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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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7월22일 12시19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22일 15시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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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질나는 뉴스 속 한 장면

 

갑자기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난다. 왜 그럴까?

“못 볼 것을 보았나?”

뚜렷한 원인을 찾기가 어렵다. 

단지 조금 전 어느 방송사의 뉴스를 본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무슨 내용이었기에?

어제(21일) 열린 국회 본회의의 내용을 전하는 보도였다. 이날은 전날 여당 원내대표 연설에 이어 야당인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의 연설이 잡혀있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야당 원내대표 연설에 앞서 국회 의사국장으로 하여금 의안발의 상황을 설명토록 했다. 의사국장은 “110인으로부터 법무부장관 추미애 탄핵소추안이 발의됐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순간 국무위원 석에 앉아있던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방송에 나온 장면이다, 

 

자신의 탄핵소추안이 접수된 상황을 접하면서 왜 웃었을까? 방송에 잡힌 영상만으로는 유추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직접 목격했더라도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말이다.

그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야당의 탄핵 소추가 가소롭다는 뜻인가?”

“탄핵소추를 당해 씁쓸하다는 웃음인가?”

그런데 그렇게 웃음지은 장소가 어디인가? 민의(民意)의 전당(殿堂)이라는 국회 본회의장 아닌가? 

“그렇다면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비웃음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속이 뒤집히고, 헛구역질이 나올 수밖에…….

 

국민의 대의기관(代議機關)인 국회 본회의에 참석한 행정부 장관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탄핵소추를 접하면서 이런 행태를 보인 데 대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설령 야당의 탄핵소추가 다소 무리한 결정이었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뜻 모를 웃음으로 비웃을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이날 추미애 장관은 본회의가 열리는 동안 국무위원 석에 앉아 휴대전화로 윤석열 검찰총장의 아내와 장모에 대한 관련 자료를 보고 있는 장면이 언론사 카메라에 잡혔다. 국회에서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이 휴대폰을 보는 등의 행위가 취재카메라에 노출돼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5선 의원 출신인 추미애장관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일부러 노출시켰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조선일보는 이런 사실에 대해 사설에서 “정권의 눈엣가시인 윤 총장을 압박하기 위한 사찰과 공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고 논평했다.

 

얼마 전에는 추 장관이 부동산대책에 대해 일갈을 했다. 지난 18일 추 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금융의 부동산 지배를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금융과 부동산을 분리하는 21세기 금부분리(금융과 부동산의 분리)정책을 제안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금부분리? 참으로 희한한 듣보잡이론“이라고 논평했다. 많은 사람들은 ”법무부장관이 왜 부동산대책에 대해 연일 논평을 내느냐, 서울시장 출마나 대권도전 의사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자 추미애장관은 20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부동산이 투전판처럼 돌아가는 경제를 보고, 도박 광풍에 법무부 장관이 팔짱 끼고 있을 수 없듯 침묵한다면 도리어 직무유기가 아닐까"라고 주장했다. 물론 법무부장관이라고 부동산 대책에 대한 의견을 내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좋은 의견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듯 부동산대책을 제시하는 것은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지금 바로 추 장관과 같이 너도 나도 당·정·청(黨·政·靑)이 나름대로의 처방과 논평을 중구난방으로 한마디씩 내뱉는 바람에 부동산투기 열풍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혼란을 초래한 것 아닌가?

 

가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싸가지 없다”는 게 있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표준말 ‘싹수’의 방언(강원, 전남)”이라고 풀이돼 있다.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를 속되게 이르는 말. 또는 그러한 예의나 배려가 없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표준말 이라는 ‘싹수’는 “사람이 장차 잘 될 것 같은 조짐, 낌새”다. ‘싸가지 없다’는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없다“는 말이고, 또 ”잘 될 것 같은 조짐이나 낌새도 없다“는 것 아닌가?

 

왜 이 말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일까? 직접적으로는 문제의 국회본회의 뉴스를 보면서 떠오른 문장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뉜 요즈음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싸가지 없는 사람들’의 천국 같아 보였기 때문 아닌가 싶기도 하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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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20년07월22일 15시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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