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부도의 날’과 1997년 환란(換亂)의 진실 (3) > News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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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금융위기의 불씨 한국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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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1월 3일 우리나라 외환시장에서 해외 투자자들, 특히 일본 금융사들의 갑작스러운 대출만기연장 중단과 자금 회수가 일시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신용공급 중단’ 즉 ‘서든 스톱(sudden stop)’이 발생했다. 7월 2일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시작된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불씨가 10월 23일 홍콩증시 폭락사태가 일으킨 후폭풍의 바람을 타고 4개월여 만에 마침내 한국에까지 날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사그라들지 않고 대한민국을 태우는 거대한 산불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더더군다나 대한민국 금고에 달러화가 바닥나고 해외채무를 이행하지 못해 부도 위기에까지 몰리게 하는 큰 불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11월 대형 산불이 나기까지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 어디에도, 누구도 ‘산불발생 위험’을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정보기관 CIA는 달랐다. CIA는 한국에서의 사태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미국정부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2009년 9월 1일 방송된 KBS 1 TV 시사기획 쌈(지금의 ‘창’)은 ‘IMF와 트로이목마’편(금철영, 윤석구, 강승혁 기자)에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미국 CIA 비밀문서를 발굴 최초로 공개했다. KBS 보도에 따르면 CIA는 8월 5일자로 “한국의 외환보유고 대비 단기자본 비율은 어느 신흥국보다 높으며 최근 한보와 기아그룹사태는 이미 취약한 은행시스템의 긴장을 높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9월 4일에는 “외환보유고 대비 단기부채가 막대한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해외은행이 신용공급을 중단하면 유동성 부족(liquidity crunch)에 직면할 수 있다”고 보고 했다며(방송 화면 참조) CIA는 일찍부터 한국의 유동성위기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2개월 후에 한국에서는 실제로 서든 스톱이 발생했고 우리는 외환위기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10월 21일 자에서는 “한국의 단기부채는 외환보유고의 250% 이상 추정된다‘고 보고했다고 보도했다. CIA는 국가기밀사항일 수 있는 우리나라 대외 부채규모와 외화보유고를 구체적인 숫자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CIA와 같은 정보기관이 없었다. 9월경 그런 경고를 했다는 정보기관, 언론, 전문가가 국내에도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국내외 금융이나 증시 전문가들 가운데도 한국이 유동성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곳은 없었다. 9월 4일 미국 CIA가 경고를 보내고 있을 때 조선일보는 9월18일자 신문 머리기사로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 IMF 총재가 ‘한국경제는 위기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는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CIA와 달리 IMF 마저도 한국 상황을 비관적으로 전망하지 않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히려 정부는 한보사태이후 발생한 기업들의 부도사태로 한국경제에 대한 외국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를 불식시키기 위해 1997년 5월 6일자로 김기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이사장을 ‘대외경제협력 담당대사’로 임명하고 미국과 영국등 주요 금융회사나 은행을 방문 ‘한국경제는 국제수지, 외환보유고가 개선되어 기초가 튼튼하다’는 메시지를 보내 국제금융사회를 안심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김 대사는 외환위기가 발생할 때까지도 그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대한민국은 홍콩사태가 발생하기까지 경제정책 총괄 책임자인 강경식 경제부총리, 국가 국고지기인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도 단기성 해외부채와 외환보유고가 얼마인지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숫자를 가지지 못했고,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물며 김영삼 대통령인들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대통령을 모시고 있었던 김인호 경제수석도, 나를 포함한 청와대의 다른 수석들도 10월이 다 가도록 우리나라에 유동성 부족으로 외환위기가 닥친다는 징후를 느끼지 못했다. 매일 아침 비서실장이 주재하는 수석회의에서도, 대통령을 모시고 열리는 매주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거나 보고된 기억이 없다. 오히려 7월 15일 시작되어 3개월여를 끌고 있는 기아사태를 마무리 짓는 문제가 시급했고, 치열해지고 있는 이회창, 김대중 후보의 대선 전쟁이 과열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문제가 더 시급한 당면과제였다. 내 기억으로는 외환위기의 불길한 징후를 처음 느끼기 시작한 것은 11월 8일 아침 수석회의에서 김인호 경제수석이 유동성부족에 대해 보고한 이후가 아닌가 싶다.   

 

‘5년 차 병’을 앓던 1997년의 대한민국  

 

  10월 23일 홍콩사태가 일어나기 하루 전인 10월 22일 정부는 마침내 기아사태를 마무리 짓고 기아를 법정 관리를 결정했다. 그러나 7월 15일 기아사태가 발생한 이후 3개월 가까운 시간을 우리는 기아사태에 발목이 붙잡혀있었다. 우리나라는 15대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었고 나라는 이회창, 김대중 후보 간의 치열한 대선 전쟁에 넋을 팔았고, 동남아시아 경제를 태우고 있는 외환위기는 먼 산의 불구경에 불과했다. 정보기관도, 언론도, 전문가들도 그랬다. 

 

  거기에다 우리는 5년마다 도지는 ‘5년 차 병’을 앓고 있었다. 5년 단임 대통령제로 말미암아 도지는 피할 수 없는 고질병이다.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가 되면 대통령과 청와대의 ‘영(令)’이 제대로 서지 않아 발생하는 ‘레임덕’ 이란 구조적인 ‘5년 차 병’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우리는 ‘5년 단임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5년마다 대통령을 새로 뽑아 평화적으로 정부(또는 정권)를 교체하는 새로운 민주적 전통을 확립했다. 그래서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가 되면 반드시 현직 대통령은 물러나기 때문에 권부라는 청와대는 ‘지는 권력’이 되어 힘이 빠지고 빛을 잃어간다. 여야 대통령 후보가 정해지면 나라 권력은 3분(分) 되며 떠오르는 새 권력을 향해 권력 이동이 시작된다. 국정은 대통령선거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대선전쟁으로 기강이 무너지고 문란해지면서 중심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한다. 

 

   대선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인 7월 15일 기아자동차 부도가 발생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월 23일 한보철강(현 현대제철)이 부도가 났고 1월 30일 재계 순위 14위로 2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기업 한보그룹이 부도 처리되었다. 한보는 방만한 문어발식 사업확장과 투기적 경영으로 5조 원 규모의 금융채무를 지고 도산했다. 한보 부도처리는 ‘대마불사의 신화’를 깨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관치금융의 낡은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정경유착의 정치적 외압으로 기업의 재무 건전성과는 무관하게 부실대출을 해온 금융기관들과 종금사들부터 한보의 직격탄을 맡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많은 종금사와 심지어 은행까지도 가세하여 일본으로부터 (초)저금리 단기자금을 달러 표기로 차입해 국내외 기업, 예를 들면 동아시아는 물론 러시아 등지의 금융기관이나 기업에 고금리 중장기 자금으로 대출하고 이자를 따먹는 소위 ‘엔 케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로 큰 수익을 내며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그만큼 도덕적 해이도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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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사태는 한보에 부실대출을 한 종금사와 은행을 흔들었고 이로 인한 금융경색은 뒤이어 삼미(3.19), 진로(4.21), 삼립식품(5.15), 대농(5.19), 한신공영(5.30) 등 대기업들의 ‘부도 도미노’로 이어졌다. 한국의 금융과 기업이 이미 내부적으로 심각한 중병이 들어 있는 상태에서 당시 10조 원이 넘는 부채를 안고 있는 기아자동차의 부도는 진도 7.0 이상의 강진으로 대한민국 경제를 흔드는 대재앙이었다. 종업원 56,700여 명과 38개 계열사와 1만 7천 협력업체직원과 가족들을 포함하면 수십만 명이 직접적인 피해를 보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미국 CIA 보고서 지적대로 우리나라는 사실상 한보사태로 돈줄이 막히기 시작하면서 메마르고 건조한 금융환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기아사태가 일어나 금융환경이 더욱 메마르면서 외환위기라는 대형 산불이 일어날 최적의 발화 조건이 만들어졌다. 한보와 기아사태는 외환위기의 역사적 서막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야 정치권은 한보와 기아사태의 원인을 진단하고 수습방안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선거전에 활용할 정치적 호재쯤으로 생각했다. 

 

  여야 정치인들은 나라 경제를 흔드는 한보사태의 원인을 규명한다며 국회 한보 청문회(4.7-25)를 열어 사태의 책임을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의 국정농단으로 몰아가는 정치싸움으로 허송했다. 결국에 김현철은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요즈음 말로 신상이 탈탈 털리게 되었고 김영삼 대통령의 엄정한 수사와 구속 지시에 따라 한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쓰고 남은 대선자금 잔여금에 대한 조세포탈혐의로 구속되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임기 말의 김영삼 대통령은 차남의 국정개입 문제 등으로 국민의 지지를 잃는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받고 무너졌다. 자신이 창당한 신한국당의 당권(黨權)마저도 반 김영삼계인 이회창에게 넘겨주면서 정치적 기반마저 상실하며 고립무원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게 1997년 전반기를 대선 전초전의 기 싸움으로 보내는 동안 7월 2일 태국 바트화가 폭락하면서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일어났다. 8월 14일에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폭락했다. 동아시아 금융사태는 대만(10.17)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10월 23일 홍콩사태가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기아그룹에 이어 대농그룹(8.26), 쌍방울그룹(10.15), 대일정밀(10.16)이 부도 처리되었고 기아도 마침내 10월 22일 부도 처리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다음 날 홍콩사태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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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운동이 본격화하는 시점에 발생한 기아 부도는 정치적 파장이 너무나 컸다. 부도 처리해법을 놓고 정부가 주춤거리는 동안 정치권은 기아 부도 문제를 정치문제로 만들었다. 김선홍 기아회장은 노조와 공조하여 대기업의 CEO로서는 정말 상식 밖으로 정치인보다 더 정치인다운 행보를 했다. 김 회장과 노조는 노조가 우리 사주조합을 통해 기아주식의 13.8%를 보유하고 있다며 모범적인 국민기업임을 강조하고 정부의 경제적 해결방안을 저지하기 위해 대 국민홍보활동을 전개하며 ‘기아 살리기 국민운동’에 나섰다. 기아는 정부를 압박하며 시간을 끌고 부도처리를 지연시켰다. 20여 개의 재야 시민단체와 김대중, 이회창 대선후보들이 표를 의식한 인기 영합으로 기아 살리기에 동참하면서 사태는 더욱 커졌다. 기아에 대한 검찰수사로 기아의 5조 원이 넘는 분식회계를 비롯한 김선홍 회장 등 임직원들의 비리 등이 드러나면서 사태가 발생한 지 3개월이 지나서야 정부는 기아의 법정관리를 최종결정했다. 

  

  기아사태 속에서 본격화된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대선 전쟁과 이에 편승한 노동개혁을 반대하는 노조와 금융개혁을 거부하는 격렬한 한국은행 노조파업 등은 한국경제를 더욱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표만 쫓는 대선 후보자들에게 나라 경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기아사태가 자신들의 표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문제해결보다는 오히려 문제해결이 지연되고 사태가 악화되어 생기는 반사이익을 챙기는데 급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대선 전쟁의 와중에 선거판을 뒤흔드는 정치적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이회창 후보는 10월 4일부터 14일까지 3차례에 걸쳐 ‘김대중 670억 원 비자금’을 폭로하며 수사를 촉구했다. 김대중 후보 진영은 수사저지를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수사 강행과 저지가 정면으로 격돌하면서 대한민국 정치는 일촉즉발의 험악한 위기 상황이 되었고 모두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을 지켜보는 상황이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를 불과 5개월여 남긴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으로서 대선을 원만하게 마무리 짓고 차기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비자금 수사를 강행할 경우 대선정국은 파국을 맞게 되고 결국은 ‘대선 실종사태’가 야기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국정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김영삼 대통령은 고심 끝에 10월 14일 김대중 비자금 수사는 대통령 선거 이후로 미룬다는 결단을 내렸다. 김대중 후보는 안도했고, 이회창 후보는 격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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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이회창 후보는 긴급기자회견을 하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당을 떠나라고 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홍콩사태가 일어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11월 4일 김종필 후보와 소위 ‘DJP 연합’을 발표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외화 부족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시점인 11월 7일 탈당하고 11월 8일 대선의 엄정중립을 선언했다. 11월 21일 이회창 후보는 당시 민주당 (조순 총재)와 합당하고 당명도 ‘한나라당’으로 바꾸고 총재가 되었다. 대선 정국의 혼란 속에 유동성부족이 현실이 되면서 나라경제는 하루하루가 위험한 외환위기라는 외줄타기를 시작했다. 

 

외환위기의 외줄타기를 시작한 대한민국  

 

  기아사태와 김대중 비자금 사건에 발목을 잡힌 경제는 중심은 잃고 표류했다. 기아사태 처리를 관망하던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정부가 기아사태를 신속하게 해결 짓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과 불신감을 나타냈다. 10월 23일 홍콩사태 직후 미국의 S&P(10.24)와 무디스(10.27)가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내리고 미국 투자기관 모건 스탠리가 투자자들에게 ‘아시아를 떠나라’라고 자문하면서(10.28) 외국 투자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금융회사들은 ‘다음은 코리아’라는 심리적 불안감으로 단기 대출금 만기연장을 중단하고 자금 회수에 나섰다.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불꽃은 한국으로 옮겨 붙어 ‘들불’로 번지기 시작했다. 

 

  10월 27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주재하는 확대경제장관회의가 열렸다. 강경식 부총리가 금융외환시장 동향과 기아사태 처리에 대해 보고했다. 28일에는 김인호 경제수석이, 29일에는 강 부총리가 대통령과 주례회동을 갖고 금융 외환시장안정대책에 대해 보고했다. 이후에도 김 수석은 대통령에게 금융외환사정에 대해 거의 매일 보고하다시피 했다고 했다. 그러나 김 수석은 “당시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긴 했어도 곧바로 IMF에 갈 정도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그때까지는 불과 10여일 뒤 그 ‘최악의 경우’가 현실로 다가올 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솔직하게 증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떻게 외환위기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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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09 17:10:00 최종수정 2019-01-11 14: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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