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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이야기 <43>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National Palace Museum of the Republic of China)...박물관도 분단이 되는구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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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8월15일 09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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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협
  •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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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타이베이(臺北)에 있는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은 중국 황실(皇室)이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에 보관하던 국보급 문화재 60여 만점을, 1948년 중국 국민당이 국공 내전(國共内戰)에서 밀려 타이완으로 이동할 때에 전란의 파괴를 피하려고, 대륙에서 가져와 그것을 바탕으로 설립하였기에 중국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중화(中華) 문화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20214월 현재 소장유물은 총 698,854점으로 1965년 새 건물을 지어 세계적인 박물관의 모습을 갖춘 이래 꾸준히 소장품을 늘려오고 있다. 소장품 중에서 26천여 점에 달하는 도자기와 13천 점을 상회하는 옥()공예품은 수많은 명품을 포함하고 있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청동기, 회화, 서예, 칠기, 가구 등 일반전시를 위한 소장품 외에도 40만 점에 육박하는 문서와 문헌, 그리고 216,507권의 희귀도서는 학자와 연구자들이 대만의 고궁박물원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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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든 사람이 모나리자를 보고자 하는 것처럼,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물은 취옥백채’(翠玉白菜)라는 옥() 공예품으로, 배추에 여치와 메뚜기가 앉아있는 모습을 실물처럼 표현한 작품이다. 2013년 내가 고궁박물관을 방문했을 때에도 언제나 관람객들이 몰리는 바람에 긴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전시물을 볼 수 있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초록색과 백회색이 부분적으로 나뉘어 섞여 있어 어찌 보면 2등급 이하의 저급 옥석이었을 재료의 특성을 오히려 십분 활용하여 배춧잎의 초록색과 백회색의 줄기 부분을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형태로 재현해낸 장인의 능력에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취옥백채(翠玉白菜)<동릉(东陵) 도굴사건> 때 서태후(西太后)의 관곽(棺槨)에서 나온 보물이라는 점이다. 동릉(东陵) 도굴사건이란 1928, 군벌 쑨뎬잉(孫殿英 손전영)이 군자금 마련을 핑계로 청나라 황릉을 도굴하고 시신을 훼손한 끔찍한 사건이다. 쑨뎬잉은 서태후를 비롯하여 청황실(清皇室)의 무덤을 도굴하는 동릉 도굴사건을 일으켜 '동릉대도(东陵大盗)' 또는 도굴장군(盜掘將軍)’이라는 악명을 얻은 인물이다. 여하튼 지상 최고의 옥공예품으로 꼽히는 취옥백채(翠玉白菜)가 살아서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린 서태후마저 사후까지 품고자 했던 부장품이었고, 이것이 혁명과 전쟁 과정에서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 타이베이박물관의 전시장까지 흘러들어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여러 갈래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인간이 보유한 창의성, 심미안, 기술과 집념, 그리고 탐욕과 전쟁, 이 모든 것이 20크기의 작은 공예품에 녹아 들어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그래서, 박물관에서 특별한 스토리(story)를 간직한 유물을 만나 역사의 의미를 색다르게 음미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보는 즐거움을 취옥백채(翠玉白菜)를 통해 다시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이 세계적인 지명도가 있는 박물관인 만큼 매우 특별한 전시회가 수시로 열리곤 한다. 과거에 국립고궁박물원에서 가졌던 특별 전시 중 우리가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전시로 나는 20116월에 열린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전시회를 들고 싶다.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이 소장한 중국의 10대 명화에 속하는 국보급 회화인데 인간에 비유하면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문화재이다. 이 그림은 원나라의 화가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의 작품인데, 황공망은 중국뿐만이 아니라 조선에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대가이다. 조선 시대의 회화를 보면 심사정(沈師正)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의 정수영(鄭遂榮)과 장승업(張承業)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많은 화가들이 황공망을 모방하는 작품을 남긴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황공망의 호인 대치(大痴)를 염두에 두고 호남의 제자 허련(許鍊, 1808-1893)에게 조선의 작은 대치라는 뜻으로 소치(小痴)’라는 호를 줄 정도였다.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황공망이 그의 나이 72살 때 4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수묵산수화로, 중국 회화사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꼽는데 이론이 없다. 그런데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소장하던 명나라 말 유명 수집가 오홍유(吳洪裕)가 그림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어서도 부춘산거도와 함께하고 싶다고 유언해 1650년 그가 사망하자 가족들이 소원을 들어주려고 그림을 불 속에 넣었다. 그림이 타기 시작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조카 오정안(吳靜安)이 황급히 건져내 불을 껐으나 그림은 이미 두 폭으로 갈라져 있었다. 두 개의 그림으로 나뉜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그 후 각각 '무용사권(無用師卷)'잉산도권(剩山圖卷)'으로 불리며 전자는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그리고 후자는 대륙의 절강성박물관에 분리되어 보관되어왔다.

 

201161, 대만의 국립 고궁박물원에서 열린 특별전은 중국과 대만이 1949년 분단 후 따로따로 소장해온 중국 10대 명화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다시 합쳐진 그림으로 보여주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이러한 특별전이 가능했던 것은 20103월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전인대(全人代) 기자회견에서 "두 폭이 언젠가 한 폭으로 합쳐지기를 바란다"라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총리가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라는 문화적 매개를 이용하여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그 당시 전시회를 위해 대만에 온 중국 문화부 문화교류 담당 고위 간부 역시 "이번 전시회가 대륙에서도 열리기를 바란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륙에서의 전시는 실현되지 못했다. 분단의 아픔이 그림의 분단으로 여전히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궁박물원>의 분단에도 변함이 없다.

 

고궁박물원이라 할 때의 고궁(故宮)은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을 가리키는 통칭이기도 하다. 그래서 청나라를 멸망시킨 신해혁명 이후 1925년 자금성을 일반 국민에게 개방하면서 그 명칭을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 정한 바 있다. 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원>은 원래 베이징의 고궁박물원에 있던 소장품을 가져와 박물관을 만들었기에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명칭을 정했을 것이다. 그 결과 중국과 대만에 두 개의 <고궁박물원>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 두 개의 고궁박물원 사이에는 미묘한 경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예를 들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을 지칭할 때 국립’(國立)이라는 칭호를 빼고 굳이 <타이베이 고궁박물원>(台北故宫博物院)이라 부르는 것이 하나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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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고궁박물원>에 따르면 20215월 현재 고궁박물원에는 1,863,404점의 소장품이 있다고 한다. 이는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자금성의 소장품 일부만을 선별하여 대만으로 가져왔기 때문에 베이징의 고궁박물원에도 다수의 유물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또한 중국 정부가 계속해서 유물을 보충해왔기 때문이다. 유물을 계속하여 수집해왔다는 사실은 베이징의 고궁박물원도 그동안 자금성이 갖는 박물관의 전시기능을 강화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가장 최근인 20215월에도 고궁 당국은 도자기 전시실을 천안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화전(文華殿 Wenhua dian)에 지난 2년 동안의 준비 끝에 새롭게 단장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이러한 작업은 큰 그림으로 보아 중국 정부가 1978년 개혁개방정책을 통하여 경제 사정이 호전되면서 고고학과 박물관 분야에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해온 문화정책의 일환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몇 개의 대표적 사례를 들면, 1974년 시안 부근의 진시황릉 주변에서 병마용의 발견으로 시작된 고고학적 발굴은 현재에도 진행형이며, 발굴의 결과로 만들어진 <병마용 박물관>(Museum of Qin Terracotta Warriors and Horses) 역시 발굴에 발맞추어 보완이 계속됐다. 각 지방의 박물관 건립도 꾸준히 이루어져 산시성 시안시(西安市)에는 1983년 첫 삽을 뜬 <산시역사박물관>(陕西历史博物馆)1991620일 개관되었고, 1996년에는 <상하이박물관>이 건물을 대규모로 신축하였으며, 2015년 윈난성에서는 현대식 건물의 <윈난성박물관>(云南省博物馆)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듯 중국정부는 현재 홍콩에 베이징 <고궁박물원>의 분원(分院)<홍콩고궁문화박물관>(香港故宮文化博物館, Hong Kong Palace Museum)2022년까지 설립한다는 목표하에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즉 베이징 <고궁박물원> 유물의 일부를 역사적 유적이나 볼거리가 없는 현대도시 홍콩에 전시한다는 것인데, 이는 국제도시 홍콩에 관광의 측면에서 다양성을 제공함과 동시에 중국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창구로 이용한다는 양 측면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이러한 접근방식은 그들 특유의 실용 정신이 바탕에 깔려있다. 중국인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그들의 문화재를 자신들이 그저 끌어안고 지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그 우월성을 만방에 과시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전쟁을 피해 1933년 베이징의 유물을 상하이로 옮겼던 비상시국의 고궁박물원의 당국자가 전쟁의 와중에서도 1935년에는 영국의 초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상하이에 보관된 중요한 유물들 일부를 가지고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중국 예술 국제 전시회>International Exhibition of Chinese Art)에 참가하여 찬사를 받았고, 1940년 초에도 고궁 당국은, 1937년에 중일전쟁을 피하여 쓰촨(四川)성 바셴(巴縣)으로 옮겨놓은 유물 중에서 회화, 태피스트리, 옥기, 청동기 100점을 선별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재의 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된 <중국예술전시회>에 참가했다. 아마 우리의 경우 전시상황에서 한가하게 문화재를 해외로 실어 내 전시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기가 바뀔 만큼 세월이 흘러, 대만과 중국에 이름을 같이 하는 <고궁박물원>이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일상화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중국 정부가 홍콩에서 추진하고 있는 고궁박물원의 분원이 2022년 문을 열게 되면 대만의 고궁박물원이라는 존재도 더욱더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다만 한국이 분단국가인 것처럼 중국과 대만의 고궁박물원들은 보기가 드문 분단박물관으로 당분간 남아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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