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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묻지마 범죄? 묻기 귀찮은 건 아니었나요?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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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5월0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5월03일 15시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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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무책임한 보도와 오보를 가능하게 하는가. 탈진실의 시대에서 정보의 폐쇄성이 ‘미지의 대상’의 목소리를 무력화하고 오보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사실 보도는 언론에 있어 기초가 되는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 원칙이 특정 대상과 사안을 다룰 때 빈번히 간과된다는 것이다. 언론은 보도하는 대상의 발언권이 부재할 경우 이를 미묘하게 이용해 거짓 특종을 내거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입맛에 맞는 기사를 내보내곤 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불법이주민노동자, 성매매 노동자, 성소수자, 임신중절(낙태)을 한 여성, ‘묻지마 범죄’의 폭력성으로 오인되고 있는 조현병 환자 심지어 북한은 같은 입장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존재 자체가 불법이고 위험 대상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발언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이들이다. 과거 북한에 대한 과도한 추측성 보도가 그러했듯 오늘날까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소수자들에 대한 보도가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폐쇄성은 오보를 가능하게 하는 첫 번째 요인이다. 정보에 대한 낮은 접근성은 추측성 기사를 만들고 이는 진실로 오인된다. 추측성 기사에 대한 정확한 팩트 체크가 이뤄지지 않을뿐더러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언론의 이런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은 특히 ‘미지의 대상’에게 이뤄진다. 폐쇄적인 대상은 그 실상을 취재하기가 가장 어려운 체제이다. 이러한 환경은 단편적 정보들에 의거해 보도를 해야 하는 경우를 만든다. 이 때 성소수자와 같이 그 존재 자체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말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 성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대변하라는 말이 폭력적인 이유다. 목소리의 부재는 잘못된 뉴스나 편견을 조장하는 세력들의 힘을 키운다. ‘한국의 에이즈는 동성애에서 온다’거나 ‘성소수자는 성적으로 문란할 것이기 때문에 교육적 차원에서 사라져야한다’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탈진실’의 시대가 두 번째 요인이다. 감정이나 개인적 믿음이 공공여론을 형성하는데 객관적인 사실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 언론은 본래의 목적성을 잊고 시대의 흐름을 탄다. ‘미지의 대상’에 대한 정확한 취재보다 대중의 편견에 편승하는 보도를 함으로써 가까스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탈진실의 정치는 상대진영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편견을 강화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일부 한국 언론들의 보도행태도 마찬가지다. 오보의 위험을 알면서도 ‘아니면 말고’식의 기사들을 내보내는 것은 그런 기사들을 열광적으로 수용하는 계층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선입견에 확신을 더해주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탐색한다. 자신이 믿는 것에 반대 되는 정보는 찾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보는 이렇게 열광적인 독자와 시청자들을 거치면서 사실로 둔갑해 퍼져나간다. 

 

현재 조현병 환자를 조명하는 기사와 ‘묻지마 범죄’라는 제목을 달고 나오는 기사 역시 ‘아니면 말고’식의 보도를 자행하고 있다. 한국기자협회는 지난달 24일 언론이 관행처럼 사용하는 ‘묻지마’ 수식어를 지적하는 기사를 보도했다. 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17일부터 22일까지 ‘진주 아파트 살인’을 네이버에서 검색한 결과 총 2379건의 관련 뉴스가 보도됐다. 하루 평균 400여건의 기사가 쏟아진 셈이다. 뉴스 상당수엔 ‘묻지마’라는 단어가 포함된 채였다. 사건발생일인 17일 218개, 18일 156개, 19일 98개, 20일 11개, 21일 24개, 22일 20개 기사에 포함, 조사기간 총 527개 뉴스에서 ‘묻지마’란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서 ‘묻지마 살인사건’ 발생해 5명 사망, 4명 중상, 2명 부상(1보)>처럼 기사 제목 혹은 본문에서 사건의 동기나 성격을 규정하는 방식이 다수였다고 한다.

이미 여러 전문가들은 ‘진주 아파트 살인’은 계획범죄였으며 아동, 여성, 노인 등 약자를 겨냥한 특정 표적이 있었다고 진단했다. 조현병 환자의 경우, 치밀한 범죄를 계획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조현병이 직접적으로 폭력성을 동반한다는 논리는 확실히 증명된 바 없으며 조현병 환자는 적절한 치료와 돌봄이 동반될 시 치유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을 비롯해 이번 진주 아파트의 살인 역시 ‘묻지마 범죄’로 일반화 될 수 없으며 이를 단순히 정신질환자의 범죄행위로 연결 짓는 언론의 보도는 명확한 오류를 낳는다.

 

문제는 언론의 보도에 있다. 조현병 환자에게 부족한 현 제도를 지적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할 방법을 모색하기보다 ‘묻지마 범죄’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필요한 질문들을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다. 한국의 1인당 정신보건지출은 영국, 미국 등 선진국의 15%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보건예산 대비 정신보건예산비율 또한 1.9% 로 WHO 최소 권고기준인 5%에 턱없이 모자란다. 약물치료와 사례관리를 통해 무난히 지역사회에서 이웃으로 살 수 있는 조현병 환자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내물릴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묻지마’라고 했을 때 그 어감 뒤에 가려 사건의 실체는 흐릿해지고 어차피 원인을 알 수 없고 예측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치부함으로써 사건을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할 기회 자체를 제거해버린다. 나아가 ‘조현병’이라는 특정 질병이 유독 크게 불거지고, 이를 ‘범죄’와 연관시키면서 환자들에 대한 집단 혐오감을 부추기고 공포를 조장한다. 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발판을 마련하는 셈이다. 

 

우리는 쉽게 이름을 붙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인류학자 사피어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사고를 바탕으로 언어를 만들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사고를 언어화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용하는 언어는 사고를 형성한다. 

 

언론의 존재 이유는 진실을 추구하고 이를 알리는 데 있다. 언론이 진실과 사실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면서까지 뉴스보도를 자신의 입지 구축과 이해관계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탈진실’ 보도는 객관적 사실이 무시된 자리에 다수와 다른, 소수 집단에 대한 적대감과 당파적 주장이 들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알지 못하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않고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다. 오보에 대한 무책임은 집단 극단화를 통한 방식으로 가짜 뉴스를 확산한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정보 교류를 통해 더욱 극단적인 견해를 갖는 방식으로 집단 동질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미지의 대상’에 대한 안일한 언론의 태도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인식을 방해하고 나아가 혐오를 조장한다. 자극적인 범죄 보도, ‘조현병’이라는 키워드가 자동적으로 붙는 보도,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보도는 선입견을 낳고, 선입견은 편견을 만들며 편견을 차별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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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5월0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5월03일 15시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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