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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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 교수의 변호사 아르바이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7월13일 19시20분
  • 최종수정 2023년07월13일 19시11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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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후보인 서울대 권 교수의 로펌 자문에 대해선 생각할 점이 많다. 대학 교수가 어떤 사건에 대해 자기의 전문성이나 식견을 법정에서 피력하거나 한쪽 당사자 편을 지지하는 소견서를 내는 것은 바람직하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본봉 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은밀하게 로펌에 자문을 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그런 사람을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더더욱 생각해 볼 점이 많다. 

 

미국에서도 로스쿨 교수가 사건을 맡아서 법정에 나가기도 한다. 로스쿨 교수는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지만 로펌에서 일하지는 못한다. 다만 대학의 승인을 얻어서 파트타임으로 로펌의 자문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이런 경우를 'Of Counsel'이라고 하며 로펌은 자기 소속 고문으로 그런 교수 이름을 공개한다. 하지만 유명한 교수들이 그 같은 자문에 몰두하고 교육은 소홀히 한다는 비난도 있다. 

 

유명한 교수가 유명한 사건을 맡아서 큰 화제가 되기도 하는데, 역시 생각해 볼 점도 많다. 넷플릭스를 통해서 알려진 <Bombshell>은 폭스뉴스 사장 로저 에일스(Roger Ailes 1940~2017)를 상대로 앵커우먼 그레천 칼슨(Gretchen Carlson 1966~), 미건 켈리(Megyn Kelly 1970~) 등이 제기한 성추행/성희롱 소송을 다룬 영화다. 영화에도 나오듯이 로저 에일스를 변호한 변호사는 루디 줄리아니(Rudy Giuliani 1944~)와 수전 에스트리치(Susan Estrich  1952~)다. 루디 줄리아니는 1980년대에는 뉴욕시 연방검사장으로 마피아를 뿌리 뽑았고 1994~2001년간 뉴욕 시장으로 뉴욕을 안전하고 살만한 도시로 만들었다. 하지만 말년에 줄리아니는 이런 사건을 맡고 또 트럼프 자문변호사로 행동하면서 노추(老醜)를 드러내고 말았다. 

 

로저 에일스를 적극적으로 대변한 수전 에스트리치는 대학에서 여권법(女權法)을 가르치고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한 열렬한 페미니스트였다. 그녀는 하버드 로스쿨을 우수하게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 교수를 지냈고 로저 에일스를 변호할 당시에는 USC 로스쿨 교수였다. 에일스가 에스트리치를 고용한 이유는 아마도 여권론자인 에스트리치가 자기의 무고함을 보다 잘 대변해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에일스는 폭스뉴스 사장직을 사임해야 했고 소송에서도 패배했으며 그 여파인지 얼마 후 사망했다. 한 때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미국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법률가이던 수전 에스트리치의 이 같은 말년(末年) 행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1994년 6월, LA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O. J. 심슨 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하다. ‘세기의 재판’으로 불렸던 이 살인사건 재판에서 O. J. 심슨을 변호한 화려한 변호인단은 'Dream Team'이라고 불렸다. LA의 유명한 흑인 변호사 자니 코크란, 유명한 형사변호사 리 베일리 등이 심슨을 변호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하버드 로스쿨의 저명한 형법교수 앨런 더쇼위츠(Alan Dershowitz 1938~)도 참여했다. 

 

더쇼위츠는 실제로 재판을 준비한 것보다는 하버드 로스쿨 교수가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검찰측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O. J. 심슨은 무죄판결을 받아냈고, 사건을 담당한 마샤 클라크 검사는 허탈한 나머지 검사직을 사임했다. 유전무죄(有錢無罪)를 이처럼 잘 보여준 경우가 없었다. 이런 사건에 돈을 받고 얼굴을 내밀은 하버드 로스쿨의 저명한 형법 교수는 또 어떠한지,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대학 2학년이던 1971년 6월 13일 펜타곤 페이퍼(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게 된 경위를 작성한 미 국방부 비밀문건)가 뉴욕타임스에 실려서 벌컥 뒤집어 졌다.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은 미국의 안보가 침해된다면서 법원에 보도를 금지하는 명령을 청구했다. 지방법원이 잠정적으로 보도를 중지하는 조치를 취하자 뉴욕타임스는 게재를 중단했고, 워싱턴포스트가 이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해서 미국 대법원은 고등법원을 거르고 직접 이 사건을 앞당겨 다루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New York Times Co. v. United States 판결이 나오게 됐다. 

 

 대법원은 그해 6월 25일​ 양측의 변론을 들었다. 뉴욕타임스를 대리해서 보도의 자유를 주장하는  변론을 한 사람은 예일 로스쿨 헌법교수 알렉산더 비켈(Alexander M. Bickel 1924~1974)이었다. 비켈 교수는 사법부가 사회적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면 안 되고 헌법과 법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펴던 사법 보수주의자였다. 6월 30일, 대법원은 6대 3 판결로 뉴욕타임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부는 언론의 자유를 제약할 정도로 국가안보가 저해된다는 입증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과정은 영화 <The Post>에 잘 나온다.) 

 

당시 대법원은 진보적 대법관이 4명, 보수적 대법관이 3명, 그리고 중도 성향 대법관이 2명이었다. 비켈 교수에 힘입어서 중도 성향인 포터 스튜어트 대법관과 바이런 화이트 대법관이 보도의 자유를 지지하게 됐다고 나중에 학자들은 논평을 했다. 펜타곤 페이퍼 사건과 이  소송은 타임지에도 대대적으로 보도가 됐고, 나는 흥미롭게 그 사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헌법 교수가 대법원에 나와서 변론을 해서 역사적 판결을 만들었다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학원에서 미국 헌법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나는 비켈 교수의 책과 논문을 심취해서 읽었다. 하지만 비켈 교수는 1974년 11월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미국의 헌법학계와 법조계는 그의 때 이른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나는 수전 에스트리치와 앨런 더쇼위츠가 로저 에일스와 O. J. 심슨을 변론한 것은 아카데미즘의 추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이름을 내걸고 변호를 했다. 익명으로 숨어서 일을 해주고 교수 본봉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은 서울대 교수보다 차라리 정직하고 당당하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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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971년 6월 25일, 대법원에서 구두 변론을 마치고 나오는 뉴욕타임스 변호인단. 앞의 가운데가 알렉산더 비켈 교수. 역사의 한 장(章)을 장식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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