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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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7> 농협 하나로 마트 창업에 참여하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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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2월26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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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서울농대 고 유달영(柳達永) 교수님의 수필집을 즐겨 읽었다. 그는 인간 상록수로 불리운 분이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와 함께 그의 수필집은 삶에 대한 나의 관점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람답게 사는 사람”에 대해서 다양한 측면에서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현대차를 떠나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기회를 보던 중, 서강대 은사이신 고 황일청 교수님( 경영학)께서 한번 들르라는 전갈(傳喝)을 주셨다.

 

“자네, 농촌운동에 관심 있지?”

“네”

“농협에서 농민들을 위한 유통업을 올해 초부터 시작해서 현재 창업이 진행 중인데, 그 일에 참여하면 어떤가?”

“생각해보겠습니다.”

 

나는 1970념  6월경 “농협 생활물자구매사업소”로 출근했다. 사무실은 1969년에 폐교된 옛 서울 청계초등학교( 현재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 역 부근) 건물에 있었다. 사업소장은 연대에서 통계학을 강의하셨던 고 정익주 교수께서 맡고 계셨다. 실무는 서울농대 출신인 고 권순종 씨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달영 교수님의 따님이 여기에서 일하고 있었다. 모두 상록수 정신으로 무장된 분들이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공산품들이 생산원가 대비 40% 이상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더 좋지 않았던 것은 품질 좋은 제품보다는 조잡(粗雜)한 모조 제품들이 주로 거래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수송 수단이 제한되고 농촌 지역의 거래 단위가 아주 적었기 때문이었다. 

 

농협의 “생활물자구매사업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창립되었다.

생산업체 들로부터 직접 대량 구매하여 사업소가 전국 농촌 지역별로 소량씩 나누어 배분하겠다는 것이다. 대량 구매로 매입 원가를 낮추어, 저렴한 가격으로 농민들에게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려는 것이 사업 목적이었다.

 

정익주 소장님과 면담을 했다.

 

“유학을 가려 한다고?”

“네.”

“그런데 왜 여기 왔지?”

“가기 전에 좋은 경험을 하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언제 떠날 계획이지?”

“죄송합니다. 3개월 정도….”

“뭐? ~~~ ,그럼 고무신을 맡아서 해!”

 

연대 대학원에서 윤기중 교수님을 모시고 통계학을 공부하고 강의하셨던 분이어서 유학 희망생의 입장을 이해해 주셨다. 감사했다.

 

당시 농촌에서는 흰·검정 고무신이 주요 생필품이었다. 농민들이 말 표·​기차표·​왕자표·​범표 고무신 등을 주로 애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제품들은 주로 부산에서 생산되었다. 서울의 우리 하숙집 식구들도 집에서는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분들이 꽤 있었다.

 

나는 고무신 생산업체 담당자들과 접촉하여 필요 수량을 구입하고, 그 것을 농촌 지역에 배분하는 일을 했다. 말로는 매우 단순하고 쉬운데 실제 해보면 어려웠다. 생산업자들과 수량·​단가를 협상해야 했는데, 상대방의 연세가 한창 윗분들이라 “아저씨”라 부르며 대화해야 했다. 나로서는  열심히 했는데 결과는 “꽝”인 경우들이 많아, 권순종 씨의 도움을 자주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도 연쇄점 창립 초기인데다, 매일 연쇄점들이 추가해서 개설되고 있었기 때문에 발주량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생산업체들로 부터의 구입 가격은 함께 일하시는 분들과 상의하고, 남대문 시장 고무신 가게에 가서 탐문도 하고 해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구매한 고무신들은 전국에 있는 “농협 연쇄점”으로 배달되었다.

1970년 1월 30일 문을 연 장호원 연쇄점을 선두로 전국에 연쇄점들이 설립되고 있는 과정에 있었다. 1970년 말까지 250개소의 농촌 지역에 연쇄점을 건립하려는 계획이었다.

 

나와 동료들은 가끔 연쇄점들을 순방했다. 애로 사항을 듣기 위해서 였다. 주로 두 가지 어려움 들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기존 가게들이 “선택적 덤핑”을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연쇄점에 공급되는 생필품들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했다. 예컨대 고무신을 갖다 놓으면 기존 가게에서 고무신만 싸게 판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품질 문제였다. 불량품이 가끔 배송되어 온다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연쇄점에 공급되는 생필품들의 종류를 크게 늘리면서 점차 풀렸다. 기존 가게의 덤핑 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구매사업소의 품질 검사 능력과 공급업체의 품질관리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공급업체와의 소통 강화와 자체 검사 노력의 강화로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계속해서 문제로 남았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

“아닙니다. 읍내에 있는 여관에서 자겠습니다.”

“이 사람아, 우리 집이 불편하겠지만 그냥 가면 우리가 섭섭해서 안 되지!”

“여보, 닭 한 마리 잡아 삶읍시다.”

 

연쇄점들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 농촌 어르신들의 따뜻한 격려를 받으면서 감동을 느끼곤 했다. 허름한 집의 좁은 방이었지만 사람의 훈훈한 인정이 방안에 가득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이런 것 아닐까?

 

농협의 연쇄점 사업은 농민들이 시중 가격 대비 15% 정도 저렴하게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게 하는 성과를 내서, 농가의 가계비 절감과 해당 지역의 소매가격을 낮추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연쇄점들은 1983년부터는 혼수용품을 취급하기 시작했고, 1986년부터는 농수축산물의 도시지역 판매를 시작해서 농어촌의 생산자와 도시의 소비자들을 직접 연결하는 기능을 추가했다.

 

이런 발전과정을 거쳐 1997년, “농협 연쇄점”은 “농협 하나로마트”로 명칭을 바꾸었다.

 

9월 초에 나는 정 소장님과 권순종 선배, 유달영 교수님의 따님이신 Miss. 유 누나( 성함이 생각나지 않아 송구하다) 등 동료들께 작별 인사를 했다.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매우 서투른 청년을 지도해주신 분들이었다. 이분들의 순수한 열정과 상록수 정신은 지금도 내 삶의 정신적 고향이다.

 

나는 이 시기에 경제학자의 삶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더 본질적인 성찰과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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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70년대의 농협 연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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