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11:바람처럼 사라진 혁련발발 하나라(B)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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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8) 동진 환온의 북진(AD369)

 

동진의 대사마 환온(AD310-AD372)은 북벌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환온의 첫 번째 목표는 전연이었다. 당시 전연의 황제는 유제(幽帝) 모용위였지만 군사와 정치의 실권은 용렬하기 짝이 없는 그의 작은 할아버지 모용평이 쥐고 있었다. 환온은 AD369년 수륙 양군의 대군을 이끌고 고숙(안휘성 당도)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나아갔다. 다급한 전연은 전진의 부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다른 신하들이 다 반대했지만 부견은 왕맹의 권유를 받아들여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왕맹의 생각은 모용평이 허약한데다 환온마저 병들어 있으므로 전연을 지원하면서 전연과 동진을 동시에 아우르자는 생각이었다. 부견은 구지와 등광에게 2만 군사를 붙여 지원요청에 응답했다. 전연의 모용수와 전진의 구지 군사의 활약으로 환온군은 크게 패하여 물러갔다.(AD369)  

 

환온이 퇴각하자 모용수는 양읍(하남성 수현)을 거쳐 전연의 수도 업(하남성 임장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연 조정에 승전에 따른 포상 문제를 상주했다. 태부 모용평은 날로 위엄과 명성이 떨치는 조카 모용수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태후 가족혼(황제 모용위의 죽은 아버지 모용준의 처)씨 또한 시동생 모용수를 싫어했다. 당연히 모용평과 가족혼태후는 모용수를 살해할 음모를 진행시켰다.  

 

죽은 모용각의 아들 모용해와 모용수의 장인 난건이 살해음모를 모용수에게 알려 주었다. 

 

  “ 먼저 일어나야 이긴다.

    모용평과 모용장(황제 모용위의 형)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용수는 거절했다.

  “ 피붙이 간의 다툼이야말로 나라의 혼란입니다.

    내가 조용히 죽을지언정

    차마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정권을 찬탈할 수는 없습니다.“

 

모용해와 난건이 거듭 재촉하자 모용수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리 제가 피하겠습니다.”

   

모용수는 근심에 싸여 아들 모용령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모용령은 일단 전연 모용씨의 근거지인 용성(요녕성 조양)으로 돌아간 뒤 조정의 적개심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주변을 흡수하여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이 다음의 계책이라고 말했다. 모용수는 그것이 훌륭한 생각이라고 판단하여 몰래 빠져나가 북으로 달아났다. 모용수가 출발한 지 하루도 안 되었을 무렵 모용수의 다른 아들 모용린은 평소 아버지로부터 홀대받은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 계획을 조정 밀고해 버렸다. 모용수의 측근들도 모두 모용수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계획이 틀어지자 모용령이 아버지에게 마지막 수단은 전진에 투항하는 것이라고 건의했다. 모용수도 동의했다. 모용수와 모용령 부자는 그 길로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장안을 향해 달려갔다. 전진의 부견은 모용수 부자를 크게 환영했다. 모용수에게 관군장군, 모용해에게 적노장군의 직을 주었다. 모용수는 전진이 전연을 AD370년 멸망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14년 뒤인 AD384년 비수대전의 패배(AD383년)로 뿌리째 흔들리는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후연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9) 모용수를 제거하려는 왕맹(AD369)

 

부견이 모용수 부자를 크게 후대하는 것을 왕맹은 경계했다.

 

  “ 모용수 부자는 용과 호랑이 같은 부자이니

    지금 제거하셔야 합니다.“

 

부견의 생각은 달랐다.

 

  “ 영웅호걸을 거둬들여 사해를 깨끗이 평정하는 것은

    군자의 소망인데 내 어찌 그들을 죽이겠소.

    또 서로 이미 정성스럽고 충성스런 말을 나누었는데 

    필부도 허툰 말을 하지 않을 터인 바에 

    만승인 내가 어찌 약속한 말을 거두어 그를 죽이겠소.“

 

당시 전진과 전연의 외교관계는 우호적이었다. 서로 신하들의 교류가 활발했다. 전진에 들어 갔던 양침은 돌아와서 전진의 전쟁준비와 민심수습 등을 보고하면서 장차 있을 변란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황제 모용위와 태부 모용평은 부견이 모용수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먼저 우호관계를 깰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부견이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으면 분명히 적개심 때문에 오왕 모용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단순논리였다. 

 

 

(10) 전연 조정의 분토 같은 붕괴(AD369)

 

전연의 태위 황보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 오원의 화(伍員之禍)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낙양과 태원과 호관(산서성 장치)에 병력을 증강시켜

    장차 전진의 침입에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오원의 화‘는 BC 6세기경 춘추시대 초나라 오원(오자서)의 아버지 오사가 간신 비무기에게 모함을 받아 죽자 오원이 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오왕 합려에게 등용되어 아버지 원수 초나라를 멸망시킨 고사를 말한다. 태부 모용평이 황제 모용위에게 말했다.

 

  “ 전진은 힘이 적고 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왔던 것입니다.

    또 부견은 항상 정도(正道)만 따라 가는 사람이므로

    반란을 일으킨 오왕 모용수의 말을 듣고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볍게 놀라서 경계심을 일으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침략의 빌미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득하면서 한편으로 전진에서 온 사신에게 얼마나 전연이 풍요롭고 잘 사는 지를 보여 주었다. 고태와 하간과 같은 강직한 전연 신하들은 오히려 강한 병기와 조직된 군사들의 힘을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간청했지만 무력긴장을 원하지 않는 모용평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정권은 문란한 가족혼태후가 쥐고 있었고 모용평은 옹졸하고 편협하며 질투와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뇌물로 자리를 사는 것이 유행이 되어 유능한 관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전연의 멸망은 시간문제였다. 

  

 

(11) 왕맹의 낙양함락과 모용수 제거 모략(AD370)

 

환온을 격퇴한 승리에 도취된 전연은 전진에게 참전 대가로 약속한 호뢰관(하남성 형양 서북쪽 사수진) 서쪽 땅을 주지 않았다. 사신이 말을 잘못한 것일 뿐 애당초 호뢰관을 할양할 생각이 아니었다고 둘러댔다. 화가 난 부견은 왕맹과 양성과 등강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전연을 토벌하기로 하고 낙양을 공격했다.(AD369년 12월) 낙양을 지키던 전연의 형주자사 모용축은 부견의 항복권유 편지를 읽자마자 창과 칼을 내려놓고 투항해 왔다. 이번 공격에서 전연은 멸망한다.

왕맹은 낙양을 향해 출병하기 직전 모용수의 아들 모용령을 향도로 삼고 동시에 모용수를 찾아가 기념할 만한 물건을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모용수는 의심하지 않고 몸에 지니던 작은 패도 하나를 건네주었다. 낙양을 함락시키자 왕맹은 모용수와 가까운 금희라는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모용령을 찾아가서 이 패도를 보여 주면서 아버지가 이렇게 말 했다고 전하시오.

    ‘지금 왕맹이 나(모용수)를 심하게 견제하고 있고

    부견 또한 나를 진정으로 신뢰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 아버지 무용수는 막 동진으로 망명길을 떠나면서

    이 칼을 금희에게 주어 미리 알리는 것이니

    너 또한 곧장 동진으로 출발하라.‘ “ 

 

모용령은 아버지가 동진으로 망명하겠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결심을 못하다가 사냥 간다는 핑계로 사촌지간인 전연의 낙안왕 모용장에게로 피신했다. 왕맹은 즉각 모용령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표문을 장안으로 올렸다. 그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황급히 도망가다가 남전에서 사로잡혔다. 부견은 대범하게 이렇게 말했다.

 

“ 경의 아들이 고향이 그리워 돌아 간 것을 가지고 흉허물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소. 

  장차 전연은 망하고 말 것이니

  모용령도 거기서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오.

  제발로 호랑이 굴로 돌아 간 것이 애석할 따름이요.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는 연좌되지 않으니

  경께서 어찌 지나치게 두려워하며 일을 낭패할 수가 있겠소?“

 

부견은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모용수를 대했다. 모용수는 부견의 대범하고 사려 깊음에 뼛속깊이 감탄했다. 전연에서는 돌아 온 모용령을 의심하여 조양 북쪽 600여리로 귀양보냈다. 귀양지에서 모용령은 그 다음해에 모반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죽었다. 

 

 

(12) 탁발십익건의 도주(AD373-AD376)

 

동진 환온의 공격을 격퇴하고 전연을 옥죄게 된 부견의 전진은 천하 최강국으로 부상했다.환온이 62세의 나이로 병사(AD373)한 뒤 동진이 환온의 형제 환충과 환활과 사안과 같은 조정 대신 사이의 권력다툼으로 정신이 없었으므로 전진의 위세는 더없이 높아졌다. 대나라 탁발십익건으로서도 같은 이민족 계통인 전진에게 조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AD374년 탁발십익건은 유위진을 또 다시 공격하여 남쪽지방으로 쫓아냈다. 계속되는 탁발십익건의 공격을 받게 된 유위진은 AD376년 마침내 15년 전인 AD361년 배반했던 전진에게 다시 구원을 요청했다. 부견은 유주자사 부락을 북토대도독으로 삼아 10만 대군을 붙여주었고 병주자사 구난 등강 조천 주융 등에게는 20만 보기병으로 화룡방면(요녕성 조양)으로 보내 탁발십익건을 동서 양쪽에서 협공하게 하였다. 그 선봉에는 유위진이 자원했다. 탁발십익건은 독고부에게 남쪽방면을 방어시켰으나 실패했다.

 

 

(13) 대(代) 멸망(AD377년)

 

처음에 탁발십익건은 나라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동생 탁발고에게 주었다. 탁발고가 죽자(AD338) 탁발십익건은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탁발근에게 계승시키지 않고 나라를 흡수해 버렸다. 탁발근이 원한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와중에 탁발십익건의 세자 탁발식과 그의 동생 탁발근마저 일찍 죽었다.(AD371) 손자이자 탁발식의 아들인 탁발규(나중에 북위 창건자)는 다섯 살로 어렸고 처인 모용비가 낳은 아들 또한 너무 어리니 57세의 탁발십익건(AD320년생)으로서는 어떻게 후계를 정할지 난감했다. 이 때 평소 불만이 많던 조카 탁발근이 탁발십익건의 서장자 탁발식군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모용비 소생이 와위를 계승하면 너부터 죽일 것이 분명하다.“

 

탁발식군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몰래 삼촌 탁발근과 짜고 아버지 탁발십익건과 여러 동생들을 암살했다. 이 때 탁발규와 생모 하씨는 하눌이라는 토욕혼추장(하씨의 친정)으로 피신해서 살아남았다. 탁발식군의 반란으로 부족들은 전진의 부견에게로 달려가 지원을 요청했다. 부견은 유주자사 부락과 함께 20만 대군을 화룡(요녕성 조양)으로부터 대를 공략했다. 이 때 출정한 전진의 장수는 병주자사 구난과 진군장군 등강과 상서 조천, 그리고 전장군 주융 등이었다. 부견은 운중으로 군사를 보내 들어가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생포했다.

 

“ 천하의 큰 죄악 중에 하나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다.”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거열형에 처했다. 부견은 대나라를 나누어 동쪽은 유고인, 서쪽은 철불위진(혹은 유위진)에게 나누어 다스리도록 한 뒤 나중에 탁발규가 장성하면 그에게 나라를 물려주도록 조치했다. 이로써 AD315년 이후 62년 지속되던 대는 멸망하고 만다. 부견은  흉노를 둘로 나누어 동쪽은 유고인에게 맡기고 서쪽은 유(철불)위진에게 나누어 분할통치하게 했다. 유위진은 어린 탁발규를 모시고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민심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전진의 부견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공로를 높이 포상하였다. 그러나 유위진은 유고인이 부견에게 인정받고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수치스러워 또다시 유고인을 배반했다. 유고인이 유위진 공격했고 유위진은 서북쪽으로 천여 리 도망갔다. 부견은 유위진을 서선우로 임명하여 하서지역(섬서성 북서부) 여러 종족의 통치를 맡겼다. 이 조치 이후로 유위진은 대래성, 즉 지금의 내몽고 오르도스시 이금작락기에 주둔하게 되었다.(AD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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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19 17: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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