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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장어 반기문, 한국 정치를 흔들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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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06월03일 20시35분
  • 최종수정 2016년06월03일 21시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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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명이란, 한 사람의 특징을 바탕으로 남들이 지어 부르는 호칭을 말한다. 운동선수나 영화배우 같이 대중적 인지도와 스타덤을 가진 유명인의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널리 사용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별명은 주로 가족과 친구 등의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 사용된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공무를 수행하는 외교관으로서 대중들에게 무척 잘 알려진 별명을 가진 인물이 있다. 최근 우리 정치권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다.

 

 ‘기름장어’는 반 총장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재직하던 시절, 아무리 까다로운 질문에도 잘 빠져나간다며 기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의 회고록에는 반 총장 본인이 ‘외교관은 기름 바른 장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그 별명의 유래가 어떻든 간에 ‘기름장어’라는 별명이 반 총장을 상징하는 단어임은 분명하다. 

 

 지난 5월 25일부터 30일까지 엿새간의 방한 일정을 통해 나타난 반 총장의 행보는 자신의 별명에 무척이나 부합하는 모습이었다. 반 총장은 방한 일정을 통해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이목을 끌었다.

 

 25일에는 제주 ICC에서 제주포럼 환영 만찬을 통해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원희룡 제주지사를 만났으며, 26일에는 황교안 국무총리와 비공개면담을 가졌다. 또한 28일에는 서울에서 김종필 전 총리를 만나 비공개 면담을 갖는가 하면, 한 호텔에서 고건 전 국무총리,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 등의 정계 원로를 만나 만찬을 갖기도 했다.

 

 반 총장은 1년 반 만의 방한 일정을 통해 대한민국을 종횡무진하며 돌아다녔고, 그 행보는 언론을 통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최근 반 총장의 대선 출마설이 이슈화 된 것은 사실이지만, ‘반기문 대망론’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것은, ‘대망론’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반 총장의 반응이다.

 

 처음 대권 주자로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당시에만 하더라도 반 총장은 “국내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며 자신의 대선 출마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꾸준히 유력 대권주자로 이름을 올리며 유권자들의 여론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최근 기자들의 질문에 반 총장은 “사무총장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남기며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출마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진의를 알 수 없는 회피로 바뀌면서, 언론은 반 총장의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 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차기 대권주자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반 총장은 꾸준히 20%대 이상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이미 반 총장을 유력한 대권주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반 총장의 지지율은 다양한 요인들로 분석할 수 있다.

 

 유엔사무총장이라는 직책에서 기인하는 막연한 기대감과 4·13 총선의 패배로 인해 기존의 대권주자들에 대해 확신을 잃은 새누리당 지지자들의 이동, 그리고 소위 ‘충청 대망론’에 의한 충청도 유권자들의 지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반 총장의 지지율이 대선을 1년 넘게 남겨둔 상황에서 얼마나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에는 뿌리 깊은 정치혐오가 자리 잡았고, 기성 정치인들에게 실망한 대중은 선거철마다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제3의 인물을 정치권의 대안으로 부상시켰다. 1992년 제14대 대선에 출마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나, 지난 대선을 통해 정치권에 등장해서 유력 대권주자로 성장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대표적인 예이다. 반 총장의 지지율은 이러한 맥락에서 기인하는 점이 크다. 대한민국이 배출한 유엔사무총장이라는 명성이 그를 새로운 대안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3의 인물로 등장한 인물들은 정치행보를 거듭할수록 지지율을 잃는 모습을 자주 보여 왔는데, 반 총장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실제로 한때 상승 일변도를 그렸던 그의 지지율은, 그가 친박 세력의 대선주자로 언급되자 하향세를 보였고, 위안부 협상을 두고 한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다”는 발언은 여론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4·13 총선 이후 실시되는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선두권 다툼을 하는 반 총장이지만, 현실 정치에 개입할수록 지지율이 떨어지는 모양새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반 총장의 지지율이 일부지역에 집중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반 총장의 지지율은 연고지인 충청권과 여권성향 유권자가 많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4·13 총선의 패배로 새누리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몰락함에 따라, 그 지지율을 흡수하면서 발생한 수치일 가능성이 크다.

 

 반 총장은 올 연말까지 유엔사무총장의 신분이기 때문에 국내에서 정치색을 드러내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어렵다. 반 총장이 대권주자로 확실히 자리매김 하기 전에 여권에 새로운 대권주자가 등장할 경우 반 총장의 지지율을 흡수할 가능성은 매우 높으며, 반 총장과 기존 유력 정치인들의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세력이나 계파를 갖고 있지 않은 반 총장을 기존 정치인들이 대권주자로 순순히 받아들일지도 미지수다.

 

 반 총장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의문이 제기된다.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직책이 농담처럼 ‘세계대통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정치인으로서의 역할과 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 총장은 1970년 외무고시를 통과한 이래 세계 각지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교관으로서의 실무적 경험이었지 정치인으로서의 경험이라고 여기기는 어렵다. 정치활동 없이 바로 대권주자로 이름을 올린 반 총장으로서는 그 동안 보여준 정치적 성과가 없다는 것이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또한 반 총장의 지지율이 높은 수치로 나타나는 것에는 그가 ‘정치인이 아니라는 점’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과연 그가 정치권의 전면에 등장하였을 때에도 대중들이 지금과 같은 긍정적인 시선을 유지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반 총장이 미국 유학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망명생활에 대한 동향을 상부에 보고했던 과거가 드러나면서 많은 비판적 견해들이 쏟아졌던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우려다. 또한 일각에서는 외국생활을 오래 한 반 총장이 국민들의 생활에 얼마나 공감하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반 총장은 5월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과대해석하거나 추측하거나 이런 것은 좀 삼가, 자제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대권 출마설에 또다시 애매한 태도를 비쳤다. <뉴욕타임즈> 등의 외신은 반 총장을 일컬어 '무력한 관찰자'(powerless observer) 혹은 '어디에도 없는 자'(nowhere man) 등으로 묘사하며 비판한 바가 있다. 직접적으로 국제분쟁에 개입하지 않고 강대국 사이에서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이른바 ‘기름장어’로서의 모습이 연상되는 비유들이다.

 

 반 총장이 ‘외교관은 기름 바른 장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던 것은, 외교관의 덕목이 큰 대립 없이 이리저리 잘 빠져나가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권주자로 언급되는 반 총장이 지향해야 하는 행보는 외교관으로서의 행보일까, 정치인으로서의 행보일까. 분명한 것은 ‘기름장어’는 유능한 외교관일 수는 있어도,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년 대선, 반 총장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는 ‘기름장어’일까? 아니면 확신에 찬 대답으로 큰 걸음을 내딛는 정치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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