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 : #3B 통합으로 북중국을 통일한 탁발사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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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 북위 건국의 기초를 닦은 도무제 탁발규(AD371-AD409,재위 AD386-AD409)

 

몽골민족의 한 지류에 불과한 선비족으로써 같은 종족 전진의 부견에게 망한 대나라 후손 으로써 도망다니며 쫓기는 신세였지만 장차 북중국을 통일하여 시황제의 진나라에 버금가는 거대한 북위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 탁발규(AD371-AD409,재위 AD386-AD409)다. 

 

그에게는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적으로부터 북위라는 작은 나라를 지켜나가는 일이 급선무였다. 서쪽의 유의진과 혁련발발, 북서쪽에는 유연의 욱구려가한, 북동쪽에는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동남쪽에는 모용수의 후연, 서남쪽에는 후진의 요흥, 그리고 장강 아래에는 동진이 북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외에도 북량, 서량, 남연, 서연, 서진, 후량 등 그야말로 5호 십육국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척박한 내몽고 하림각이와 대동지역에서 일어난 북위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조건이 열악하고 생존이 위태로운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한과 사마염의 서진 이후 수십 개 국가로 쪼개지고 분열된 북중국을 손자 탁발도가 완전히 통일(AD439)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것은 도무제 탁발규의 통합능력이 아니랄 수가 없다. 유위진을 격파(AD391)하여 서쪽으로 국경을 확장하고 참합피 대전에서 당시 최강국이었던 후연에 결정타를 가하였고(AD395년) 시벽전투에서는 후진의 요흥을 크게 겨파하였다.(AD402) 이런 무공에 더하여 탁발규는 새로 병합한 나라의 인사를 적극적으로 우대하였다. 같은 선비족인 서연, 후연, 남연의 망명 인사들을 융숭히 대접하는 것은 물론 강족인 후진이나 한족인 동진의 망명인사들을 환대했다. 최령을 잘못 죽인 것에 대한 실책을 통감한 이후로는 더욱 반대하는 세력을 포용하고 관용하려고 노력했다. 

 

 

<2> 한식산복용으로 정신질환 걸린 탁발규(AD409)

 

당시 탁발규는 한식산(寒食散)이라는 약을 오래 복용하고 있었다. 한식산은 동진 사람들이 젊음유지와 피부미용을 위해 복용하던 약으로써 심한 통증을 유발하면서 신경계 부작용과 피부가 찢어지거나 짓무르는 부작용이 있는 약이었다. 이 약을 장기 복용함에 따라 탁발규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는데 성격이 일정치 않았으며 조급하고 화를 내는 것이 심각할 정도로 불안정적 하였다. 

 

이 때 날씨가 변덕스러워 번개와 천둥이 잦았고 전국적으로 이상기후의 보고가 빈번히 올라오자 점을 치는 사람들은 그것은 탁발규의 주변에서 큰 변고가 일어날 징조라고 경고했다. 탁발규는 근심하고 걱정하며 며칠 동안 먹지 않거나 잠을 자지 못했으며 혼자서 중얼거리며 화를 냈다가 웃었다가 하는 증세를 보였다. 주변 인사들을 믿지 못하여 돌연히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 죽이기도 하였고 혹은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다거나 걸음걸이가 흔들려 절도가 없다거나 말이 틀리거나 하면 그것은 마음속으로 나쁜 생각을 품은 증거라 외치며 칼로 쳐서 죽였고 그 시체를 천안전(황궁) 궁궐 밖에 늘어놓고 전시하기도 하였다.

 

조정대신들 조차 오늘의 자신의 목숨을 보호받지 못하고 백관들도 오로지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전전긍긍하는 처지였으므로 정부의 관리나 행정기능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시장에는 도둑들이 넘쳐났고 산에는 산적들이 밤낮으로 출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어가 되지 못했다. 마을과 거리에는 사람의 인적이 거의 끊어졌으며 시장도 서지 못하였다. 모든 중신들이 두려움에 탁발규를 피했지만 오로지 최굉은 탁발규의 곁에서 병든 그를 간호하고 시중을 들었다. 최굉은 탁발규 최고의 충신 최호의 아들이다.(지난번 칼럼,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3, <6> 참조) 탁발규는 자신의 병을 이상기후 때문으로 여겼던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이렇게 난폭한 정치를 하지만

  재변이 다 지나가고 나면 단연히 다시 깨끗한 정치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朕故纵之使然,待过灾年,当更清治之耳) “

    

 

<3> 탁발규 시해(AD409)

 

자신의 건강에 대해 우려가 되었던 탁발규는 장자인 제왕 탁발사를 태자로 삼으려했다. 북위에는 태자로 책립하기 전에 먼저 태자생모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탁발사의 생모 유귀인에게 죽음을 내린 뒤 아들에게 그런 풍습이 생긴 이유를 잘 설명했다. 그러나 효성심 깊었던 태자 탁발사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매일 밤마다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탁발규가 화를 내며 책망하면서 탁발사를 소환했다. 탁발사의 측근들은 탁발규의 정신건강이 정상이 아니므로 아들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를 도망가도록 하여 비밀장소에 숨겼다.

      

탁발규는 생모 하태후의 이복여동생의 미모를 보고 반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서 이모뻘인 그 여자 하씨를 얻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하태후는 허락하지 않았다.

 

 

“ 안되오.

  아름다움이 지나치면 반드시 착하지 못함이 있소,

  또 그 여자에게는 이미 남편이 있소.“

 

탁발규는 몰래 사람을 보내 남편을 죽이고 그 여자를 받아들여 아이를 낳았는데 이 사람이 탁발소다. 탁발소는 성격이 흉폭하고 사나웠으며 놀기를 좋아하고 아주 무뢰하고 난폭하고 무자비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겁탈하는 것을 즐기며 괴롭혔다. 탁발규가 그를 불러 우물에 거의 죽을 때까지 거꾸로 매달며 훈육했다. 큰 형인 탁발사가 그런 동생을 가엽게 여겨 책망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였으나 탁발소는 형을 원망하고 이를 악물었다. 탁발규가 탁발소의 생모 하부인을 견책하려고 가두었고 장차 죽일 생각이었으나 감히 결행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하부인이 아들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이렇게 물었다.

 

“ 네가 나를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야 할 것 아니냐?”

 

탁발규의 잔인함을 잘 알고 있던 궁궐 내부에서 섣불리 탁발소를 도와주려고 나설 사람은 없었다. 당시 16세 탁발소는 자기의 침전 시종 환관 몇 명과 함께 궁궐 천안전의 담을 타넘고 들어가 탁발규를 죽였다.(AD409.10.13) 다음날 탁발소는 아버지의 시해를 알리지 않고 백관을 불러 물었다.

 

“ 내게는 숙부도 있고 형님도 있는데

  여러 공경들은 누구를 따르시겠소?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도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한참 뒤에 장손숭이 나서서 말했다.

 

“ 왕(청하왕 탁발소)을 따르겠습니다. ”    

     

대신들은 탁발규의 시해를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누구도 소리 내 슬퍼할 수가 없었다. 다만 가슴 속으로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품었다. 탁발소에 대한 반발은 지방에서부터 일어났다.특히 탁발규를 보호하고 지원해 줬던 하란부 군사들이 수도로 진격해 왔다. 탁발소는 창고를 풀어 대대적으로 곡식과 비단을 풀어 달래려고 했다. 최굉만 받지 않았다.   

  

숨어있던 제왕 탁발사가 이 소식을 듣고 몰래 왕낙아의 집에 숨어 들어왔다. 주민들이 그 소식을 듣고 필요한 물자를 제공했고 자원자들도 몰려들었다. 탁발소가 그 정보를 듣고는 자객을 보냈으나 자객 또한 탁발소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전국에서 지원병이 몰려들고 궁궐 내부에서조차 탁발소의 령이 서지 않았으니 탁발소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결국 탁발소의 시위군사가 탁발소를 붙잡아 탁발사에게 송환했다. 탁발사는 탁발소와 그 어미 하씨, 그리고 시해에 참여한 환관과 시녀 10여명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 다음날 탁발사는 황제에 올랐다.(AD409.10.17)

      

 

<4> 탁발사의 인재 등용(AD409)

 

 

황제에 오른 탁발사가 맨 먼저 한 일은 쫓겨났거나 숨어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일이었다. 장손숭, 안동, 해근, 최굉, 탁발굴 등 여덟 명(이를 팔공, 八公이라 함)을 최측근에 배치했다.

공신 왕낙아와 치로두를 산시상시로 삼고 숙손준을 위장군(황궁호위)으로 명했다. 탁발사가 대신들에게 선제 탁발규가 아끼고 신뢰한 신하가 누구냐고 묻자 모두들 이선이라고 대답했다. 탁발사가 이선을 불러 물었다.

 

“ 경은 무슨 재주와 공로가 있어서 

  돌아가신 선제께서 믿으셨소?“

 

이선이 이렇게 대답했다.

 

“ 신은 재주도 없고 공로도 없습니다.

  다만 충성과 곧음으로 선제께 알려졌을 뿐입니다. 

  (臣不才无功,但以忠直为先帝所知耳)“

 

탁발사는 이선에게 안동장군을 명하고 항상 궐내에 유숙하면서 자문에 임하도록 했다.

 

 

<5> 사면이냐 징벌이냐

 

당시 지방의 토호들은 가혹한 정치를 일삼아 백성들의 큰 원성을 사고 있었다. 지나친 혹정에 반발한 주민들은 산적이 되어 지방 토호들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탁발사로써는 산적을을 발생시킨 지방 토호들을 심하게 징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대하며 상을 내려 달랠 수도 없었다. 탁발사는 팔공(八公)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하면서 말했다.

 

“ 짐이 산적문제로 골머리가 아픈데

  그 죄는 산적에게도 있고 또 토호들에게도 있소.

  지금 이미 죄를 지은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져서

  모두 죽일 수는 없는 지경이니

  사면령을 내려 일단 죄를 한 번에 다 씻어 주는 게 어떻겠소?“

 

탁발굴이 반대했다.

 

“ 백성들이 죄다 도적이 되어도 징벌하지 않고 사면한다면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에 구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먼저 징벌하시고

  사면은 나중에 고려하심이 옳습니다.“

 

최굉이 그렇지 않다고 했다.

 

“ 성스런 황제께서 다스리심의 근본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 최우선 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이기고 지는 것을 논하는 것은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탁발굴은 선 징벌, 후 사면이라고는 하지만 둘 다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면한다고 어찌 모두 평정이 되겠습니까?

  반드시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사면하시고 말을 듣지 않는 경우에 징벌하심이 옳겠습니다.“ 

 

탁발사는 최굉의 말을 채택했다.(AD410)

 

 

<6> 북진하는 동진(東晋)과 후진(後秦)의 멸망(AD419)

 

대동에 도읍한 북위가 비교적 평온한 세월 보내는 AD410년대 후반기에 후진이 장악하고 있는 관중하서지역과 동진의 강남 지역은 각각 격변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먼저 후진의 경우에는 탁월한 지도자 요흥이 죽으면서(AD417) 조정이 내분에 휩싸였고 동진에서는 조정의 실권을 잡은 유유가 장강을 넘어 회수와 사수를 넘어 한수이북으로 후진을 압박하려던 상황이었다.

 

북위의 탁발사는 AD415년 후진 요흥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였으므로 서로 혼인지간의 국가였다. 동진으로써는 후진 공격시 그런 북위의 배후 공격 가능성에 신경이 쓰였다. 유유는 탁발사에게 잠시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후진에서도 동진의 공격에 대하여 북위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탁발사로써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했다.        

 

탁발사는 여러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이 문제를 의논했다. 대부분의 의견은 길을 빌려 주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동관은 매우 험조한 요충지이므로 길을 빌려주어 유유처럼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 봤자 승산이 매우 낮은데다가 유유의 진심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게다가 후진은 혼인한 나라라는 것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명신 최굉의 아들 최호의 생각은 달랐다. 유유의 진심은 진실로 안으로 혼란한 후진을 노리는 것이며 만약 허락지 않으면 먼저 우리를 공격하려 들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길을 터주어 후진을 공격하게 한 뒤 그들의 후미를 틀어막아 버리면 그것이 상책이라는 말이었다. 유유가 이기면 그에게는 빚을 지게 하는 것이고 유유가 지면 우리가 후진을 도왔다는 명분이 생기는 일이라는 말이다. 한 여자(황후 요씨)에 얽매여 큰일을 그르치는 일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책망하였다.

 

탁발사는 대신들의 말과 최호의 말을 절충하는 안을 내었다. 동진 유유에게 길을 허락하되 장손숭 등에게 군사 10만을 주어 황하 북안에서 유유군사를 방어하도록 조치했다. 유유군사는 항하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 장안을 함락시켰다.(AD409.8월) 요흥의 아들 요홍은 왕진악에게 잡혀 건강으로 붙들려 온 뒤 참수되었다. 후진이 멸망한 것이다. 유유는 동진을 해체시키고 선양받아 송(역사상 유송, 劉宋이라는 나라)을 세운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AD420)  

 

 

<7> 한식산 고통과 탁발사 죽음 (AD423) 

 

아버지 탁발규와 마찬가지로 탁발사도 한식산 후유증에 시달렸다. 동진의 사마비도 한식산의 부작용으로 25세 나이에 죽었는데(AD397) 기후마저 여러 재앙이 이어서 나타나자 탁발사가 두려운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 여러 아들들이 아직 어리니 나 죽은 뒤의 문제(후사)를 계책해 주시오.”

 

최호와 장손숭 모두 서둘러 태자를 세우라고 권했다. 탁발사는 열네 살 탁발도를 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장손숭과 해근과 안동을 좌보로, 최호와 목관과 구퇴를 우필로 삼아 태자를 보필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탁발사는 탁발도를 조용히 불러서 이들의 장점을 일러 주었다.  

 

“ 장손숭은 훈구대신으로써 4대를 섬긴 원로이시니 잘 모셔야 하고,

  해근은 말과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고,

  안동은 세상 물정을 꿰뚫어 알고 있는 사람이며,

  목관은 정치의 요령을 통달하고 있어서 내 뜻이 무엇인지 잘 읽을 줄 알며,

  최호는 견문 넓고 암기력이 좋은데다가 천문과 사람을 읽을 줄 아는 탁월한 재능이 있고.

  구퇴는 공정하고 근신하는데 모범을 보일 사람이다.“

 

태자 탁발규는 매우 총명하여 신하들이 탁발사에게 어려운 문제를 들고 오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이건 내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장차 너희 주군이 될 태자에게 가서 물어 봐라.“

 

유송의 시조인 유유가 병으로 사망하자(AD422) 탁발사는 유송을 침략할 생각을 품었다.ㅍ최호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해근과 주기와 공손표를 내보내 남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주기는 허창을 함락시켰으며 공손표는 낙양 서북쪽 호뢰관을 함락시켰다. 동쪽 전선으로 진격한 숙손건은 산동성 태안(태산)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이제 북위의 영토는 회하와 한수 이북까지 확장되었다.(제1차 위송 전쟁)

 

탁발사는 그 해 갑자기 사망했다. 나이가 32세 였다. 아마도 한식산의 후유증일 것이다. 탁발규가 열여섯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탁발사를 북위의 태종 명원제라 부르고 탁발도를 세조 태무제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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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25 17: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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