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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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큐레이터(curator)를 ‘뮤지엄의 꽃’이라 한다. 뮤지엄의 핵심 기능을 수행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뮤지엄은 문화적 유물이나 미술품을 대상으로 이를 조사, 수집, 보존, 연구, 전시, 교육 등을 통해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며 새로운 문화적 담론을 생산하는 전문 기관이다. 뮤지엄 내에서 이를 수행하는 전문 집단을 바로 학예사라 한다. 학예사 개념은 서구에서 흔히 통용되는 큐레이터보다 넓은 의미의 박물관・미술관 전문 인력(museum professional)을 통칭한다. 하지만 뮤지엄의 대외적 활동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인물들은 큐레이터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좁은 의미에서 큐레이터란 전시를 만들어내는 전문 기획자이다. 따라서 탁월한 큐레이터를 확보하는 일은 뮤지엄의 역량과 수준을 높이는 일과 직결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법령에 따라 전문 인력인 학예사의 자격요건을 정하고 있다. 준학예사를 거쳐 정학예사가 될 수 있고 정학예사도 경력에 따라 3급에서 1급으로 나뉘며 급수에 따른 자격요건이 정해져 있다. 이것은 일본의 제도를 참조한 것인데, 구미의 경우 학예사제도는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다. 미술관의 경우, 우리의 학예사제도는 80년대 말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입된 후 1993년 자격증 제도가 법제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큐레이터 자격증 소지자는 10,391명(2023.12.31.현재)에 이르고 있다. 점차 뮤지엄이 늘고 있고 직종에 대한 매력으로 큐레이터를 지망하는 인력들은 늘고 있다. 정식 학예사 자격증을 획득하려면 관련 분야를 전공하고 준학예사 시험에 합격한 후, 경력 인정 기관에서 1, 2년 실무경력을 거쳐야 정학예사 3급의 자격증이 발급된다.
하지만, 학예사 자격증 제도는 시행된 후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전문가로서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자격증은 취업이 담보되는 여타의 자격증과는 다르다. 국공립미술관의 경우 자격증 소지 여부와 상관없이 경력과 전문성을 가진 인력이 채용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정부의 지원금이 지급되는 사립미술관의 경우는 반드시 자격증을 소지한 자의 채용을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 석사나 박사 학위 또는 그에 상응하는 고학력자들임에도 급여는 너무 낮다. 그럼에도 준학예사에서 학예사가 되기는 문턱이 너무 높다. 반드시 넘어야 할 문턱은 현장 실무 경험이다. 하지만 실무 경험이라는 것이 수준이 천차만별이어서 반드시 물리적인 시간을 거쳤다 하더라도 그 경험이 실질적인지는 미지수이다. 그리고 이 경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뮤지엄의 정규직이 되어야 하지만 많은 수의 인력이 단기 계약직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밀도있는 현장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쌓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예사가 되고자 하는 수요는 많지만, 박물관 등록 요건이 학예사 1명을 조건으로 하고 있어 뮤지엄의 다양한 전문 영역을 담당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전문가를 육성하고 공급하며 경력을 지속시키는 선순환 구조는 여전히 정교하지 못한 실정이다.
실질적으로 우리의 학예사제도는 국공립박물관에 정규직으로 일하는 전문 인력들의 승급을 위한 필요성 이외에는 많은 인력들에게는 체감되지 않는 제도로 공전하고 있는 실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학예사 자격증 관리 업무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수행하고 있지만, 현장의 실질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기계적으로 정해진 기준에 따라 관습적으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뮤지엄이 튼실해지려면 건물이나 장비와 같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전문 인력의 확보, 그리고 제도나 조직 운영의 정교함이 관건이 되어야 함을 생각할 때, 좀 더 획기적인 개선안이 필요하다. 물론 수다한 여건 속에 서로 다른 성격으로 운영되는 뮤지엄 전체를 충족시키는 제도를 운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의 시스템이 다르고, 환경 변화에 따른 미술관의 변화 속도가 빠른 점을 생각한다면, 좀 더 유연하고 실효성 있게 운영함이 필요하다. 그동안 제도적 개선을 위해 여러 번 현장의 의견이 수렴되기도 하고, 전문가들의 연구가 이어졌지만, 제도의 변화는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최근 우리의 지역 도시들은 인구가 감소하며,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어 지역의 미술관 특히 사립미술관들의 경우 이에 대한 운영을 지속하기에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우선 미술관을 운영하기 위한 전문 인력들이 필요하지만, 대부분 도시의 미술관에서 활동하기를 원하고 있다. 특히 도심에서 떨어진 벽지와 같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장소에선 전문 인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준학예사가 현장경험을 하기 위한 경력 인증기관에서의 연수를 의무로 하고 있지만 경력 인정 기관의 주요 조건으로 학예사가 2명 이상 확보된 미술관을 지정하다 보니 웬만한 지역 뮤지엄은 경력 인정 기관 자격을 얻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력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준학예사들 역시 구할 수 없다. 지역문화의 중요기능을 담당하는 뮤지엄들의 실정이 이러하니 문화로 지역 소멸 위기를 살려보겠다는 정책적 노력이 무상하다.
사실상 최소 2명 이상의 학예사를 확보한 미술관으로서의 경력 인정 기관의 조건은 피상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왜 2명이어야 하는지의 근거는 분명치 않다. 실제로 전국 1,204개 처의 뮤지엄 중에서 경력 인정 기관으로 지정된 뮤지엄은 286개 처로 23.8%에 불과하다. 286개 처 중 대부분은 수도권이나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정부의 사립뮤지엄에 대한 전문 인력 인건비 지원 사업도 경력 인정 기관에 지원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지역에서 사재를 털어 사명감을 가지고 오랫동안 뮤지엄을 운영하는 관장들의 경우 점점 더 운영이 힘들고 정부나 공공기관의 인력자원 사업마저도 수혜를 받기가 힘들어 폐관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실정이다. 사실 경력 인정기관이 새로운 인력을 수급받아 정부의 인건비 지원을 통해 운영해야 한다는 현실이 답답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뮤지엄의 현실임을 생각할 때, 특별히 지역의 오지에 있는 사립 뮤지엄의 경우, 학예 인력의 수를 예외로 하고 기타 조건들이 충실한지만을 가지고 경력 인증기관 여부를 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학예 인력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지역의 문화 발전을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노력하는 박물관이 있다면, 지원을 통해 지역의 문화를 적극 견인해 내는 융통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경력 인증기관의 조건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차제에 지역의 뮤지엄을 살리는 특단의 조치로 인구 소멸 지역의 뮤지엄에 대해 다양한 경력 인정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재정적, 제도적 차원의 획기적 지원책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고 역량이 부족하지만 단순히 지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특례를 줄 수는 없다. 사립뮤지엄에도 공립 뮤지엄과 같이 뮤지엄의 역량에 대한 평가인증 제도를 통해 각 관이 가진 역량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현재의 기계적인 학예사제도를 현실에 부합되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사립의 경우 아직도 열악한 곳이 많아 평가인증 제도를 운용할 수 없지만, 유럽이나 미국과 같이 좀 더 정교하게 평가지표를 개발하여 검증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표에 의한 자기평가, 동료 뮤지엄의 평가, 전문가들의 평가 등을 상시 시스템화하여 뮤지엄들의 역량을 높이며, 이런 역량이 높은 뮤지엄에서의 근무 경력을 학예사들의 자격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뮤지엄은 한 국가의 문화적 수준을 재는 척도이며 중요한 문화산업의 자원이다. 뮤지엄의 숫자보다는 뮤지엄 기능의 본령과 역량이 중요하다. ‘뮤지엄의 꽃’인 학예 연구 인력들의 사회적 처우와 자존감을 높이며 그들이 생산해 내는 콘텐츠의 부가 가치를 높일 때 자연스럽게 국가의 문화적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 제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뮤지엄을 지키고자 하는 실력 있는 인재들이 충분히 확충되고 선순환되도록 학예사제도와 뮤지엄 정책의 혁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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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입력 2025년03월31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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