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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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협의 박물관 이야기 <20> 버클리대 ‘인류학박물관’…인디언 <Ishi>를 만나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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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3월07일 09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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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협
  •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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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대는 내가 1996년에 Fulbright Senior Research Fellow, 그리고 2007년에는 Visiting Scholar로 장기간 머물렀고, 정치학과 이홍영 교수와의 공동연구 때문에 여러 차례 방문했던 매우 친숙하고 편안한 곳이다. 그래서 대학과 버클리 곳곳에 추억어린 장소도 많다. Kroeber Hall, 도서관, Moe’s Book Store, 동아시아연구소 인근의 점심 단골집 Great China, 인류학과 길 건너의 cafe La Strada, 그리고 <인류학 박물관>(Phoebe A. Hearst Museum of Anthropology)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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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학의 <인류학박물관>에는 이쉬(Ishi)라는 한 인디언의 슬픈 자취가 깃들어 있다. <이쉬>는 그의 생애 중 마지막 5년을 캘리포니아대학의 <인류학박물관>에서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그가 속했던 야히(Yahi)부족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쉬 이야기>는 이렇다.

부족이 몰살을 당해 홀로 방황하던 이쉬는 1911829일 캘리포니아 북부의 오로빌(Oroville)이라는 마을 한 농가의 창고에 들어와 숨어 있다가 백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쉬는 곧바로 백인들에 의해 감금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캘리포니아대학의 인류학교수였던 KroeberWaterman에 의해 당시 동 대학의 박물관이 자리한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졌다.

<이쉬>가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의 사진을 보면 두려움과 피로에 초췌해진 모습이 역력하다.

<이쉬>가 속한 부족 <야히>3천여 년 동안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살았다. 대부분 인디언이 그랬던 것처럼, 야히 부족도 많을 때는 수천에서 적게는 수백 명이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아왔다. 이러한 소규모의 인구집단은 극심한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통해 순식간에 부족이 사라질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었다.

야히족의 최후는 19세기 초 백인들의 본격적 이주가 시작되고, 설상가상으로 1849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물밀 듯 밀려오는 백인 이주자들에게 사냥터를 빼앗긴 야히족은 때때로 백인들의 목장을 습격하였는데, 반격에 나선 백인들에 의한 대학살 사건이 1866년에 발생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야히족의 인구는 불과 수백에서 수십 명으로 점차 줄었고, 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1908년에는 우연히 산에서 백인과 잠시 스쳐가며 확인된 4명이 전부가 되었다. 그중의 한 명이 <이쉬>였던 것이다.

<이쉬>는 그가 발견될 때까지의 수년을 몇 명의 부족원과, 그리고 그들이 모두 죽은 다음에는 홀로 시에라 네바다산맥 북쪽 한 귀퉁이의 디어 샛강 (Deer creek)부근을 배회하며 고독하게 살았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자 야히족의 장례관습을 따라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불사르고, 외롭고 지친 상태에서 몸은 쇠약해지고 더욱더 깡마른 상태가 되었다. 발견 당시 <이쉬>의 모습은 이 세상에 완벽하게 홀로 남아, 지치고 나약해진 인디언의 초상이다. 그리고 사진에 나타난 그의 표정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고 있다.

캘리포니아 인디언을 연구하던 버클리대학 인류학과의 크뢰버와 워터맨은 <이쉬><인류학박물관>으로 데려와 숙소를 마련해 주고 살도록 했다, 그가 결핵으로 1916년 사망하기까지 5년여를 더 산 <이쉬>는 점차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야히족의 관습을 잊지 않고 적에게는 절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원칙을 끝까지 지켰다. <이쉬>라는 이름은 크뢰버가 야히족의 말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이쉬'라는 단어를 이름으로 대신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그가 진정 누구였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그가 새로운 환경에서 얼마나 불행했는지, 아니면 일말의 행복감을 느껴 본 적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상상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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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UC Berkeley Library]

 

<이쉬>에 관련된 여러 자료사진을 보면서 한 장의 사진이 특별하게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쉬>가 붙잡힌 지 3년 뒤인 1914, 건강도 회복하고 크뢰버와 워터맨과의 우정도 쌓여 그들과 같이 그의 고향 디어 샛강(Deer creek)을 다시 찾아갔을 때, 그가 옛 시절 부족의 벗들과 자유롭게 몸을 담그던 <정든 강에 몸을 던져 수영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그것이다.

그의 삶, 그의 가족, 그의 부족이 함께하던 곳. 땅과 하늘과 강이 곧 자신이었던 자연 속 <이쉬>의 모습에서 참된 행복을 읽는다. 그래서 이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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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UC Berkeley Library]

 

<후기 1>

우연한 기회가 생겨 이쉬가 붙잡힌 오로빌(Oroville)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내가 묵은 모텔의 주인은 인도사람이었고, 마을의 일터에는 히스패닉이 많이 보였다. <이쉬>가 떠난 뒤 90년이 지난 지금, 오로빌에 <이쉬>의 흔적은 없었다.

다만 약 40분 거리에 있는 Yuba-Sutter라는 곳에서 마을사람들이 <이쉬>의 이름을 붙인 활쏘기 대회를 일 년에 한 차례 갖는 것을 알게 되었다. (Ishi Tournament)...

오로빌을 나서며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푸른 하늘에는 구름이 조용히 거기 있었다.

소리 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구름처럼

<이쉬>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갔다.

그러나 구름은 언제고 다시 와

이 땅에 단비를 내려 줄 것이다.

하얀 구름이 모여 단비를 내리고 생명을 키운다.

그리고 하늘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는 것은 역사가 집단적 환상임을 알게 되는 것...

 

<후기 2>

1999년 인류학 교수 Scheper-Hughes는 버클리대학의 이름으로 Ishi에 대하여 사죄를 구하는 공개편지를 Sacramento에서 열린 한 학술모임에서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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