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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록펠러 <1> 석유왕국 세운 존 D. 록펠러의 둘째 손자(孫子)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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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10월19일 16시00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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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정치인 가운데 공화당의 ‘넬슨 록펠러(Nelson Aldrich Rockefeller​)’는 유명한 석유재벌 록펠러가(家)의 일원이면서도 별난 삶을 살아왔다. 어렸을 적에는 ‘록키(rocky)’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재벌가의 모범생은 되지 못했고, 공화당에 몸담은 정치인으로서도 그의 생각은 공화당의 보수가 아닌 ‘진보적’ 색채가 강한 정책을 구사해왔다. 1959년부터 15년간 4선의 뉴욕시장으로 재임하면서 본인의 꿈이었던 대통령직에 3번이나 도전했으나 본선에는 나가보지 못하고 공화당 후보 지명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의 별난 생애를 간략하게나마 5번에 걸쳐 연재재하면서 그 의미를 짚어보는 것도 대선(大選)정국에 접어든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겨 줄 것으로 생각한다. 

 

1959년부터 1973년까지 뉴욕 주지사를 15년 동안 지내고 닉슨이 사임한 후 대통령이 된 제랄드 포드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으로 지명되어 2년간 부통령을 지낸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 1908~1979)는 스탠다드 석유를 설립해서 막대한 부(富)를 축적한 석유재벌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의 손자이다. 넬슨 록펠러는 1960년, 1964년, 1968년 세 차례에 걸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섰으나 결국 후보가 되지 못했다. 

 

스탠다드 석유왕국을 세운 존 D. 록펠러의 외아들인 존 D. 록펠러 2세(John D. Rockefeller Jr. 1874~1960)는 상원의원을 오래 지낸 넬슨 올드리치(Nelson W. Aldrich 1841~1915)의 딸 애비게일(Abigail Aldrich Rockefeller 1874 ~1948)과 결혼해서 딸 하나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넬슨 록펠러이다. 따라서 넬슨 록펠러의 조부(祖父)는 미국 제1의 부자 존 D. 록펠러이고, 외조부는 자본주의와 대기업을 열렬히 보호했던 로드아일랜드 출신의 막강한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다. 

 

넬슨 록펠러의 아버지 록펠러 2세는 부친 회사를 경영했으나 탄광 파업 진압과정에서 인명 살상이 많이 나온 사건 등으로 록펠러 재벌 왕국을 향한 세상의 비난에 대해 충격을 받고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맨해튼에 록펠러 센터를 건립했고, 여러 대학에도 기부를 많이 했으며, 뉴욕시의 넓은 토지를 유엔본부 건물을 세우도록 기증했고, 국립공원에도 많은 기부를 했다. 록펠러 2세는 그의 아들들에게 겸허한 생활을 하도록 훈육을 했으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 같은 아버지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록펠러 2세의 큰 아들 존 D. 록펠러 3세(John D. Rockefeller III 1906~1978)는 프린스턴을 나온 후 부친의 뜻을 이어서 오로지 사회사업과 문화예술 사업에 주력했다. 

 

록펠러 2세의 둘째 아들인 넬슨 록펠러는 공부를 잘못해서 프린스턴을 들어가지 못하고 다트머스 대학을 다녔는데, 이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록펠러 2세는 진보 교육(progressive education)을 주창한 교육학자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를 좋아 해서 그가 추진한 실험학교에 지원을 했다. 존 듀이는 록펠러 2세가 준 자금으로 컬럼비아 대학 교육대학(Teachers' College)에 진보 교육을 도입했고, 그 일환으로 1917년에 링컨 학교(Lincoln School)을 세웠다. 존 듀이의 교육개혁에 매료된 록펠러 2세는 넬슨 등 네 아들을 링컨 학교에 보냈다. 

 

존 듀이는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읽기와 산수(算數)를 악(evil)으로 보았다. 듀이는 단어를 발음으로 읽지 말고 형상으로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고, 이런 교육철학을 컬럼비아에서 배운 학생들이 교사와 교장이 되어 미국 교육을 망쳐버렸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존 듀이의 엉터리 교육 이론으로 가장 심한 타격을 입은 집안이 록펠러 가족이었다. 

 

존 듀이가 세운 링컨 학교에 다닌 넬슨 록펠러 등 4형제는 모두 난독증(難讀症 dyslexia)을 겪게 됐다. 넬슨의 형인 록펠러 3세는 일반 사립학교를 다녀서 프린스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링컨 학교에 다녀서 읽기와 쓰기를 못했던 넬슨 록펠러는 다트머스 대학에 간신히 입학했고, 모친이 가정교사를 붙여서 공부를 시킨 덕분에 대학을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넬슨 록펠러는 성년이 된 후에도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단어 철자도 바르게 쓰지 못했으며, 문장을 소리 내서 읽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넬슨 록펠러의 동생 3명도 모두 난독증을 겪어서 단어를 음운(音韻)으로 가르치지 않고 형상으로 가르치는 존 듀이의 진보 교육이 난독증을 야기한다는 증거가 됐다. 

 

넬슨 록펠러는 그러한 자신의 단점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설명하도록 해서 극복했다. 즉, 책을 읽어서 혼자 깨달아야 할 지식을 비서와 참모, 그리고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서 해결했는데, 이는 돈이 많았던 넬슨 록펠러이니까 가능했다. 넬슨 록펠러는 록펠러 센터의 유능한 젊은이들을 자신의 보좌진으로 활용했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하버드의 국제정치학 교수 헨리 키신저였다. 

 

이처럼 넬슨 록펠러는 돈이 많았기에 많은 전문가들을 조언자로 둘 수 있었다. 난독증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형상과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보통사람보다 낫다고 하는데, 그가 미술품에 대한 안목을 갖게 된 것이 난독증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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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록펠러 5형제. 오른 쪽 두번째가 넬슨 록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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