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J: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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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58) 부견의 대(代) 멸망(AD377년 )

대(代)라는 나라는 5호16국의 하나로 AD315년  탁발의로가 성락(지금의 내몽고 화림각이)에 세운 선비계통의 이민족 나라다. 대국의 후예는 전진이 쇄약해진 AD386년 이후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전진에 이어 두 번째로 북중국을 통일한 나라다. AD377년 경 대국은 탁발십익건이라는 사람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내부적으로 계승 문제로 복잡하였다. 탁발십익건은 나라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동생 탁발고에게 주었다. 탁발고가 죽자(AD338) 탁발십익건은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탁발근에게 계승시키지 않고 나라를 흡수해 버렸다. 탁발고가 원한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와중에 탁발십익건의 세자 탁발식과 그의 동생 탁발근마저 일찍 죽었다.(AD371) 탁발식의 아들(탁발규. 북위의 창건자)은 어리고 처인 모용비가 낳은 아들 또한 너무 어리니 57세의 탁발십익건(AD320년생)으로서는 어떻게 후계를 정할지 난감했다. 이 때 불만이 많던 조카 탁발근 탁발십익건의 서장자 탁발식군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모용비 소생이 와위를 계승하면 너부터 죽일 것이 분명하다.“

탁발식군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몰래 삼촌 탁발근과 짜고 아버지 탁발십익건과 여러 동생들을 암살했다. 이 때 탁발규와 생모 하씨는 하눌이라는 토욕혼추장(하씨의 친정)으로 피신해서 살아남았다. 탁발식군의 반란으로 부족들은 전진의 부견에게로 달려가 지원을 요청했다. 

부견은 유주자사 부락과 함께 20만 대군을 화룡(요녕성 조양)으로부터 대를 공략했다. 이 때 출정한 전진의 장수는 병주자사 구난과 진군장군 등강과 상서 조천, 그리고 전장군 주융 등이었다. 부견은 운중으로 군사를 보내 들어가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생포했다.

“ 천하의 큰 죄악 중에 하나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다.”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거열형에 처했다. 부견은 대나라를 나누어 동쪽은 유고인, 서쪽은 철불위진(혹은 유위진)에게 나누어 다스리도록 한 뒤 나중에 탁발규가 장성하면 그에게 나라를 물려주도록 조치했다. 이로써 AD315년 이후 62년 지속되던 대는 잠시지만 멸망하고 만다. 
 
(59) 부견의 변경정책 철학(AD377)

지난 해 전진이 전량을 멸망시키고 나서 조정에서는 승세를 타고 군사를 몰아 서쪽 변경의저족과 강족으로 토벌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부견은 토벌이 능사가 아니고 교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그 유목 종족들은 본성이 하나로 통일할 수가 없는 종족이니
  중국에 큰 염려가 될 수가 없다.
  마땅히 잘 어루만지고 타일러야 할 것이다.   
  조세를 잘 걷되 만일 명령을 잘 따르지 않을 때에만 군사로 다스려라.“

이런 부견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정중장군 위갈비는 공손하지 않은 저족과 강족 주민들을 죽이고 약탈하면서 위협을 가하였다. 부견은 격노했다. 위갈비를 잡아들이고 채찍 200대를 직접 내려쳤다. 그리고 그 선봉에 있던 지휘관 저안의 목을 베어 저족과 강족 주민들에 보여주면서 잘못을 사과했다. 저족과 강족 주민들은 크게 기뻐하여 공물을 바친 부락이 8만3천 이나 되었다. 전진의 국력이 북중국 전역을 떨치게 되자 AD377년 봄부터 고구려와 신라와 백제가 모두 전진에 사신을 파견하고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60) 전진의 사치(AD377)

전진의 국위가 사해를 떨치게 되자 조정안에서 서서히 국가기강이 무너질 조짐이 보였다. 삼십 여 년 전 후조의 석륵 조정에서 장작공조(기물제조 담당)를 했던 웅막이 말하기를 후조시대의 기물과 완구가 지금보다 훨씬 웅장하고 화려하며 정교했다고 지적하자 부견은 당장 그에게 장작승이라는 직책을 내리고 후조에 못지않은 병기와 기물을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전진 조정이 점차 사치에 기울고 나태해지자 모용농이 아버지 모용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 왕맹이 죽고 나서 점차 전진의 법과 제도가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군조차 사치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재앙이 장차 닥칠 것 같습니다.
  도참의 속설들이 앞으로 맞아 떨어질 것 같은 느낌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영웅호걸들과 교류하시면서
  하늘의 뜻을 이어받을 준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모용수가 아들 둘째 모용농을 크게 꾸짖었다.

“ 천하의 일은 네가 알 바가 아니니라.”



(61) 어수선한 동진의 상황(AD373-AD377)

이제 막강 전진에게 남은 것은 남쪽의 동진뿐이다. 영토의 크기에서나 주민의 수에 있어서나 전진은 동진에 굴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동진 조정은 환온의 폭정에 이은 동생 환충과 여러 아들들의 무능함과 황실 조정의 내분에 휩싸여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권을 휘두르던 환온이 AD373년 사망했을 때 동진 황제 효무제 사마요는 황제가 된지 일  년 밖에 안 된데다가 열 살에 불과하여 스스로 자립하여 정치를 할 수가 없었다. 이부상서 사안은 숭덕황후가 섭정하기를 바랐다. 숭덕황후는 강제 사마악의 부인으로 사마악은 효무제에게 마흔 살 위 사촌 형님이었다. 당시 숭덕황후는 53세였다. 그러나 실세 상서복야 왕표지는 반대했다. 사촌형수가 섭정에 임하는 것이 모양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안은 왕표지의 의견을 묵살하고 숭덕황태후(저씨)를 섭정에 세웠다. 대신 왕표지는 상서령으로 승진했고 사안이 이부를 관장하는 복야가 되었다. 숭덕황태후는 3년 뒤(AD376) 섭정을 그만두었고 효무제가 처음 조회에 참석했다. 나이 열 네 살일 때다. 군권은 환온의 동생 환활(도독예강이주지육군제군사)과 그 일당 치음(도독절강동오군제군사)가 장악하고서 각각 고숙(안휘성 당도)와 회계(절강성 소흥)에 주둔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안이 녹상서사에 중서감직을 맡고 있었다. AD377년 환활이 죽고 또 다른 환온의 동생 환충이 군권을 계승하여 도독강형양익영교광칠주제군사가 되었다. 사안은 승진하여 사도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조정에서는 그를 설득하기 위하여 도독양예서청연오주제군사라는 군사권을 주었다. 이제 동진의 군권은 장강을 끼고 있는 환충과 장강 북쪽으로 사안, 그리고 장강 이남의 군권은 왕온이 나누어 가졌다. 왕온은 효무제의 장인이다. 문제는 환충과 왕온의 인물됨이었다. 그는 전진의 강성함에 겁을 먹고 주둔지를 장강 북쪽인 강릉에서 장강 남쪽인 상명(호북성 송자)으로 옮겼다. 왕온은 현직에 적극적이지 않고 계속해서 사직을 원했다. 

조정의 실권 중 한 사람인 좌복야 사안은 좀 현실주의자인 반면 상서령 왕표지는 강직했다. AD372년 간문제 사마욱이 죽었을 때 환온이 황위를 찬탈할 생각으로ㅠ공작을 하고 있었지만 태자가 황위를 이어받는 것이 정도라는 이유를 내세워 현재의효무제를 세운 사람이 왕표지다. 또 지난 해 사안이 궁실 증축을 하려할 때마다 원제 사마예의 검소함을 지적하며 막아섰던 사람이 왕표지다. 그런 왕표지가 AD377년 죽었다. 얼마 전 환활마저 죽었으니 이제 사안의 독무대가 된 셈이다. 사안은 당장 전진의 공격에 대비하여 강북 수비 책임자를 선정해야 했다. 물색 끝에 형의 아들 사현을 북방수비 책임자로 임명했다. 사현은 임명되자마자 유뢰지와 같은 유능한 장수를 참군으로 모셔왔다. 동진이 자랑하는 막강한 사현의 북부군은 이렇게 만들어 졌다. 사안이 내린 결정 중에 가장 훌륭한 결정이 장조카 사현을 북방수비책임자로 세운 일일 것이다. 사현 때문에 부견을 비수대전에서 격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62) 전진의 남침(AD378-AD379)

부견은 동진 조정의 어수선한 틈을 타고 남정을 결정했다.(AD378년2월) 목표는 양양이었다. 양양은 한수를 장악하는 요충지다. 양양을 장악하면 물길로 내려가 무한을 거쳐 건강(남경)까지 직행 할 수 있다. 부견의 대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했다. 남쪽의 양양을 향하는 부견의 중군 선봉에는 아들 정남대장군 부비가 섰다. 구장과 모용위가 동행했다. 총 군사는 7만 이었다. 부견의 동군은 모용수와 요장이 이끄는 5만군으로 남향(하남성 석천)에서 양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부견의 서군은 구지와 모당과 왕현이 이끄는 4만 대군으로 장강을 끼고 무당(호북성 단강구)에서 양양을 향해 나아갔다. 총 16만 대군이다. 동진에서는 환충의 7만 군이 송자에 주둔하고 있었고 시평이 1만 뿐이었다. 수적으로 동진은 확실한 열세였다. 환충이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부비도 구장의 권고에 따라 서두르지 않고 장기전으로 갈 생각이었다.

전진 조정에서는 부비가 대군을 가지고도 속히 양양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탄핵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부견조차 전투를 서두르며 말했다.

“ 봄까지 함락시키지 못하거든 
  목숨을 끊고 나타나지 마라 !“

부비도 당황했다. 부비는 마침내 양양 공격을 개시했다. 부견은 스스로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융에게 군사를 수춘에 모으라고 지시했다. 부융이 부견을 말리며 나섰다.

“ 형님, 강남을 얻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넓고 깊게 생각하셔야지
  어찌 그리 조급하게 덤벼드십니까? 
  만약 양양만 얻을 것이라면 대가가 움직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수후가 구슬로 천길 참새를 쏜다면(隨珠彈雀) 세상이 웃을 일 아니겠습니까?“

양희도 말리며 나섰다.

“ 한광무제가 공손술을 죽였고
  진무(사마염)제가 손호를 사로 잡았지만
  두 황제가 손수 6사를 이끌고
  친히 북과 북치는 막대기를 잡고
  돌과 화살을 무릅썼다는 예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부견이 친정의 생각을 버렸다. 부비가 훌륭하게 양양을 함락시켰으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AD379년1월-2월) 


(63) 부락의 반란(AD380)

정북장군 유주자사 부락은 3년 전 대국을 멸망시킬 때 공이 작지 않았다. 은근히 개부의동삼사를 기대했으나 부견에게 거부당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부견은 남쪽 양양 정벌을 위하여 부락을 도독익영서남이제군사 및 익주목으로 삼고 양양을 거쳐 한수 상류로 가도록 발령내렸다. 현재 자신의 본거지 유주와는 정반대의 지역인데다가 전쟁터였다. 화가 난 부락은 이렇게 내 뱉었다.

“ 내 황제의 가까운 친인척이라고 해서
  일부러 재상은 주지 못한다고 변방만 돌아 다녔는데
  또 다시 서쪽 천한 것들이 있는 곳으로 던져 졌으니
  반드시 나를 배척하는 무슨 계략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양양에 진수하고 있는 형주자사 양성이 
  나를 한수에 빠뜨리려는 계책임에 틀림없다.“

그런 마음을 읽은 유주의 막료 평규가 유주군사를 동원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부락은 스스로 진왕 대장군 대도독이라 일컬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평규를 유주자사로 승진시키고 사신을 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 신라, 휴인(흑룡강 유역 나라) 등지로 보내어 지원군을 요청했고 자신은 스스로 3만 군사로 계성(북경)을 방어했다. 그러나 호응해 오는 나라는 한 곳도 없었다. 겁에 질린 부락은 되돌릴 생각도 했으나 자신이 새로 임명한 장군들이 마음을 돌려 부견에게 밀고하려하자 모두 죽여 버렸다. 길정과 조찬은 관대한 부견에게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를 빌면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으나 평규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강청했다.

부락은 계획대로 거사하기로 했다. 군사 7만으로 4월 화룡(요녕성 조양)을 출발했다. 부견의 대책회의에서 여광은 군사 5만이면 물건 줍듯이 충분히 쉽게 진압한다고 장담했다. 부견은 일단 사자를 보내 부락을 꾸짖고 화룡으로 군사를 되돌리면 영원히 봉지로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부락은 사신에게 이렇게 말하며 돌려보냈다.

“ 이렇게 동해왕(부견)에게 전하라.
  유주는 동북으로 길게 치유처 있어서
  만승(부견)이 한 바구니에 담기가 부족하다.
  나는 반드시 진중(秦中)의 왕이 되어 고조(부건)의 유업을 완수할 것이다.  
  만약 동관으로 내 수레를 마중 나온다면
  지위는 상공으로 하고 작위를 주어 
  본거지 였던 동해군으로 보내 줄 것을 약속하겠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황당한 부락의 대꾸에 화가 치민 부견은 두충과 여광에게 4만 군사를 딸려 부락 토벌에 보냈고 업의 기주병사 3만을 도귀 휘하에 두고 토벌군 선봉에 서게 하였다. 부융이 정토대도독이 되어 전군을 총괄하였다. 부견의 군사와 부락의 반란군은 하북성 정주에서 결전을 치렀다. 결과는 부락의 참패. 부락은 생포되어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부견은 부락을 죽이지는 않고 사면한 뒤 내몽고 깊은 곳으로 귀양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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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08 17: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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