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국민만이 큰 정부로의 질주를 막을 수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원래 이 ‘전상서’ 시리즈는 내일의 정치 지도자가 바람직한 소명 의식을 갖추어 철저한 구조개혁으로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일궈내는 데에 도움이 되고자 마련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리즈가 때늦은 감이 있다. 이미 새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정권은 시장경제의 복원 내지 강화를 꾀하기 보다는 경제의 자율화와 글로벌화가 야기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경제사회적 병폐의 해소에 관심을 두고 복지를 앞세워 시장경제와 국민에게 부담을 안겨주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새 정권이 그런 정책적 선택을 한 것이 불가피한 점이 없지는 않다. 새 정권이 취약 계층이나 경쟁열위 기업 또는 근로자가 품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모든 것에 대한 불만’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죽인 채 한국경제의 오늘을 보며 우려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새 정권의 지도자가 순간이나마 시장경제가 오늘과 내일의 한국경제에 갖는 의미를 짚어볼 수 있고, 정치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잠룡’이 시장경제를 창달하겠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본 시리즈를 끌고 온 고이즈미 류의 ‘개혁의 리더십’의 관점에서 현 한국의 상황을 짚어 보고자 한다.
모든 이, 모든 기업을 섬기는 ‘개혁의 리더십’
고이즈미가 일본경제에 기여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해야 하고 지도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는 90년대 초 이후 경기부양과 포퓰리즘으로 지탱되어 오던 ‘큰 정부’에 찌들어 ‘잃어버린 10년’ 그 제로성장의 늪에 빠진 경제를, 구조개혁과 ‘작은 정부’로 자유롭고 경쟁적이며 활기찬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했을 뿐이다.
고이즈미의 ‘작지만 할 일을 하는 작은 정부’부터 새로운 게 아니었다. 그가 일본에서 개혁의 지도자로 나서기 전에, 이미 미국에는 레이건 대통령이, 영국에는 대처 총리가 있었다. 그들이라고 특별한 걸 한 것은 아니다. ‘큰 정부’ 신봉자들에 의해 ‘신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힌 그들 3인은, 좌우 이념에 경도 되지 않은 전문가들의 일치된 충언과 사회적 합의를, 선거를 통해 국민의 선택으로 확인하고, 이를 정책으로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그들은 공히 ‘개혁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여기서 ‘개혁’은 성장과 경쟁력 측면에서 경제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정책의 총화를 구축하는 것 즉 구조개혁(structural reform)을 의미하고, ‘리더십’은 ‘국민과의 소통으로 국민의 지지로 (정책) 실행력을 갖춘 권위와 그 권위를 뒷받침하는 체제’를 말한다.
<주1:구조개혁은, 진입장벽을 철폐하는 등 규제개혁으로 경쟁을 제고하여 산업에의 진입과 퇴출을 통해 경제 전체가 더 경쟁력이 있는 구조로 바뀌게 하는 것이고, 노동시장 유연화 등 노동개혁으로 고용시장에의 진입과 퇴출을 통해 노동의 공급과 수요가 잠재적으로 경쟁력 우위가 예상되는 부문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경제, 전 부문, 전 경제주체의 경쟁력 강화와 구조조정이 일상적으로 또 순조롭게 일어나게 하자는 것이다.>
그들 3인의 ‘구조개혁’은, 부문이나 계층 간에 차별을 두지 않고 경제 전체를 개별 부문과 개별 경제주체가 유기적으로 연계된 총합체로 인식한다. 따라서 왜곡된 통념에 따라 ‘적폐청산’ ‘민주화’ ‘정상화’ 등의 이름으로 (규제, 조세, 정부 개입과 간섭 등으로) 특정 부문이나 계층을 옥죄거나 부담을 주고, ‘국민 섬기기’ ‘동반성장’ 등의 이름으로 특정부문이나 계층을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정책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따라서 소득이나 경쟁력 측면에서 취약하여 정부의 보호와 지원에 의존해 온 부문, 산업, 경제주체, 계층 등이 경원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구조개혁인 것이다.
한국경제의 외로운 좌회전
한번 주변을 둘러보라. 가까이는 일본, 멀리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가 구조개혁에 부심하고 있다. 재정, 고용유연성, 규제개혁, 경쟁제고, 조세부담 경감… . 모든 선진국은 우회전하고 있다. 한국만 좌회전하고 있는 것 같다.
<주2 : 심지어, 정치지형에 미칠 파급효과를 걱정하면서도 중국이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좌파 정권이 들어선 그리스, 이태리 등도 충격을 최소화하는 구조개혁의 도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 한국은 구조개혁이라는 글로벌 추세를 외면하고 있다. 아니 그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거꾸로 가려고 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속에서 제도적으로만 도입되고 경제관행으로는 정착되지 않은 정리해고 허용 등 이름뿐인 노동시장 유연화마저 철폐의 기로에 서있고, 경제민주화의 이름 아래 중소기업만 영위할 수 업종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어렵사리 도입되기 시작한 성과급 제도는 되물림 당하고 있다. 지난 반세기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 노력으로 이제 겨우 구축되기 시작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하루아침에 ‘기업하기 힘든 나라’로 변질되고 있다. 법인세는 올라가고, 근로시간은 줄어들고 임금은 올라가며 규제가 늘거나 강화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정부행동주의(government activism)가 자리 잡고 있다. 이대로 가면, 규제와 간섭과 개입의 ‘큰 정부’가 들어서는 것은 불문가지다.
게다가 작금은 ‘격차해소’나 ‘정의를 위한 적폐청산’의 팡파레 속에 감히 어느 누구도 정부가 하는 일을 가로막거나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 두 가지만 앞세우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정부 개입, 규제, 증세 등등 모든 ‘큰 정부로의 질주’는 그 두 명분으로 행해지고 있다.
박 정권, 그 자멸의 뿌리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그 첫 단추는 박 정권의 실패로부터 꿰어지기 시작했다.
박 정권의 실패는 피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그 무엇보다 국민과 공유하는 정권의 소명(召命)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박 씨가 대통령이 되려고 했는지, 왜 새누리당이 여당이어야 하는지, 그래서 박 정권이 나라를 왜 또 어떻게 바꾸려는지, 대통령 본인도, 새누리당도, 국민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정권 초입부터 그 정권을 무위(無爲)와 자멸로 이끈 근원이었다.
그렇다고 그 정권이 할 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국정농단’에만 몰두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노동, 공공, 금융, 교육 등 ‘4대 구조개혁’, 규제 철폐를 통한 서비스 산업 활성화 등 개혁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개혁 추진 의지가 강하지도 않았고, 당정이 주요 정책과제에 대해 일치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개혁을 추진할 의지도,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리더십과 그것을 뒷받침할 체제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주요 정책 추진이 좌절될 때마다 (리더십에 관한 최소한의 권위 확보를 위해서는 ‘리더십’ 발휘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듯) 교과서 국정화 등 새로운 국가 아젠다를 내세워 그렇지않아도 부족한 정치적 자산을 낭비하고, 그것마저 좌절을 겪으면서 리더십의 권위는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갔다.
소명의식의 부재가 박 정권에 치명타를 안겨준 것은 2016년 봄 총선이었다. 그 즈음에는 왜 새누리당이 계속 여당이어야 하는지, 대통령도 새누리당도 관심조차 없었으니 더더구나 국민은 알 도리가 없었다. 국민의 눈에 비친 새누리당은, (여당이 무슨 짓을 해도 국민이 ‘변함없이 여당을 국회 과반수를 차지하는 제1의 정당으로 지지해 줄 것’이라고 믿고) 하나의 정당으로서 지향할 바 이념과 정책이 아니라 친박-비박 여부를 놓고 공천 싸움을 벌이는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당은 ‘무엇을 위해 우리당을 지지해야 하는지’를 내걸고, 일치단결하여 여당과 ‘명운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총선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여당은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총선 패배가 박 정권 몰락의 시작으로서 가을부터의 탄핵정국의 밑거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주3 : 만일 당시에 새누리당이 (친박-비박이 아니라) 하나의 정당으로서 일관성 있는, 시장경제에 기반한 정책이나 정강에 대한 지지 여부를 후보공천의 핵심 기준으로 삼았다면, 설사 총선에서 패배하였다 하더라도 하나의 정당으로서 후회 없는 ‘총선’을 치렀다고 자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신(新) 정권의 100大 국정과제와 증세
‘국정농단’ 사태가 촛불시위, 탄핵 그리고 정권 교체에 이르는 바는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토록 비상(非常)한 과정을 통해 급작스레 정권이 교체되었는지라, 새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와 정책이 충분한 논의를 거쳐,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고, 선거(와 그 공약 논의)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선택되고 위임을 받을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집권한 세력이 말하는 모든 것이 ‘선거를 통해 압도적으로 지지를 표명한 민의’로 치부될 수 있게 되었다. 여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된 상황이 급진적 정책이나 제도변혁이 언제든 저질러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체제를 경직시키거나 재정을 악화시키는 등 ‘큰 정부-작은 민간과 위축된 시장’으로 귀결될 것으로 우려되는 경제정책이 마련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작금의 사태 진전이 바로 그런 우려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올 5월에 들어선 새 정권의 국정기획위는, 지난 7월 19일 향후 5년 새 정권이 추진할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그 정책 팩키지는 손가락으로 ‘증세 없는 복지’를 가르키고 있었다. 보수 성향의 언론은 ‘정부의 복지 지출이 과다하다’ ‘재원 마련책이 너무 낙관적이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진보 성향의 언론은 ‘그것으로는 모자란다’, ‘박근혜 정부와 뭐가 다르냐’며 볼멘 소리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대형복지 사업 외에는 대부분의 100대 국정과제가 (향후 한국의 시장경제 체제 유지 여부와 관련해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외면당했다. 특히 ‘큰 정부’를 야기하게 될 ‘소득주도 성장’과 관련한 다양하고 심대한 정책과제들이 언론의 무관심에 파묻혀 버렸다.
다음날, 재원 부족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번에는 경제장관회의와 여당과 청와대의 손가락이 ‘부자증세로 마련할 복지재원’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 손가락의 지시에 여론은 충실히 따라갔다. 이제 언론은 ‘복지’와 그 재원마련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고 모든 관심을 ‘증세’, 그것도 ‘부자 증세’에 쏟아 부었다.
여당과 청와대가 입을 벌릴 때마다 언론이 벌이는 우왕좌왕이야 말로, 바로 ‘큰 정부’ 구축을 꿈꾸는 집단이 바라는 바일 지 모른다. 왜냐하면, 불과 이틀 사이에 세론의 관심이 ‘증세 없는 복지’에서 ‘중산층-서민-중소기업은 걱정할 필요 없는 부자증세’로 옮겨 가는 사이에, 첫째, 복지 외의 모든 여타 국정과제는 ‘추가적 논의나 여론수렴 없이’ 추진하는 것으로 되었고, 둘째, 복지를 포함하여 100대 국정과제 추진에 동원되는 정부지출의 규모나 제도 변화가 ‘정책 변수’가 아니라 ‘주어진 상수(常數 parameter)’로 격상되었으며, 셋째, 증세는 되돌릴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고, 넷째,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대한 증세의 강도만 결정하면 되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들 정책 전환이 당장에 경제와 사회통합에 끼칠 직접적 부담 그 자체보다, 금번 복지-증세가 아무런 공개적 논의나 여론 수렴도 없이 청와대와 여당이 주도하여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앞으로 두고두고 경제사회 시스템에 야기할 해악이 더 심대하다.
<주4 : 복지-증세 논의를 ‘주도’ ‘관리’하는 중심 기제가, 계층을 부자와 서민 등 계층을 소득으로 나누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기업을 규모로 나누는 것인 듯 하다. 혹시, 양대 계층과 기업군 간의 대립과 마찰을 조장하고 이에 따른 국가과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혼란을 집권 세력의 ‘숙원’ 어젠더 추진에 악용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힘들다.>
향후에, 복지나 증세 등 경제의 명운이 걸린 주요 국가과제가 경제논리를 뒷전으로 하고 정치논리에 의해 결정되고 추진되는 것이 관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정책의 정치화가 한번 국가 의사결정체제를 왜곡시키면 나라경제가 나락에 떨어지기 전에 그것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정치사회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많은 나라의 경험이다.
‘소득주도의 성장’의 리스크
신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 ‘증세’보다 100대 국정과제 중 경제과제가 지향하는 바 ‘소득주도의 성장’에 대한 우려가 더 깊고 크다. 간단히 말해, ‘소득주도 성장’은 첫째,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임금 수준을 올리고, 둘째, 공공 일자리 창출로 민간의 일자리창출을 유도하는 등으로 근로자의 소득을 늘려, 가계소비를 늘리고 이에 이끌려 기업의 투자도 늘어나게 해 성장률을 높이자는 것이다. 달리 얘기하면, 성장을 위해, 정부가 시장 특히 고용시장에, 한편으로는 (임금)가격 결정자(price maker)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요자(고용주)로서 직접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초유의 정부 개입이자 경제체제 경직화이다.
‘소득 주도의 성장’은 미국처럼 국내시장이 커서 내수 그 중에서도 소비가 성장을 주도하는 나라에서 왕왕 시도되고 주장되기는 하나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기업의 경영악화와 재정지출 확대로 인한 정부 재정적자의 심화로)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난, ‘파탄의 성장 모델’(‘bankrupt, unsustainable growth model)이다.
인위적인 임금인상과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은 단기적으로는 통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근본적이거나 지속가능한 해결책이 아니고, (공공부문을 확대시키고 그 비효율을 심화시킴으로써, 정부 재정 악화를 고착화 시키고 민간부문의 경쟁력을 약화 시키는 등)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 주류 경제학의 설명이자 역사적 교훈이다.
결국 ‘소득 주도의 성장’은, 단기적으로는 임금-일자리-성장 간의 선순환(최저임금인상 + 공공 일자리 확충->근로소득 증가->가계소비 증가->성장)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언젠가는 아니 조만간 임금의 인위적 상승-경영압박-투자위축-일자리 감소-성장 저하라는 악순환을 야기할 소지가 크다.
큰 정부의 말로(末路)는 중세(重稅)와 저성장
씀씀이가 큰 정부는 늘 증세(增稅)라는 쉼터를 찾기 마련이지만, 그 큰 정부의 종착역은 언제나 국가부채 누증과 그 위기이다.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언젠가는 실행할 수밖에 없는 재정건전화는 성장 저하와 고실업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90년대 초 버블 붕괴 후 지금까지의 일본의 경험이다. 구조적 불황 속에서의 경기부양은, 가뜩이나 위축된 민간경제를 더욱 정부(지출)에 의존하도록 한다. 지지기반이 취약한 정부로서는 (효험이 있을 때까지) 경기부양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밖 없다. 일본의 경우 그 결과가 세계최고 수준의 국가부채이다. ‘큰 정부’의 큰 (복지) 씀씀이는 복지 천국 유럽 특히 경직적 경제체제에 찌든 그리스 등 지중해 유럽의 고질병의 근원이기도 하다.
새 정권이 바로 그 큰 정부의 길로 들어서려고 하고 있다. 지금 신 정부는 단기적으로 경기부양을 위해 추경을 동원하고, 장기적으로 복지 지출 확대를 꾀하는 등,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누증을 고착화 시키고 정부에 대한 민간의 의존성을 심화시키고자 한다.
큰 정부로의 질주(疾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국민의 자각뿐
보수 정당의 지지기반이 분쇄된 상황에서, 신 정권에 의한 반(反) 시장개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야당의 반대도, 촛불 시위도 아니다. ‘경제상황의 악화의 뿌리가 반 (시장)개혁정책에 있다’는 국민의 자각만이 큰 정부로의 질주를 제어할 수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새 정권이 이토록 서두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포퓰리스트 정책으로 국내 경기를 반짝 띄우고 그 정책의 해악으로 국내 경제여건이 악화하기 전에, 또는 세계경제의 악화를 국내 불황 도래의 핑계로 더 이상 원용할 수 없게 되기 전에, 한국 경제사회 곳곳에 ‘큰 정부의 대못’을 박아놓겠다는 저의를 품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게 신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를 대하면서 가지게 되는 가장 큰 걱정이자 두려움이다.
구조개혁은, 진입장벽을 철폐하는 등 규제개혁으로 경쟁을 제고하여 산업에의 진입과 퇴출을 통해 경제 전체가 더 경쟁력이 있는 구조로 바뀌게 하는 것이고, 노동시장 유연화 등 노동개혁으로 고용시장에의 진입과 퇴출을 통해 노동의 공급과 수요가 잠재적으로 경쟁력 우위가 예상되는 부문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경제, 전 부문, 전 경제주체의 경쟁력 강화와 구조조정이 일상적으로 또 순조롭게 일어나게 하자는 것이다.
심지어, (정치지형에 미칠 파급효과를 걱정하면서도) 중국이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좌파 정권이 들어선 그리스, 이태리 등도 충격을 최소화하는 구조개혁의 도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만일 당시에 새누리당이 (친박-비박이 아니라) 하나의 정당으로서 일관성 있는, 시장경제에 기반한 정책이나 정강에 대한 지지 여부를 후보공천의 핵심 기준으로 삼았다면, 설사 총선에서 패배하였다 하더라도 하나의 정당으로서 후회 없는 ‘총선’을 치렀다고 자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복지-증세 논의를 ‘주도’ ‘관리’하는 중심 기제가, 계층을 부자와 서민 등 계층을 소득으로 나누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기업을 규모로 나누는 것인 듯하다. 혹시, 양대 계층과 기업군 간의 대립과 마찰을 조장하고 이에 따른 국가과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혼란을 집권 세력의 ‘숙원’ 아젠다 추진에 악용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힘들다.
<ifs POST>
<순서> 왜 지금 개혁의 리더십인가? 제 1부 제대로 된 잠룡라면 제 2부 대권을 잡고 나면 개혁의 무대는 이렇게 꾸며라 제 3부 모두를 개혁에 동참시켜라 제 4부 논란이 많은 개혁과제를 택하라 <시리즈를 끝내며> |
※ 그동안 큰 관심으로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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