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B :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 칼럼

사이트 내 전체검색
많이 본 자료

칼럼

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칼럼
[인기순]
인쇄 본문 텍스트 한단계 확대 + 본문 텍스트 한단계 축소 -
 

칼럼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9) 석감의 쿠테타와 석(염)민의 쿠테타(AD349)

 

지난 4월 석세의 조정을 무너뜨릴 때 석준은 석민에게 황태자 자리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정작 쿠테타가 성공하자 자신의 아들 석연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었다. 군권을 쥐고 정치를 좌지우지 하려던 석민은 석준에게 불만을 가졌지만 드러내지 않고 휘하 장수들에게 많은 상훈을 내려서 환심을 샀다. 석민의 생각을 알고 있는 석준은 석민이 내린 상훈을 대부분 거절하거나 깎아내려 버렸다. 장수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서령 맹준과 좌위장군 왕난은 석민의 병권을 서둘러 빼앗지 않으면 큰일 날 테니 서둘러 그를 제거하기를 석준에 졸랐다. 석준은 석씨 종친인 석감, 석포, 석소 등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들 생각은 한 결 같이 원래 석씨 성이 아닌 석민을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태후는 반대했다. 

 

“ 극노(석민의 어릴 적 이름)가 없었으면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조금 교만하고 방종하다고 어찌 이리 급히도 죽일 수가 있겠소?“ 

 

석감이 몰래 빠져나와 환관 양환을 보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석민은 이농과 왕기를 겁박하여 석준 폐위를 모의한 다음 장군 소언과 주성에게 갑옷을 입혀 3천 군사로 남대에서 석준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석준은 태연히 부인과 바둑을 두다가 주성에게 물었다.

 

“ 주모자가 누구냐?”

 

주성이 말했다.

 

“ 의양왕 석감이 당연히 즉위 해야겠지요.”

 

석준이 말했다.

 

“내가 오늘같이 며칠 만에 물러나야 하는데

 석감은 며칠이나 가겠느냐?“

 

석준은 잡혀서 그날로 곤화전에서 참수되었고 정태후, 태자 석연, 맹준, 왕난 장비가 같이 죽었다. 석감이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석민은 대장군, 녹상서사 및 무덕왕에 봉해졌다. 사공 이농은 대사마, 낭개가 사공, 노심이 중서감이 되었다. 석감은 불만을 지닌 채 서쪽 고향으로 쫓겨 가는 포홍 세력들을 무마하기 위해 업에 포로로 있던 포홍의 아들 포건을 풀어주면서 포홍에게는 도독관중제군사, 정서대장군 및 옹주목, 영진주자사로 삼았다. 

 

석감은 석민이 결국에는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몰래 낙평왕 석포와 중서령 이송 등에게 야밤을 타고 궁중에 거처하는 석민과 이농을 습격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하고 궁궐이 소란해지면서 황궁무사와 석민 군사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황제 석감은 재빨리 발뺌하며 이송과 석포를 잡아 죽여서 자신과 무관한 일임을 보이려 했다. 석민이 일단 승기를 잡고 석감을 유폐시키면서 일은 그렇게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석민 일당에게 반감을 가진 석호의 또 다른 아들 석지는 요익중과 포홍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의 임지인 양국에서 군대를 몰아 남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석민은 이농과 7만 군사로 석지를 대응했다. 석지가 양국에서 군사를 움직이자 궁성 내에서도 유폐된 석감을 지지하고 석민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하나같이 성공하지 못했다. 중령군 석성과 하동태수 석휘가 석민과 이농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했고 손복고도 황제 석감의 밀지를 받고 석민을 공격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했다. 손복도는 석민의 칼에 죽고 석감은 다시 유폐되었으며 궁궐 안에서 무기를 들고 있었던 사람은 모두 참수되었다. 한족이었던 석민은 명령을 내려서 한족으로써 호족과 갈족과 같은 이민족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게는 문관의 경우 3등급을 올려주고 무관은 모두 아문을 제수한다고 했다. 하루에 수만 명, 전체적으로 20여 만 명 이민족 목이 날아갔다. (AD349년) 

  

황제 석준을 제거하고 내부 반대를 제어하는데 성공한 석민은 ‘계조이(繼趙李)’ 라는 도참설, 즉 ‘조씨를 잇는 사람은 이씨‘를 신봉하여 성을 이씨로 바꾸고 나라도 위(衛)로 고쳤다. 석준 밑에 있던 신료들은 뿔뿔이 지방으로 흩어져 할거하였다. 예를 들어 요익중은 섭두(하남성 조강현), 단감은 진류(하남성 진류현), 포홍은 반두(하남성 준현), 장침은 부구(하북성 자현) 등지를 장악하고 웅거하였다. 결국 후조는 석민이 장악하고 있는 업성 부근과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형태 부근, 그리고 군웅이 할거하고 있는 여러 지방으로 갈기갈기 찢긴 셈이었다.

기주로 달아났던 여음왕 석곤은 7만 무리를 이끌고 석민을 공격하다가 참패당했다. 갇혀있던 석감은 몰래 환관을 바깥으로 장침에게 보내 석민을 습격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교활한 환관은 그 사실을 석민과 이농에게 고해 바쳤다. 석민과 이농은 결국 석감과 그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남아있는 석호의 손자 28명을 죽였다. 석씨 성을 가지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석민은 주변의 강권에 따라 국호를 다시 대위(大魏)라고 고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염씨의 위나라 즉 염위(冉魏)라고 부른다.   

 

 

(10) 포(蒱)씨 성을 부(符)씨로 바꾼 포홍의 독살(AD350)

 

동진 조정은 내부 승계 문제로 혼란한 틈을 타서 염위를 공략할 생각을 품었다. 양주(楊洲)자사 은호와 후조에서 투항한 포홍과 그 아들 포건을 선봉으로 세워 석(염)민 침략계획을 세웠다. 당시 요익중은 관우, 즉 함곡관 지역을 놓고 포홍과 예민하게 다투고 있었는데 포홍이 염민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고 아들 요양을 파견하여 5만 군사로 포홍을 선제공격을 감행했다가 대패를 당했다. 이번 승리를 계기로 포홍은 스스로를 삼진왕(三秦王)이라 부르면서 성을 포(蒱)씨에서 부(苻)씨로 바꾸었다. 

 

손자 포견(나중에 전진의 영웅 부견)의 등에 초부(艸付) 라는 글자가 새겨 있어서 그렇게 했다는 설이 있다. 

 

장수 마추가 부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염민과 석지가 서로 겨루고 있으니 아직은 중원은 평정될 수가 없습니다.

  먼저 관중을 빼앗고 나서 가업을 튼튼히 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 다음에 시간을 봐서 동쪽으로 쳐들어가 

  천하를 다툰다면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 

 

부홍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추는 연회를 이용하여 부홍에게 짐독을 먹여 죽이고 그 무리를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아들 부건이 마추의 목을 베었다.

독약을 먹은 부홍이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 내가 입관(관중, 즉 섬서성 서안지역으로 들어감)하지 않은 것은

  중원(하남성 산서성 산동성 일대)이 쉽게 평정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룬 것이었다.

  지금 불행하게도 어린 녀석에게 독으로 죽게 되었는데

  중원은 너희들이 쉽게 감당할 곳이 아니니

  내가 죽거든 서둘러 관중으로 들어가라.“

 

말을 마치고 부홍은 죽었다. 장자 부건은 아버지의 대도독·대장군 삼진왕이라는 독자 칭호를 모두 버리고 동진의 관작만을 지닌 채 부고를 조정에 알려왔다.

 

 

(11) 부건의 장안 장악(AD350)과 전진(前秦 혹은 大秦) 건국(AD351년 1월)

 

양국의 신흥왕 석지는 후조의 황제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영녕이라고 하면서 여음왕 석곤을 상국으로 삼았다. 주변에 흩어져 웅거하는 모든 이민족은 석호의 아들로 정통성을 지닌 석지에게 지지를 표명하였다. 석지는 요익중을 우승상, 친조왕이라고 칭하면서 특별히 우대하였다. 요익중의 아들 요양이 배포도 크고 용감하며 지략이 뛰어났으므로 주변 모두가 그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했지만 요익중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석지는 요양을 예주자사 신창공에 책봉했다. 부홍의 아들 부건에게도 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에 봉하였다. 

 

AD350년 4월 석지는 10만 군사를 석곤에게 붙여서 왕랑과 장거 등과 함께 남쪽 염민의 위나라를 공격했다. 6월에 석곤의 군사는 한단을 점거하고 번양(하남성 내황현)에서 유국과 협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염위의 장군 왕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석곤의 군대는 크게 깨졌다. 유국은 군대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석지의 거기장군 왕랑이 석곤과 함께 업을 공격하러 떠난 사이 왕랑의 사마 두홍은 장안을 점거하고서 스스로 동진의 정북장군 및 옹주자사라고 부르면서 장거를 자신의 사마로 삼았는데 부홍의 아들 부건은 장안을 뺏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두홍이 그 생각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겉으로 석지가 내린 후조의 관작(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을 받는 척하면서 부하들을 하남 요지에 임명하고 또 보리를 심는 척하면서 서쪽(즉 장안)을 공략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이 속였다.

이렇게 위장하여 두홍을 안심시킨 뒤 부건은 스스로 동진이 내린 직책, 즉 정서대장군 및 도독관중제군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격적으로 군대를 몰아서 장안의 두홍을 쳐들어갔다. 동생 부웅은 5천 군사로 동관으로 들어가고, 조카 부청은 7천 무리로 지관(하남성 제원)으로 들어갔다. 부건이 조카 부청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 성공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북에서 죽을 것이고 

  나는 하남에서 죽을 것이다.“  

 

두홍은 장수 장선과 1만 3천의 군사를 보내 동관의 북쪽에서 부웅과 부청의 군사를 맞아 싸웠으나 장선은 참패하고 말았다. 두홍은 관중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부웅과 부청의 군사를 대적했으나 두홍의 아우 두욱이 부건에게 항복함으로써 거의 모든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주변의 모든 성읍들은 부건에게 귀부하였지만 두홍은 장안성을 닫아걸고 대치하면서 항복하지 않고 버티었다.(AD350년8월)

 

부청은 위수 북쪽에서 장선의 나머지 군사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장선이 잡히자 삼보(장안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눈 지역)의 모든 성과 보루들이 부청에게 항복했다. 10월 부건이 장안으로 급히 들어오자 석 달간이나 버티던 두홍과 장거도 성을 버리고 서쪽의 사죽(섬서성 주지)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부건은 11월 27일 장안성에 입성했다. 당시 백성들은 진(晉)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살아있었으므로 부건은 참군 두산백을 동진 수도 건강에 보내 형식적으로 장안이 동진 소유의 땅이 된 것처럼 승리를 바쳤다. 다음해(AD351년 1월) 부건은 장안에서 대진(大秦 : 역사에서는 전진前秦)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천왕자리에 올랐고 일 년 뒤인 AD352년에는 장안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12) 화북지역의 혼란과 요익중 아들 요양의 동진항복(AD352)

 

당시 황하 이북지역은 크게 세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안(지금의 서안)지역은 부건이 장악하고 있었고 양국(하북성 형태)지역은 후조의 석지가 군림하고 있었으며 그 남쪽 업(하북성 한단)지역은 위(魏)나라라고 부른 석(염)민이 지배하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자칭 황제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당시 사람들은 정통성이 건강(지금 남경)에 있는 동진에 있다고 여겼다. 그 위 지금의 북경 쪽에는 AD337년 모용황이 세운 전연(前燕)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중원지역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후조의 장수 유현이 반란을 일으켜 석지와 승상 석병 등 10여명의 목을 벤 뒤 석(염)민에게 수급을 보내왔다.(AD351) 석륵이 AD319년 세운 후조가 이 때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석(염)민은 유현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상대장군, 대선우 및 기주목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유현이 만족할 리가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바로 남침하여 석(염)민의 수도 업을 공략했다가 실패했다. 양국(형태)으로 돌아온 유현은 스스로 후조의 황제라고 일컬었다. 다음해(AD352) 유현은 또 다시 석(염)민의 상산(하북성 정정현)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양국으로 돌아왔다. 유현의 부장 조복구는 몰래 석민에게 성문을 열어주어 유현과 그의 측근들이 몰살당했다.    

고령의 저족 지도자 요익중은 깊은 병이 들었다. 42명의 아들을 다 모아 놓은 다음 이렇게 말했다.

 

“ 석씨(석륵을 말함)가 나를 후히 대해 주었으므로 내가 끝까지

  석씨 후손들에게 충성을 바치려 했었다.

  이제 석씨는 모두 사라졌으므로 중원에는 주인이 벗어진 셈이다. 

  서둘러 동진으로 내려가라.

  그리고 신하로써의 절개를 굳게 지키면서

  나쁜 일(반역)을 도모하지 말거라.“

 

황제 석호에게 어린아이 대하듯 호령하던 요익중은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들 요양은 발상을 숨기고 중원의 남쪽으로 진격해서 양평(산동성 관도현), 원성(하북성 대명현) 및 발간(산동성 당읍현) 등지를 정벌해 나갔다. 부건의 전진 군대와 하남지역에서 맞붙어 크게 패한 뒤 쫓기듯 내려와 아버지 요익중의 권고대로 5형제를 인질로 보내고 동진에 항복했다. 동진 조정에서는 요양을 초성(안휘성 박현)에 주둔시켰다.  

   

 

(13) 염위 석(염)민의 멸망(AD352)

 

형태의 석지와 업의 석민이 심하게 다투는 동안 전연의 모용준은 수도를 용성에서 계(북경)로 옮기면서 남하를 계속했다. 이미 형태와 업을 제외한 하내 거의 모든 지역이 전연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사실상 석지의 후조나 염위의 석민 모두 전연의 모용준 독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석(염)민은 양국의 후조가 지리멸렬하게 진압되자 북진하여 전연을 토벌하는 꿈을 꾸었다. 석민의 부하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지만 석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북진을 계획했다. 석민과 모용준의 결전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전쟁은 쉽게 결판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연은 기병 중심의 군대였고 석민의 군대는 정예 보병 중심의 군대였다. 막강한 기마대군으로 전연이 열 번 싸워도 산이나 숲으로 숨어버리는 석민의 군대를 격파하기 어려웠다. 이기기 위해서는 평지로 유인하거나 아니면 겹겹이 포위하여 고사시키는 방법 밖에 없었다. 전연의 장수들은 석민의 보병을 평지로 유인했다. 그리고 궁수 5천을 매복시켜 놓았다. 석민이 전연의 꾀에 속아 넘어갔다. 석민은 여러 겹으로 포위된 뒤 결국 사로잡혀 계로 압송되었다(4월20일).보름 여 뒤 석민은 용성에서 참수되었다.(5월 3일) 이로써 하북성 일대는 모용준의 전연의 영토가 되었다.      

 

(14) 부건의 허창 진격(AD352)

 

동진의 안서장군 사상과 최근 동진으로 항복한 평북장군 요양은 함께 허창을 공격하였다. 허창을 지키고 있던 예주자사 장우는 부건에게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부건은 부웅, 부청과 2만 군사를 보내 동진 군대를 격파했다. 부웅은 그 지역 백성 5만 여호를 장안으로 이주시켰다. 사상은 모든 것을 버리고 회남으로 도망갔다. 북벌을 강력히 주창하던 동진 최고 권력자 은호의 꿈은 일단 좌절된 셈이다. 그리고 이 일 이후로 요양은 동진의 군사력에 대해 심각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황하 이남 과 회하 이북 지역은 확실히 전진의 세력권 안에 들게 된 셈이다. 

 

 

(15) 동진 은호의 북벌(AD352)과 왕희지 반대

 

동진의 정서대장군 환온과 중군대장군 은호는 모두 북벌에 강한 의욕을 보여 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하지역은 석민과 석지의 싸움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고 장안의 부건 또한 전진을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군사력이 강하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환온과 은호의 북벌의 무모함은 허창에서 사상이 부건에게 참패한 다음에도 바뀌지 않았다. 은호의 휘하에 잇던 왕희지(동진의 필체로 유명한 서예가)가 상사인 은호에게 이런 편지를 올렸다.    

 

“ 근래에 국정을 담당하는 자들이

  깊은 꾀를 내고 멀리 염려하지를 못하여

  나라의 근본을 피곤하고 고갈되게 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였으나

  한 번도 공이라 할 만한 것을 세우지도 못하고

  천하 사람들에게 드디어 흙이 무너지는 형국을 초래하고 말았으니

  어찌 그 책임자들에게 책임이 없다 하겠소.

  지금 군대는 밖에서 깨지고 안으로 밑천은 고갈되어

  회수를 지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니

  장강으로 돌아와서 지키면서 장수와 군사를 독려하고

  옛 성곽을 지키면서 장강 밖은 그저 간접적으로 관할하는 것만 못하다고 봅니다.

  허물을 끌어다가 자기의 책임으로 돌리고

  다시 좋은 정치를 개시하면서

  부역과 세금을 줄여 주면서 백성들을 보살피면

  대체로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위급함을 면할 수 있겠습니다.

  사군께서는 포의로 시작하셔서 천하 중임을 떠 맡으셨지만

  실패하고 잃어버린 것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아마도 조정안에서 그 대 같이 큰 책임을 질 사람도 따로 없을 겁니다.

  이전의 북벌이 꼼꼼하게 챙기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면서

  또 다시 분수 넘치는 북벌을 시도한다면

  비록 우주가 넓다 한 들 어디서 받아 주겠습니까?

  이것이 어리석든 현명하든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왕희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환온의 지지를 받은 은호는 사상과 함께 다시 허창을 공격하여 전진 군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생각 같아서는 바로 동진을 반격하고 싶었지만 부건은 그럴 수가 없었다. 국경의 북동쪽에서 전량(前凉)의 장중화가 끊임없이 내침해 왔기 때문이다.       

 

64338eac779ec40c005ca8107ed2548e_1515657
 

좋아요34
퍼가기
기사입력 2018-01-11 17:00:35
검색어ta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명칭(회사명) : (사)국가미래연구원등록번호 : 서울, 아03286등록일자 : 2014년 8월 7일제호(신문명) : ifsPOST

발행인 : 김광두편집인 : 이계민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마포대로 15, 현대빌딩 202호

발행연월일 : 2014년 8월 7일청소년보호책임자 : 박간

TEL. 02-715-2669 FAX. 02-706-2669 E-MAIL. ifs2010@ifs.or.kr
사업자등록번호:105-82-19095 대표(원장):김도훈 모바일 버전

Copyright ©2016 IFS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전완식 Produced by 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