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4> 위대한 CEO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등장하다 (서기 306~337)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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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한 후 4분 체제는 주도권 싸움으로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런 20년 동안의 혼란을 수습하고 단일 체제로 만든 황제가 바로 콘스탄티누스다. 콘스탄티누스는 4분 체제의 한 축을 맡고 있던 서방의 부제 콘스탄티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분 체제의 모순을 막는 조치의 일환으로, 동방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보내져 사실상의 인질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 인질 생활을 했지만, 개혁적인 황제를 가까이에서 따르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다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해 추진했던 기독교 박해는 배우지 않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는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정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픽트족을 정벌하고자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병사하자 군대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방 정제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방 부제의 지위만 인정했다. 그러는 사이 4분 체제는 서로의 영역 다툼으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영역을 점점 넓혀 서방을 지배하고 나중에는 동방까지 수중에 넣음으로써 로마 전역을 평정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에 가져온 두 가지 큰 변화는 기독교 공인과 비잔티움으로의 천도다. 이 변화를 프리츠 하이켈라임은 『로마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13년, ‘밀라노칙령’을 선언하여 그동안 탄압받아온 기독교를 공인했다. “이제부터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 로마인이 믿는 종교는 무엇이든 존중받는다.” 

그리고 325년에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여 당시 기독교 세계의 최대 쟁점이었던 ‘아리우스파 논쟁’을 종식시켰다. “예수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유사한 본질을 갖고 있는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다는 삼위일체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아리우스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the Father)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지 않고 다른 본질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정통적인 신앙을 견지한 알렉산드로스 주교는 “성자(the Son)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고, 삼위일체의 세 위격, 즉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시간과 본질과 권능에서 한 분으로서 우주의 전능한 권능의 세 측면을 대표한다”고 믿었다. 이 양쪽을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라고 부른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니케아파를 공인하여 니케아신조를 선포했다. 이 신조는 삼위일체 교리를 재확인하고 아리우스를 파문하고 그의 저서들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그가 기독교를 이토록 부흥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헬레나에게서 기독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당시 이미 제국의 하층민뿐만 아니라 귀족, 학자, 군인 등이 속속 기독교로 개종하던 상황을 직시했다. 그래서 이미 힘을 잃어버린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에 매달리는 일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민심을 읽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또한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 사제들에게 ‘신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칭송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황제권을 튼튼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후 기독교 군주들이 왕권의 근거로 들게 되는 왕권신수설의 원조는 콘스탄티누스였다고 할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두 번째 획기적인 조치는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것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그는 다신교가 지배하고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로마를 버리고 새로운 수도를 정했다. 서기 330년 5월 11일,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337년에 그가 죽은 후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최초의 기독교 도시로서, 이후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비잔티움제국의 수도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사, 경제, 행정 개혁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제국을 안정 기조에 올려놓아 로마제국의 통일이 150년간 더 지속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 동시에 그는 박해받던 기독교를 공인하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고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는 로마를 정복한 야만인들에게도 전파되어 유럽의 기독교 문명이 발전하게 되었다. 또 직업 세습제를 실시하여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계승하도록 했다. 

나아가 기독교 제국을 위한 새 수도를 선택함으로써 비잔티움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비잔티움제국은 1,000년간 더 존속하면서 유럽과 근동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탠리 빙은 『로마처럼 경영하라』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위대한 CEO라고 불렀다. “콘스탄티누스는 주식회사 로마제국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그는 한창 세력을 뻗쳐가는 새 종교를 박해하는 대신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리고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사의 본부를 옮겼다. 사실상 서로마에서의 영업 활동을 중단하고, 그곳을 비기독교인 유목민들의 손에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훌륭한 CEO였다. 그의 뒤를 이은 7명의 CEO도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누스로 명명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누렸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바람직한 승계 모델이기도 하다. 그가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부제를 떠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밑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보고 배운 것들이 훗날 로마 전역을 통일하고 통치력을 발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의 역사가 존 노리치는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역사상 그 어느 지배자도, 알렉산드로스도, 앨프레드도, 샤를마뉴도, 예카테리나도, 프리드리히도, 그레고리우스도, 콘스탄티누스만큼 ‘대제’라는 칭호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인물은 없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콘스탄티누스는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새로운 로마’를 세웠고,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서유럽을 지켜주는 방파제가 되었으며, 그 영향은 로마가 사라진 이후에도 서양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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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15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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