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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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을 약관(弱冠)이라 하는데 내 스무 살은 ‘초원의 빛’이었다. 그렇다고 싱그러운 푸른빛이 발하는 초원의 이미지와는 다른 약간은 우울한 아니 우중충한 푸름일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대입시에 낙방하여 시골집 골방에 쳐 박혀 있었다. 골방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노트에 낙서를 끌쩍이는 것과 신문을 읽는 것이었다. 신문은 일면에서부터 구인광고까지 샅샅이 신문종이가 닳도록 몇 번씩 읽었다.
그리곤 하루에 두어 시간 마을 앞 냇가 자갈밭에 그물을 쳐두고 모래치기를 했다. 간혹 동네 어른들이 지나가다가 한때 수재로 소문난 녀석이 자갈밭에 모래나 치는 내 모습이 딱했는지 ‘쯧쯧’ 혀를 차기도 했다. 모래삽질하면서 먼 산을 한 번씩 쳐다보기도 하고, 그러노라면 눈물 같은 것이 찔끔거리기도 했다. 하교 때가 되면 까만 교복의 여중생들이 시내 돌다리를 건너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설레곤 했다. 그때 둘 다섯인가 하는 가수의 ‘긴 머리 소녀가’가 내 처지를 대신한다고 생각했다.
-초원의 빛-
신문을 뒤적이던 무료한 내 눈에 번쩍 하는 것이 있었다. 워렌 비티와 나탈리 우드가 주연한 영화였다. D시 송죽극장이었다. 나는 다음 날 그동안 모래를 모아 번 돈으로 골방을 벗어났다. 대학시험 떨어진 것이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나는 부끄러워 시내거리를 활보할 수가 없었다. 꼭 수배당한 도망자처럼 극장을 찾아 영화를 감상했다.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시를 읽다가 감정이 북받쳐 교실을 뛰쳐나가는 나탈리 우드와 그로 인한 사랑의 파국,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재회는 하지만 그때 너무 평범한 농부로 살아가는 워렌비티의 겸연쩍은 웃음이 압권이었다. 그 웃음은 당시 모든 것이 부끄러웠던 내 웃음이었다.
극장에서 나온 D시 동성로 거리는 그날따라 하오의 햇살이 너무 눈이 부셨다. 밝은 햇빛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는 사람 만날까 고개를 들지 못했다. 큰길을 피해 골목골목으로 다방에서 DJ하고 있다는 친구를 찾아갔다.
‘전국 DJ연합회 회장’
다짜고짜 내게 명함을 먼저 내민 친구의 어깨는 매우 거들먹거렸다. 아니 자부심이 만면에 꽉 차 있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든 얼굴치고는 너무 자신만만했다. DJ연합회라는 아주 생소한 단체이지만 원래 뻥이 좀 심한 녀석이었고 그래도 회장이니 그러려니 했다.
우리는 불과 몇 달 전 중대한 대입시 한 달을 앞두고 시내에서 시화전을 하는 호기를 부렸다. 결국 시험 낙방이라는 결과를 얻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당시 친구들의 입시결과가 궁금해서 하나씩 호명하며 물어봤다. 십여 명의 친구들 가운데 합격한 친구는 하나뿐이었다. 나는 나와 같은 동지들이 있음에 크게 위로를 받았다. 사실 나의 위로는 친구들의 낙방 소식보다는 세상에 대한 그 친구의 당당함이 더 컸다. 그 당당함은 연이어 터졌다.
낙방한 녀석들이 대부분 다니는 재수학원에 가자고 했다. 곧이어 녀석은 짐실이 자전거를 끌고 왔다.
이런 자전거를 타고 어떻게 시내거리를 가로질러 갈 수 있느냐는 내 뜨악한 표정에 녀석은 일갈했다.
모르는 소리 말라. ‘짐실이 자전거 곤조’라는 것이 있는데 거리를 제멋대로 활개 쳐도 교통순경도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보고 뒤에 타라고 했다. 그리곤 곧장 달렸다. 신호도 교통위반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앞에서 머뭇거리는 택시를 향해서도 그 친구는 따르릉 자전거 신호를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그러면서 노래까지 불렀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나도 따라 불렀다. 목소리를 높였다. 속이 뻥 뚫려왔다. 큰 길 한가운데서 모든 눈치를 무시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환희였다. 기껏 시험에 한번 떨어졌다고 세상에 모든 죄를 다 지은 사람처럼 의기소침해 있던 내게 그는 위대한 스승처럼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ifsPOST>
- 기사입력 2025년03월15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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