마 제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어떻게 정착하는지 살펴보자. 

 

서고트족의 초대왕인 알라리크는 서기 410년 로마를 포위하고 병사들에게 2-3일 동안 마음껏 짓밟고 약탈하고 불태우도록 허용했다. 서고트족은 로마를 떠나 갈리아 남부에 정착했다. 5세기 초,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은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이동했다. 이어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에스파냐에 정착했다. 다시 반달족의 가이세릭 왕은 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서기 442년에 독립왕국을 선포했다. 서기 455년, 발렌티니아누스가 암살당하자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공격했다. 결국 동방 황제 제논은 로마령 아프리가, 시칠리아의 릴리바이움,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등에 대한 반달족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프랑크족은 갈리아에서 로마의 권력을 제거하고 프랑크 왕국을 세운다. 앵글족과 색슨족은 브리타니아로 진출하여 정착하게 된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초래한 훈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말을 잘 타는 유목민 전사인 훈족은 게르만 민족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종족이다. 452년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의 성문 앞까지 쳐들어왔으나 교황 레오 1세가 협상력을 발휘하여 철수시켰다. 453년 아틸라가 사망하자 훈족은 얼마 있다가 스스로 무너졌다. 

이처럼 서로마 제국 말기에 들어서면 로마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오히려 야만족에게 세금을 내며 안전을 도모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러 게르만 족의 통치를 받으며 위대한 로마 역사의 모든 기반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이다. 

 

결국 로마 황제마저 옹립하지 못하고, 5세기 말경 아무도 모르게 천년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로마제국은 야만족의 사소한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역사학자인 피터 히더는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에서 “예나 지금이나 제국들의 지배 방식에는 피지배 민족의 역반응을 불러일으켜 그들이 끝내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게르만 사회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였다”고 결론을 맺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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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29 17: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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