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27> 외환위기와 냉혹한 국제금융 자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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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7월02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05월13일 13시55분

작성자

  • 김광두
  • 국가미래연구원 원장, GFIN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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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동 협의 내용을 협의된 대로 이행하곗습니다.” 

1997년 12월 IMF의 캉드쉬 총재가 한국의 대통령 후보들에게 서명을 요구한 내용이다. 왜 대통령 후보들에게까지 이런 서명을 요구했을까?.

한국 정부는 1997년 12월 3일, “대기성 차관 협상을 위한 양해각서”에 동의했다. 이 내용은 한국의 경제정책 주권이 한시적으로 IMF에 넘어갔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한국으로선 치욕스러운 날이었다.

1997년 초부터 한국의 외환 보유액에 대한 외신기자들의 전화 문의가 많았다. 필자가 한은의 담당 부서를 통해 보고받기로는 200억 달러 수준의 가용 외환 보유 잔고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점에서는 그 정도면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1997년 10월 나는 대우 그룹 김우중 회장과 대우의 해외투자 현장을 방문했다. 김 회장도 한국경제의 어려운 상황을 인지하고 있음을 대화 중 느꼈다. 그러나 그도 상황이 국가부도의 위기에 빠질 것으로는 보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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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97년. 셰익스피어 생가에서. 김우중 회장과 여행 중.>

1997년 10월 27일 열린 대통령 주재 확대 경제 장관 회의도 한국경제는 기초조건(Fundamental)이 건실하기 때문에 동남아 국가와 같은 외환 및 금융시장의 위기 상황으로 전개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되돌아 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정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11월 중 외환시장은 패닉(Panic) 상태로 돌입하였다. 해외 자본의 자금회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신규 외화 차입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고, 차입금의 만기 연장 비율도 현저히 낮아졌다. 외환시장에선 달러화 매수세는 강했고 매도세는 아주 약했다.  은행, 종금사 등 해외 차입이 많았던 금융사들이 모두 한은의 외환 보유액에 매달렸다.

한은 외환 보유액은 1997년 11월 말, 72.6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제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해 12월 3일 한국 정부가 IMF에 백기 투항한 배경이다.

이런 외환시장 상황의 가속적 악화 원인에 대해서는 경제 분석에 바탕을 둔 여러 견해들이 있다. 나는 정부의 무능보다도 대통령 선거를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했다. 대선 후보들이 경제 논리를 무시한 정치 논리로 부실기업 문제를 다루었다. 시장 원리로 움직이는 국제금융 자본들의 눈에 이런 상황은 비정상이었다. 나는 이런 정치 행태가 IMF가 대선 후보들에게 “이행 각서” 서명을 요구한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해했다.

경기 규칙이 경시(輕視)되고 도덕적 해이가 경제 사회 질서를 흔드는 정치 상황이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은행 영생(銀行永生)이라는 반시장(反市場) 의식이 기업계와 금융계를 뒤덮고 있었다. 구조조정이 절실했지만 대선 정국이라는 상황이 그 추진을 불가능하게 했다.

국제금융계는 이점을 주시(注視)했다. 경쟁력이 약화되고 채산성이 떨어져 적자가 쌓인 기업을 “국민기업” 운운하며 국가가 살리겠다고 외치는 후보들을 보고 한국 정부의 대응 정책과 부채상환 능력에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다.

자본의 논리는 냉혹하다. 채권 원리금 회수 가능성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기면 즉각 회수 조치를 한다. 정치적 고려나 인간적 배려는 안중에 없다. “기초조건 건전”, “국민기업” 운운할 때 이들은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있었다.

나는 1997년 4월 1일 방송 3사의 “경제를 살립시다”라는 공동 프로그램에서 MBC의 앵커로 출연해서 경제 상황을 생방송으로 시청자들과 공유했다. 6월 하순에는 국제경제학회 여름 세미나에서 “대외 지향형 경제의 정책과제”를 발표하고, 가을에는 서강대의 경상논총에 “외채 현황과 대응 방향”이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였다. 금융 통화 운영위원이었지만 어떤 다른 의미 있는 일도 하지 못했다.

국제신용평가사들도 뒷북만 쳤다.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것이 1997년 11월 22일이었다. 그런데 3대 국제신용평가사들은 97년 11월 25일까지 한국을 “A” 등급으로 평가했다. 97년 1월부터 외자들의 탈출이 진행되고 있었고, 한은의 외환보유액이 지속적인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었는데도, 이들은 신용등급을 내리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백기를 든 12월 3일이 지난 12월 11일에야 이들은 신용등급을 대폭 내렸다. 이들은 2008년 미국의 금융 위기 때도 사전적 신용등급 조정을 하지 못해 경고등(警告燈)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금융시장 종사자들이나 정부 당국자들은 국제금융시장의 금융 기법과 관행에 대해서 익숙하지 못했다. 한국의 자본자유화 역사가 짧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외국계 펀드의 한국·홍콩 지사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이 전문적 조언을 주었다. 나도 이들 중 몇을 만나 해외 펀드들의 생리와 금융 기법을 배웠다.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의 갈등도 사전적 대응을 어렵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환율 정책이었다. 당시 재정경제원은 환율을 방어하려는 정책을, 한은은 환율 절하로 시장의 움직임을 수용하려는 정책을 제시했다. 외환시장을 관리하는 두 조직이 서로 정반대의 환율 정책 방향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런 혼선을 조정할 조직도 개인도 없었다.

이런 혼선을 나는 정치 계절의 부산물로 보았다. 두 조직의 구성원들은 한국은행법 개정을 둘러싼 정치 게임을 하기 위해 여의도로 몰렸고,금융 외환시장 안정은 뒷전으로 밀렸다. 금통위는 이 와중에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참 부끄러운 현실이었다.

IMF의 구제금융 제공조건은, 한편으로는 한국이 스스로 못한 경기 규칙 확립과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가능하게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성은 높았으나 재무관리가 부실했던 한국의 기업과 은행들을 외국계 펀드들에게 “Fire Sale” 하도록 상황을 조성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대선이라는 정치 쓰나미에 한국경제의 방파제가 무너진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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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97년. 기아자동차, 김선홍 회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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