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C :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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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6) 부건 암살계획과 안팎의 도전(AD353)

 

전에 예주자사였다가 동진에게 공격을 받았던 장우의 계모 한씨는 나이도 어렸고 또 미모도 뛰어났으므로 부건이 후궁인 소의로 들였었다. 그리고는 공공연히 장우를 양자라고 불렀다. 장우는 수치스럽고 기분이 몹시 상했다. 부건을 해 치우고 동진으로 투항할 계획을 몰래 세우고 황문(내시) 유황을 포섭했다. 장우가 거사할 무렵 황문 유황은 부건의 심부름으로 외출중이었으므로 안에서 호응 할 수가 없었다. 부건 암살계획은 실패했다.

      

장안을 장악한 전조 부건은 안팎으로 심한 도전을 받았다. 곳곳에서 부건에게 반기를 드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북서쪽으로 감숙성 경양의 지양, 서안 부근 호현의 유진과 하후현, 서안 서쪽 봉상의 교병과 주지의 호양적 등은 동진에게 구원을 청하면서 부건에게 대항했다. 북벌을 서두르던 동진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은 호재가 없었다. 전진의 부건으로서는 건국이래 최대의 난관과 시련에 봉착한 셈이었다.   

 

 

(17) 은호와 요양의 갈등(AD353)

 

안휘성 수춘으로 물러 나 있던 은호는 안휘성 화현에 주둔해 있는 평북장군 요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출신 자체가 저족인 데다가 투항해 온 사람으로서 동진에서 자신과 겨누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거슬렸다. 요양으로서도 동진의 분위기나 군사력이 탐탁하지 않았다. 은호는 요양의 동생을 가두고서는 요양을 죽이는 자객을 여러 명 화현으로 보냈다. 그러나 자객마다 모두 요양에게 자신을 보낸 은호를 고발하고 말았다. 은호는 끊임없이 요양을 죽이려고 군사를 몰래 보냈지만 번번이 성공하지 못했다. 요양은 심복 권익을 은호에게 보내 자신의 진심을 설득시키려고도 했다. 겉으로는 권익의 중재가 성공했다. 

은호는 북벌계획의 일환으로 밀사를 부건의 중신 양안과 뇌약가에게 보내 부건을 죽이면 그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포섭했다. 마침 장우가 부건을 죽이려는 암살시도를 한 것을 듣고 자신의 계획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0월 은호는 7만 군사를 이끌고 수춘을 출발하여 낙양을 목표로 북정에 나섰다. 그 선봉에 요양을 세웠다. 요양은 은호의 군사가 자신의 뒤를 쫓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군사를 산상(안휘성 몽성현)에 매복시켰다가 역습했다. 은호군대는 참패하여 초성(안휘성 박현)으로 물러났다. 요양은 빼앗은 산상을 형 요익에게 맡기고 다시 회남으로 돌아갔다.   

 

 

(18) 은호의 북벌실패와 사망과 환온 전권 장악(AD354)

 

중군장군 은호는 북벌에 여러 번 실패하였을 뿐 만 아니라 번번이 일으킨 요양 습격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요양은 안휘성과 강소성 회남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군사력을 키우고 또 주민들의 환심을 사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배반하려는 마음이 없으며 은호의 질시 때문에 군사를 일으킨 것이어서 진심은 아버지 요익중의 유언대로 끝까지 동진에게 충성하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동진의 정서장군 환온은 은호의 계속되는 실패와 조야의 원성을 지적하면서 은호를 파면할 것을 주청했다. 조정은 부득이 은호를 폐서인하고 신안(절강성 구현)으로 귀양 보냈다. 이제 동진의 군사대권은 환온에게로 옮겨졌다.(AD354) 은호는 혼자 이렇게 투덜거렸다.

 

“ 참으로 괴이한 일이구나 !(咄咄怪事)”

 

환온과 은호는 젊어서부터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다. 환온은 출신이 낮은 은호를 업신여겼다. 그리고 은호는 무재보다는 문재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었다. 환온은 은호를 상서령으로 임명할 생각으로 재소환하는 편지를 은호에게 보냈다. 은호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편지 답장을 쓰다가 혹이나 잘못 썼을까 두려워 고쳐 쓰기를 여러 번 하다가 결국은 빈 봉투를 보내고야 말았다. 아마도 고의는 아니었고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환온은 모욕감을 느꼈다. 더시는 은호를 부르지 않았다. 은호는 귀양지에서 그렇게 죽었다(AD354년1월). 동진 내부에서 은호와 요양, 환온과 은호의 갈등이 전개되는 동안 여러 방면에서 압박을 받던 장안의 부건은 다소 간 숨을 쉴 여유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19) 남전(藍田)전투(AD354)

 

은호가 죽고 나자 환온은 곧바로 군사를 모아 북벌에 나섰다. AD354년 3월이었다.4만여 보병과 기병으로 근거지 강릉을 출발하여 보병은 육로로, 수군은 양번(호북성 양양)에서 한수를 따라 석천(하남성 석천)을 지나 상락(섬서성 상락)을 거쳐 장안으로 향했다. 시작은 환온에게 유리했다. 환온의 별장이 상락을 공격하여 전진의 형주자사 곽경을 생포했고 이어서 청니(섬서성 남전 동남)를 함락시켰다. 동진의 사마훈은 전진의 서쪽 변경을 침략했고 또 동진과 연합한 전량(前凉)의 왕탁도 진창을 공격해 들어왔다.

 

전진 부건은 태자 부장과 함께 장안을 지키고 동생 승상 부웅, 부생, 부청, 부석 등은 함께 5만 군사로 요유(섬서 남전현 남쪽)에서 총력을 다하여 환온군을 막았다. 환온의 동생 환충은 부웅의 군대를 격파했고 여세를 몰아 동진군대는 장안 동쪽까지 진출했다. 장안에서는 부건과 태자 부장과 대사마 뇌약아가 3만 군대로 방어하고 있었다. 장안 주변의 주민들은 모두 환온의 동진에 투항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대세는 동진으로 기울 것이 틀림없었다. 

이 때 거짓말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부웅의 7천 기병결사대가 장안 남쪽 자오곡에서 동진의 사마훈 대군을 습격하여 대파한 것이다. 자오곡은 장안 남쪽 진령 산길을 빠져 나오는 남북으로 긴 협곡으로써 촉한 120여 년 전 제갈량의 북벌(AD228)에서 위연이 제안했던 습격루트였지만 제갈량이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패전하면서 마속을 읍참할 때 나왔던 길이다. 사마훈은 일단 군대를 몰아 주지(섬서성 주지)로 퇴각했다. 

 

(20) 왕맹(王猛)의 등장(AD354)

 

북해(산동성 창락현) 사람인 왕맹은 젊어서부터 공부를 좋아하면서 소소한 세상살이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화음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도 그런 왕맹을 그저 기이한 인물이려니 생각하면서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환온이 북벌에 나서면서 관중으로 들어간다고 하자 왕맹은 거지같은 옷을 걸치고 그에게로 갔다. 환온은 왕맹에게 이렇게 물었다.

 

“ 내가 동진 천자의 명을 받들고

  10만 대군으로 전진의 적도들을 공격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어찌 관중 삼진 천하의 호걸들이 나에게로 오지 않는 것이요?“  

 

왕맹은 이렇게 대답했다.

 

“ 공은 수 천리 먼 길을 멀다 않고 적진으로 쳐들어 왔으니 위태로운데다가 

  아직도 장안 지척의 파수도 건너지 못하고 있고

  또 무엇보다도 백성들은 공의 진심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환온이 가만히 왕맹의 얼굴을 드려다 보면서 말했다.

 

“공의 말이 맞는 것 같소.”

 

환온은 즉시로 왕맹을 군모좨주, 즉 군사작전참로 임명하여 등용했다. 환온의 군사는 불리했다. 먼 길을 오면서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려 했는데 부건이 이미 들판을 깨끗이 치운 뒤라 식량이 매우 결핍했다. 몇 달을 버티던 환온은 6월 퇴각하기로 결심했다.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퇴각하는 환온의 동진군사를 태자 부장이 추격하면서 1만 이상의 군사가 피살되었다. 환온의 부장 설진은 환온의 작전실패를 맹렬히 비난했다. 사실 설진은 환온에게 제갈량북벌 때 위연처럼 석천에서 장안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자고 제안했었으나 환온이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했었다. 설진은 그런 환온의 무능함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다녔다. 화가 난 환온은 설진을 죽여버렸다. 전진의 승상 부웅은 진창(섬서성 보계)에서 사마훈과 왕탁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다. 사마훈은 한중으로 도망갔고 왕탁은 진안으로 퇴각했다. 전진이 확실히 승리하면서 관중지역을 장악하게 된 전쟁이었다.

 

 

(21) 전진 승상 부웅(符雄)의 죽음(AD355) 

 

전진의 승상 부웅은 사마훈과 전량의 왕탁을 토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잔당 교병과 옹(섬서성 봉상현)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웅이 죽었다. 부웅은 부홍의 둘째 아들로써 주군 부건의 친동생이다. 부건은 부웅을 잃고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부웅은 혁혁한 무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공손하여 세상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부건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 원재(元才,부웅의 자)는 나의 주공(周公) 단이다.” 

 

부웅의 모든 지위와 작위는 그대로 큰 아들 부견에게 내려졌다. 부견 또한 아버지를 꼭 빼 닮아서 총명하고 겸손하며 효성이 지극했다. 도량이 넓고 뜻이 커서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영웅호걸들과의 교분도 두루 넓혔다. 여파루, 강왕, 양평로 등이 그와 친했다. 

 

 

(22) 태자 부장의 관중 평정과 전사(AD355)

 

부웅이 전사한 옹(섬서성 봉상현)지역은 마지막까지 전진에게 버티던 지역이었다. 부웅이 전사할 정도로 지세가 험하여 공략하기 어려운 관중의 서쪽 끝자락 지역이었다. 마침내 태자 부장이 옹주자사 교병을 잡아 죽이고 옹 지역을 함락시켰다. 관중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셈이다. 부건은 환온의 북벌을 성공적으로 막고 나아가 관중을 통일시킨 공로를 높이 사서 대대적인 포상과 승진인사를 단행했다. 뇌약아를 부웅의 후임 승상으로 임명했고 모귀는 태부, 어준은 태위, 부생은 중군대장군, 부청은 사공으로 임명했다. 부건은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았고 노인들을 자주 불러 정치를 자문하였으며 관대하고 편안하면서 절약하고 검소한 정치를 함으롰 민심을 크게 얻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화살을 맞은 태자 부장은 여러 달을 앓다가 결국 10월에 죽었다. 태자의 자리는 친동생 부생(符生, AD335-AD357)에게로 이어졌다. 

 

부생이 태어났을 때(AD335) 할아버지 부홍이나 아버지 부건 모두 후조 석륵의 부하였었다. 부생은 한 쪽 눈이 멀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멀었다고도 하고 독수리 새끼를 꺼내려다가 눈을 쪼여 실명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부홍은 어린 손자 부생에게 농담 삼아 이렇게 물었다.

 

“ 아가야,   

  애꾸눈은 눈물도 한 쪽 눈으로만 흘린다던데

  너도 눈물을 한쪽으로만 흘리느냐?“

 

부생은 이 때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칼로 자신의 팔을 찌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 이것도 한 줄기 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홍이 크게 놀라서 부생을 회초리로 때렸는데 부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 칼이나 창으로 맞는 것은 참을 수 있겠으나

  회초리로 맞는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부홍이 아들 부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저 아이는 미친 듯 패역하니

  의당 일찍이 그를 없애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온 집안을 파괴할 것이다. “

 

아버지 부홍의 말대로 부건이 부생을 죽이려고 했는데 동생 부웅이 한사코 제지하면서 말했다.

 

“ 어린 아이들이야 자라면서 응당 고칠 것입니다.

  어찌 그리 서두르십니까?“

 

그렇게 살아 난 부생은 힘이 천균을 들 수 있었고 맹수와 격투하여 이겼으며 달리는 말을 따라 잡았고 찌르며 활을 쏘는 것에서 당할 자가 없었다고 했다.

 

태자 부장이 죽었을 때 생모 강씨는 막내 부유를 세울 생각이었는데 부건은 삼양오안(三羊五眼, 세 마리 양의 다섯 개 눈. 즉 양 하나는 눈이 하나)이라는 참위서를 믿고 스무 살 부생을 태자로 삼은 것이다.  

 

(23) 부건와병(AD355년 6월)과 유언

 

그 해 부건의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다. AD 317년생이니까 서른여덟이었지만 병환으로 드러눕게 되었다. 부건의 병환이 심각해지자 태위부청은 부생의 사람됨이 난폭하기도 하였고 본인 또한 야욕이 있었으므로 이 기회에 정권을 잡을 생각을 품었다. 병환이 심각한 것으로 볼 때 부건이 이미 죽었을 것으로 생각한 부청은 군대를 이끌고 동궁으로 들어가 부생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부건은 아픈 몸을 이끌고 몸소 반란군 방어에 나섰다. 반란군 가담군사들은 죽은 줄만 알았던 부건이 살아있음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부청은 사로잡혀 죽었다. 부건은 부안에게는 모든 군사권을 준 뒤 조정의 중신을 곁으로 불러 유조를 남겼다. 태사 어준, 승상 뇌약아, 태부 모귀, 사공 왕타, 상서령 양릉, 좌복야 양안, 우복야 단순, 이부상서 신뢰가 고명대신으로 불려 들어와 유조를 받들었다. 그런 뒤 부건은 부생을 곁으로 불러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 오랑캐 출신 여러 장군이나 대신들이 

  네 말을 듣지 않으면 미리 죽여 버려라.“

 

부건은 이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AD355년 6월15일) 전진의 1대 경명황제 고조다. 서른여덟의 짧은 생이었다. 

 

사마광은 이런 부건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 고명대신은 후계자를 보필하여 황통을 잇게 하는 오른 쪽 날개와 같은 것이다.

  그들에게 우익이 되라 해 놓고 뒤로 그것을 자르라 했으니

  망하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충성을 믿지 못하면 맡기지 않으면 될 것을

  맡겨 놓고도 의심하고 시기한다면

  혼란을 불러오지 않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자치통감 권100 공안 3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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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1-18 17: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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