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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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죽이면 나라가 살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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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6월14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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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고백>은 자신의 딸을 살해당한 중학교 교사 ‘유코’의, 봄방학을 앞둔 종업식 날 학생들 앞에서 하는 “내 딸을 죽인 사람은 바로 우리 반에 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직원회의가 끝난 후 유코는 평소처럼 양호실에 딸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데리러 간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찾다 물이 채워진 수영장에 힘없이 떠 있는 딸을 발견했다. 단순히 사고라 생각하지 않은 그녀는 사인을 쫓다 계획적인 살인임을 알게 됐다. 결국 그녀는 ‘슈야’와 ‘나오키’라는 가해 학생들에게 잔인한 보복을 한다. 

 

이 소설은 여느 성장소설과 같이 ‘용서의 미덕’을 말하지 않는다. 범죄소년들을 옹호하지 않는다. 되레 범죄 피해자 유족에 의한 처절한 응징이 정당화되고 있다. 이처럼 잔혹한 내용의 작품이 일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계보는 <고백>의 모티브가 된 ‘K시 아동 살상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5월, 일본 고베시 모 중학교 교문 앞에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의 잘린 두부가 발견된다. 입에는 일종의 ‘도전장’이 물려있었다. ‘우둔한 경찰’에게 “살인이 유쾌해서 참을 수 없다”라는 공권력을 향한 도발의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미디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전문가들에 의해 범인은 40대 남성으로 추측됐다. 그러나 범인은 14세 소년으로 밝혀졌다. 일본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이후 미디어와 학계의 초점은 소년의 ‘비정상적인 내면’을 밝히는 데 있었다. 어쩌다 생겨난 한 ‘괴물’의 정신 상태와 범행동기만이 유일한 관심사였다. 그 과정에서 소년과 사회 사이 연관성은 점차 논의에서 배제됐다. 소년은 단지 우연히 태어난 ‘비인간’으로 인식됐다. 더해 그 잔혹함 때문에 사람들은 소년 개인에게 증오를 쏟아 부었다. 사적 복수가 행해지는, 이 소설이 각광받은 이유다.

소년을 처벌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라는 나선형의 염세적 질문에 동의하는 소년들이 등장했고, 이를 둘러싼 담론이 형성되었다. 소설에서 가해학생 ‘슈야’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 불편한 이면은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살인이 범죄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악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물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어떤 물체가 소멸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중략) 살인은 악이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신앙심이 희박한 다수의 이 나라 사람들이 철들 무렵부터 받은 교육 효과 때문에 그렇게 믿고 있을 뿐 아닐까?

 

대중은 소설에서 악(惡)에 대한 사적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지만, 오히려 작가는 위 사건으로 대표되는 90년대 소년들의 흉악 범죄로 인한 일본사회의 누적된 불안과 음울감을 자극함으로써 소설 속 한 소녀의 죽음을 단순히 우연한 개인의 불행으로 남겨두지 않고, 공공의 영역으로 끄집어냈다. 소설은 극중 사건의 살해 동기, 진행 과정 등을 피해자 유족인 교사의 시점에서뿐만 아니라, 가해자를 포함한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조명한다. 누구에게도 동정심을 보이거나 특정 인물을 더 비난하지 않는다. 이러한 장치적 특성은 살인과 보복을 변호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보다 객관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한다.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실제 사회에서 벌어지는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 방향을 설정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가해자의 ‘살인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헤아리라는 뜻이 아니다. 범행을 저지르게 된 사회적 맥락을 읽고, 인물의 역사를 추적하고, 동기를 분석하라는 의미다.

범죄를 ‘개인의 일탈’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은 손쉬운 방법이지만, 앞으로의 범죄 발생에는 “무관심 하겠다”는 선포일 뿐이다. ‘가해 소년들이 어떤 경험을 갖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피해자와는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사회는 그때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추적만이 사회 전반에 전염돼 있는 ‘악’의 정당화 논리를 타파할 수 있다.

 

일본만의 문제는 아닐 터. 최근 한국 사회는 촉법소년 연령 하향에 대한 논의로 뜨겁다. 소년들에 의한 일련의 범죄 행위에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몇 달에 걸친 괴롭힘 끝에 동급생을 옥상에서 떨어져 죽게 하고, 여럿이서 한 명을 모텔방에 가두고 때려죽인 행위는 ‘괴롭힘’이라는 단어가 참을 수 없이 가벼워 보일 정도로 잔혹했다. 심지어 많은 경우에 법은 자신을 옭아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영악함마저 보인다. 용서는 없다. 여기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 말라”는 슬로건은 천박한 인도주의에 불과하다. 내일의 범죄에 기회를 주는 얄팍한 수다. 종교에서 ‘악’은 상대적 개념이지만, 적어도 인간사회에서 살인이 어설픈 상대성의 개념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고(思考)가 여기서 끝나선 안 된다. ‘범죄소년에게 다시 사회적 살인을 가하는 것은 해결방안으로 충분한가’에 대한 고민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촉법연령을 만 14세에서, 가령 13세로 낮추면 소년 범죄는 줄어들까. 정부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을 줄 뿐이다. 숙주는 그대로 둔 채 가지치기만 하는 꼴이다. 실제로 전체 소년 범죄 중 미디어에 보도되는 살인 등 특수 강력 범죄는 1% 미만이다. 죄질이 무거운 범죄의 비율도 5%가 안 된다. 소년 범죄자 모두를 사회에서 배제할 심산이 아니라면, 나머지 95%를 교화하고 사회에 재적응 시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에 앞서 소년들이 범죄자로 성장하지 않을 사회 안정망 구축이 시급하다. 결국 목적은 ‘범죄가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90년대 일본의 소년들이 던졌던 ‘악’에 대한 의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같은 전철을 밟게 된다.

 

공동체의 임무는 비뚤어진 소년들에 대한 ‘어른’으로서의 응징이 아니다. 단순히 악에 맞선다고 정의가 아니다. 피해자의 상처를 보듬고,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꾸준한 집단적 노력만이 정의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경멸하기는 쉽지만, 해결하기는 어렵다. 그들을 청소년으로 대하기 포기하고 처벌만 한다면 그들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을 이유도, 술과 담배를 살 수 없게 할 명분도 없어진다.

해서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소년범죄를 보고 느껴야 할 감정은 연민이나 증오가 아닌 ‘부끄러움’이다. 사회의 악이라 치부되는 것에 대한 책임 일부는 나에게도 있다. ‘악’이라 일컬어지는 범죄들이 나의 ‘방치’와 ‘무관심’을 숙주로 삼아 잉태된 것은 아닌지 돌이켜봐야 한다. 어쩌면 <고백>의 작가가 한 소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얘기하고 싶었던 바는 우리 모두가 죄임임을 ‘고백’하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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