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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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17> 다이아몬드의 추억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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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4월23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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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가 보자기에서 쏟아졌다.

다이아몬드를 가공하는 브뤼셀의 한 보석공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공장을 방문한 한국의 “세계보석산업 연구팀” 앞에 놓인 테이블에 이 공장의 주인인 유대인 보석상이 다이아몬드를 무더기로 쌓아 놓은 것이다. 수북이 쌓인 다이아몬드를 보니 보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다가 분실하면 어찌 하려고?”

“천장과 벽면을 살펴보세요.”

당시에 우리는 CCTV에 익숙하지 않았다. 천장(天障)과 벽면에 카메라 렌즈들이 다수 꽂혀있었다.

 

1978년 여름(정확한 일자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제대를 하고 국제경제연구원에 복귀했다. 정재석 원장이 보자고 했다.

 

“수고했다. 체력 단련 잘했지?”

“네!”

“김 박사, 보석에 관심 있나?”

“별로~~~ 돈도 없구요.”

 

1972년 4월, 결혼 준비를 하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장인어른께서 롤렉스 시계 금딱지를 준비했다고 들었다.

대학 시절부터 나는 그런 비싼 결혼 예물은 허례허식일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럼, 어떻게 하지?”

“어른들 입장을 고려해서 모조품으로 하면 어때?”

“좋아요”

당시에 모조 다이아몬드 1캐럿 반지는 만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진품과 다름없었다. 나와 김인숙은 이것으로 예식을 폼나게 마쳤다.

 

1975년 정부는 보석산업을 수출 특화산업으로 육성하기로 했다. 그 방법으로 귀금속 보석 단지를 조성했다. 정부는 국토의 균형발전을 고려해서 전북 익산에 2만여 평 규모의 보석산업 공단용 토지를 마련했다.

 

1978년 정부는 산업부, 재무부, 내무부 공무원들과 귀금속 업계 대표들로 구성된 세계보석산업 연구팀을 구성해서 한국산 보석의 수출 전략을 기획하기로 했다. 정원장이 그 팀에 나를 합류시킨 것이다.

 

나에게는 별로 흥미 없는 주제였다. 그러나 정 원장의 강권(强勸)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이 팀에겐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각국 보석산업의 동향, 구조, 발전 과정과 전략, 애로 사항 등을 파악하여 한국에 적합한 발전전략을 구상하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 첫 방문지가 벨지움의 브뤼셀이었다. 그 도시에서 다이아몬드 가공업이 번성하고 있었다. 함께 간 업계 인사에 의하면 당시 한국의 다이아몬드 반지는 대부분 이곳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나는 원석의 주산지가 아프리카의 남아연방이고, 이 다이아몬드 광산의 주인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한국의 다이아몬드 산업이 발전하려면 원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하는데 유대인 광산주들의 협조가 절실하다는 점도 깨달았다.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은 원석 생산, 가공, 유통의 모든 측면에서 유대인이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

 

“이게 시계인가? 보석인가?”

 

프랑스 파리의 한 고급 시계점에서 주인에게 물었다.

몸통을 다수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시계들이 유리 금고 속에 진열되어 있었다. 시계에 다이아몬드 장식을 하면 시계의 부가가치가 크게 상승한다는 주인의 설명이었다.

 

“이런 시계가 실용성이 있습니까?”

“주로 파티용으로 사용됩니다.”

 

 헐! 부자들의 생활이란 이런 거구나! 그 가격이 엄청나게 고가(高價)였는데, 그저 파티용으로 활용? 마리앙뜨와네뜨 프랑스 왕비가 떠올랐다. 고급화되어 더 비싼 제품일수록 더 많이 팔린다는, 수요의 법칙의 예외인, Prestige Goods의 사례를 현장에서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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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78년, 파리 몽마르트 언덕.>

 

보석 연구 여행에 괴로움과 낭만이 함께 했다. 당시엔 해외 출장 시에 2인 1실을 원칙으로 했다. 나의 룸 메이트는 업계에 계신 분이었는데 코골이가 심했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베개로 귀를 막아 천둥 번개 소리 같은 그분의 코골이 소음을 극복해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숙면(熟眠)을 못하는 괴로움이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하필 이분이 나의 룸 메이트란 말인가~~~

 

프랑크 푸르트 공항 경유(經由) 길에, 하이델버그 성을 구경하고,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황태자 역을 맡은 테너 마리오 란자가 생맥주잔을 높이 들고 “Drink! Drink!”를 외쳤던 생맥줏

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나도 테이블 위에 올라가 드링크 송을 부르고 싶었는데 참았다.

 

당시에 비유럽 지역에서는 인도와 태국의 보석산업이 선진 수준에 있었다. 인도 뉴델리에서 머문 호텔이 과거 인도 마하라자(왕)의 궁궐을 개축한 것이었다. 인도의 보석문화는 마하라자와 마하리니(왕비)의 보석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이 호텔 일반 객실의 크기가 유럽의 스위트(suite) 룸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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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78년. 태국의 한 보석 가공 작업 현장에서.>

 

지방에 있는 마하라자의 궁을 보면서 그들의 보석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벽면이 온통 보석으로 도배된 방도 있었다. 헤일수 없이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벽면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인도 입국 시,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 출국장을 나서자 어린애들이 손을 벌리던 모습과 겹쳐 씁쓸했다. 이런 마하라자의 보석 사랑이 인도의 보석산업 발전의 뿌리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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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78년, 인도 어느 지방에 위치한 마하라자의 궁성. 이 궁성안에 보석의 방이 있었다.>

 

당시 주인도 한국 대사는 후에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 북한의 아웅산 테러로 숨진 고 이범석 씨였다. 내 입맛과 거리가 먼 인도 음식만 먹다가 대사관저에서 대접받은 한국 고추장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원석의 품질과 컷팅(cutting) 기술에 달려있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 인도의 컷팅 기술이 유럽에 뒤지고 있어서 최고급 시장에서는 경쟁력이 약하다는 현지 업계의 견해를 들었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다이아몬드 반지는 원하면 구매 가격으로 현금을 환급 받을 수 있습니까?”

“대부분 어렵죠. 그러나 XX Certificate가 첨부된 상품은 구매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죠.”

 

나는 이 보증서의 발행기관이 미국이나 유럽의 어느 회사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 이름은 잊었다. 그 보증서가 첨부된 다이아몬드는 현금과 같고 희귀성이 높으면 가격도 상승한다는 것이었다.

 

“다이아몬드 반지 안 사길 잘했지?”

귀국해서 집에서 큰소리 한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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